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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강龍江 전홍석全泓錫<효자,열부>
    50년을 반신불수로 사신 어머니를 부부가 업고 명승지를 구경시켜 드린 “용강龍江 전홍석全泓錫”
      전홍석(1916~?)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효자. 호는 용강龍江. 본관은천안. 부친 금파 규선과 모친 옥천 조씨의 3대 독자로 광주 동구 금동 출신이나 북구 본촌동에서 살았다.어려서부터 타고난 성품이 뛰어났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집안이 청한함에도 어버이를 모시는데 항상 말씀에 순응하고 맛있는 음식을 갖추어몸과 마음을 극진히 모셨으며 그와 그의 부인의 효도는 옛말에 왕상王祥의 빙리氷鯉와 맹종孟宗의 설순雪筍 효행 고사에 못지않았다.일찍이 부친상을 당하여 예에 따라 장례를 치르고, 50여 성상을 반신불수로 기거起居 침식寢食을 임의로 하지 못한 모친을 그 부인 선형순宣亨順은 음식을 떠 드리고 어린애와 같이 봉양하고 대소변도 남의 손에 맡기지 아니하고 부부가 번갈아 받아내어 정성이 지극하였으며 때로는 어머님이 관광 탐방을 원하신 즉 부부가 동행하여 등에 업고 다니면서 마음을즐겁게 해드리던 중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시니 예를 갖추어 치장治葬하고 비바람을 가리지 않고 매일같이 성묘하여 묘소를 단정하였다.인근에서 모두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묘 앞에 무릎을 꿇어 통곡하니 그 자리에는 토굴土堀이 되었고 눈물이 떨어진 곳에는 풀잎도 타죽었다.  따라서 출타할 때는 반드시 친영을 뵙고 아룀을 잊지 아니하되 살아 계실 적 섬기듯 하였으며 그 부인 보성 선씨의 효행 실적은 남편에 못지 않게 온갖 정성이 지극하니 그 가정에서 부부의 효행이야말로 경탄치 않을수 없었다.기행비 우측에 용강 전홍석 공덕비가 있다.                             龍江 全泓錫 功德碑東方華閥 天安世家     우리나라 훌륭한 가문 천안전씨 집 안에報本追遠 行路載欣     보본 추원의 도리를 흔쾌히 시행하며追以乃人 敬老九嘉     인간의 성품 따라 기쁘게 노인을 공경하니感其誠意 磨崖立碑     그 정성에 감동하여 돌을 깎아 비를 세운다. 1973년 4월 천안전씨 문중에서 효자 전홍석, 효부 선형순 기행비를 광주광역시 북구 본촌동 488-1번지(하서로 610-8)에 건립하였으며 크기는높이 177cm, 폭 63cm, 두께 30cm 이다.출전 지산 향토지리지, 광주의 문화유적, 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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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차배吳次培 처妻 수원백씨水原白氏<효자,열부>
    ‘특명 학생 오차배 처 수원 백씨 정려각’의 주인 “오차배吳次培 처妻 수원백씨水原白氏”
    오차배(?~?)는 운암동 대자 마을 출신이다. 그의 처 수원백씨의 열녀기록은 1879년에 편찬된 광주읍지 <열녀>편에 상세하게 기록되었다.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오차배의 아내로 열행이 특별히 드러났다. 지아비가 죽던 날 즉시 따라 죽으려 하였다가 시부모의 만류로 억지로 참으며 효도로 부모를 섬기었다.그리고 조카 명운明運을 양자로 삼아 부모를 탓하고 삼년상을 마친 날저녁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으니 즉, 지아비가 죽은 같은 달, 같은 날, 같은 시였다.  1814년(순 조14)에 사실이 알려져 예조에서 정려 하였다.특명학생오차배처수원백씨지려정려각 特命學生吳次培妻水原白氏之閭旌閭을 마을 앞에 세웠다. 정려각은 연구年久 퇴락되어 몇년 전까지만 해도 비각이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비각이 없어지고 비석만이 남아있다.출전 광주읍지, 조선왕조실록.-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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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사근梁泗根의 처妻 동복오씨同福吳氏<효자,열부>
    요절한 독립운동가 양사근의 집안을 일으킨 “양사근梁泗根의 처妻 동복오씨同福吳氏”
       양사근(1915~1939)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자는 원빈元彬. 호는정와靜窩. 본관은 제주. 문흥동 옛 문산 마을 출신이다.그는 일본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만주, 중국, 소련 국경에 피신 중 불행히 병사하게 되었는데 그의 형이 시신을 수습하여 담양군 대덕면 송산리 선영 아래에 안장하였다.당시 그의 처 동복오씨는 젊은 나이인 26세로 남편의 상을 마친 후 새벽에 스스로 목을 매 죽으려 하는 것을 다행히 집에 사람이 있어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특히 오씨 부인은 남편이 독립운동하던 어려운 시절에 시부모와 시누이 등을 정성을 다해 보살폈으며, 그 후 자식들을 잘 기르고 훈육하여혼란에 빠진 당시의 사회에 모범이 되는 일가一家를 이루어 문중에서제주양사근처동복오씨정렬비濟州梁泗根妻同福吳氏貞烈碑를 마을 앞에 세웠다.출전 효열행지, 광주향교지.-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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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계雲溪 안종락安鍾洛<효자,열부>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에게 몸 바쳐 효도한 “운계雲溪 안종락安鍾洛”
     안종락(1889~1963)는 일제강점기의 효자. 호는 운계雲溪. 본관은 죽산竹山. 아버지 안규홍과 어머니 서산류씨의 아들로 광주 북구 생룡동에서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평소에도 남다른 효성을 보였으며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자 명의와 명약을 구하여 치료에 힘쓰는 한편,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아버지의 추한 옷을 남이 알지 못하도록 새벽을 틈타 직접 세탁하고 변 맛을 보아, 병세를 살피는등 오년 동안이나 온갖 궂은 일을 하면서도 싫어하지 않았다.친상에는 상례를 따라 정성을 다하고, 3년 거상을 성실히 거행하였다.향당에서 천거하여 성균관의 표창을 받았다.1998년 3월에 죽산 안씨 오치 대종중에서 운계거사죽산안공기효비雲溪居士竹山安公紀孝碑를 광주광역시 북구 생룡동 산 100번지에 건립하였다. 비의 크기는 높이 210c㎝, 폭 61cm, 두께 31cm이다.                                                        碑文盡人之職을 謂之孝也而其道有二하니 一曰常行耳니 曾關之孝가 是也요 一曰奇行耳니 雪笋泳鯉之孝가 是也라 然이나 常行은 可勸可勉而致也오 奇行은 不可勸勉而致也니 國朝之褒奇行而貶常行이 固所不可而孝子도 역不可而常奇行而忽常行也니라 謹按컨대 公의 諱鍾洛이며 字應夫요 號雲溪라 竹山安氏는 高麗竹城君諱元衡의 后라 曾祖의 諱仁壽요 號梧隱이니 壽職通政이요 祖의 諱錫煥이오 考의 諱圭洪이며 號春圃요 妣는 瑞山柳氏로 萬根의 女니 高宗乙丑九月二十八日生公而公이 自幼로異凡하니 與群兒遊戱에 輒先歸曰恐父母待也라하고 及讀小學에 定省寒燠과 便軆順志를 必欲遵書中所言古人之美行하여 甘毳之具를 必躬檢而進之하며 拱手立床頭하여 待食下然後에 退食하고 日夕으로 備述見聞之細鎻하여 以供悅聽하며 其父偶以風症으로 委席에 有以名醫名藥으로指之者면 不愕遠路而必訪之하여 不顧重價而必求之하고 且以衾之汚穢로 欲不視于人目하여 晨必滌之에 雖子女請代나 不許하고 凡如是者五六星霜而始終如一하며 及其劇에 嘗糞하여 以驗勢之緩急하고 遭艱則攀號擗踊을 幾至于滅性하며 稀粥苦塩而三年을 不口菜果하고 墨面蓬首而三年을 不爲櫛沐하며 敞衣破機而三年을 不着綿絮하고 寢處를 不離苦廬而暫不卸經帶하며 신혼선묘하여 獰風甚雨에 未嘗廢하고 每當忌辰에 哭泣을 如袒括時하며 懼水火之犯軆魄하여 求吉壙改葬하고 因親癠而多識妙方하여 有求者면 往往投藥見效로데 未嘗受其報하니 莫非孝之推也니라 光復後甲辰正月八日卒하니 子男은 東淳相淳이요 孫男은 秉植秉鎭秉昌秉萬秉錄秉南秉龍秉學이라 日에 東淳이 與鄕老泥隱高云錫으로 抱公善狀과 及四掌管成均館答通而來하여 懇懇求文하여 曰王章久熄에 無地可旌이라 然이나 惟不泯者는 士論在也니 與之治一貞珉하여紀其實行하여 竪于宅里 하여 以之羹墻于來後而矜式乎行路면 無乃爲不可乎아 不安得辭之口哉리오 顧今西潮淊天하고 三綱이墜地하여 虞庭五敎와 周家三物을 茫不知何代美譚하니 于此之時에 立此之碑는 非惟使爲婦女者로 有所勸戒也라 將以愧夫世之冠冕鬚髥之忘本背親而自命爲丈夫人者也로다.                        丁丑 四月 初旬坡平 尹丁鍑 撰1998. 3.                                          長興 高光烈 書                                    竹山安氏梧峙大宗中 謹竪출전 지산 향토지리지, 광주의 문화유적, 북구 문화유적조사, 광주 향교지.-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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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문식范璊植 처妻 연일정씨延日鄭氏 <효자,열부>
    26세에 과부가 되어 시부모를 봉양하고 어린 자식을 잘 키운 “범문식范璊植 처妻 연일정씨延日鄭氏”
    범문식(1873~1902)의 처 연일정씨延日鄭氏 (1878~1966)는 정하용鄭河鎔의 딸로 광주 북구 생용동에서 살았다.남편인 범문식의 호는 송림松林, 본관은 금성, 서헌瑞軒 범윤기范潤琦,(1850~1923)의 아들로 생용 마을 출신이다.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으로 문학과 행의行義가 있었고 언행이근신謹愼하였으며 양심을 잃지 않고 하늘이 주신 본성을 간직하니 인근 향당이 공경하였다. 19세에 그와 결혼하여 희일,희주 2남 1녀를 두고, 문인으로서 지조와 행실이 고결했던 심재 범재준范再駿 (1822~1857)의 손부로, 향촌의 정신적 지주로서 만년에 서헌정사瑞軒精舍를 지어 강론에 힘을 썼던 범윤기의 자부로써 중시하重侍下의단란한 가정을 꾸려왔는데, 26세에 남편이 병으로 드러눕게되어 정성을 다해 치료하였으나 차도가 없어 떠나보내기직전에 부인 연일 정씨가 남편을 따라 같이 죽겠다고 하니, 남편의 유언이 시부모님을 누가봉양할 것이며 두 아들은 누가 키울 것인가? 당신이부모님과 자식을 위해살아야 한다고 해서 행실이 바르고 성품이 온화한 정씨 부인은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하고 26세의 젊은 나이에 시부모님을 극진히 봉양하고 어린 자식들을 잘 키웠다.마을 사람들과도 화합을 잘하여 본보기가 되는 삶을 살아 모범이 되었으므로 손자 범대규를 비롯한 광주 유림이 1951년에 ‘연일정씨 효열비’를세워 본보기가 되게 하였다.출전 지산 지리지, 광주읍지, 북구 문화유적.-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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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효자孝子 백홍암白弘嵒<효자,열부>
    병자호란 때는 의병으로 충성하고 부친상 시묘살이에는 호랑이의 호위를 받았다는 효자孝子 백홍암白弘嵒
     백홍암(?~?)은 조선 중기의 충신·효자. 본관은 수원. 광주 북구 삼각동 월산 마을 출신이다.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이흥발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청주까지 진군하였으며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해산하고 고향에 돌아와 부모님을 섬기며 후진양성에 진력하였다. 부친상을당하여 3년동안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호랑이가 항상 여막을 호위 하였다하여 그곳을 호계虎溪라 한다.그의 후손인 백찬수白讚洙의 자는 대연大宴, 호는 곡은梏隱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 상을 당했을 때에는 정성껏 시묘하며 예를 다했으며 선대 홍암공의 충효사적을 찾아 정려를 받도록 하였다. 이에 홍암은 충효증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백홍암지려忠孝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總管白弘嵒之閭라 하고, 찬수는 효자증동몽교관조봉대부백찬수지려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白讚洙之閭라 하여 명정命旌 하였다. 수원백씨 충효 정려각은 병자호란 때의 의병 백홍암白弘嵒의 충의와 효자 백찬수(白讚洙1822~1858)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59년(철종 10) 국가에서 명정命旌한정려로, 북구 삼각동 275-4(우치로 422번길 28)에 1962년 수원백씨 문중에서 이건하였다. 정려각은 콘크리트 바닥에 덤벙주초를 놓고 원주기둥을세워 평기와를 얹은 소슬대문 형태로 되어 있다.출전 광주읍지, 북구 역사인물, 광주의 문화유적, 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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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와慕窩 노계열盧啓悅<효자,열부>
    아홉 살 때부터 맹인인 어머니를 봉양한 “모와慕窩 노계열盧啓悅”
     노계열(1813~1864)은 조선 후기의 효자. 자는 몽우夢佑. 호는 모와慕窩. 본관은 광주. 신암愼菴 필영弼英의 아들로 광주 북구 일곡동 출신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는데 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9세에 모친이안맹眼盲이 되어 물건이 보이지 않음에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고, 그가 성인과 같이 나무하고 고기 잡아 정성을 다해 봉양하였다. 어머니가돌아가시자 상례를 갖추어 장사지내고 여막廬幕을 하고 자식된 도리를다했다.1864년(고종 3)에 졸하였다. 1891년(고종 28)에 향당의 유림이 천거하여 목사 민선호閔璿鎬가 김규흥金奎興 관찰사에 천거하니 도백道伯이 예조禮曹에 추천하여 1892년(고종29)에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하고 정려旌閭를 명하니 송사 기우만奇宇萬에게 정려기旌閭記를 받아 정려를 건립하였다.세월이 흘러 정려가 퇴락하자, 후손들이 1963년 그 자리에 효자 정려각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유허비의 크기는 높이 130cm, 폭 43cm, 두께18cm이다.기우만이 쓴 정려기는 다음과 같다.                                         盧孝子旌閭記聖人爲喪制。許童子不杖。爲不能病也。然則童子而能病。非恒人可及。若孝子四歲而孤。哭父過哀。此豈敎之能使。學之可致。聞者不能無其豈然於孝子。而孝子近故。今人耳目可接。其言不爲無徵。至性者然歟。慈母失明。不能視物。孝子方九歲。不離傍側。定省甘旨。無不如其意。積三十年無違言。癠則嘗糞嘗藥。祝天願代。靡誠不殫。喪則哀毁廬墓。惡獸知感。道司直指後先裦啓。蓋有公議可徵。節孝遺風。歷世有未泯者歟。今上辛卯命旌。翌年壬辰。贈童蒙敎官。孝子諱啓悅。節孝公俊恭。大司成光利。參判希瑞。蓋其遠近顯祖云。旌在所居日谷。光州也。光吾先子先考妣四尺所託。先子嘗於光人之請。屢致力焉。今於胤子汶奎之請。吾何忍辭。孝子再從孫鍾龍又從余遊。以申其請。記其事如此。출전 광주읍지, 광주의 문화유적, 일곡동 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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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효공節孝公 노준공盧俊恭<효자,열부>
    손가락을 잘라 흘러내린 피로 어머니를 살린 “절효공節孝公 노준공盧俊恭”
      노준공(1340~1397)은 고려말의 충신·효자. 호는 심계心溪. 시호는 절효節孝. 본관은 광주. 고려 말 밀직사를 지낸 사청士淸의 아들로 광주 일곡동 출신이다.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기개가 높아 학문에 열중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광주에서 최초로 효자 인물로 『동국여지승람』에 등재되었다.그는 고려말 두문동에 은거한 충신으로 어머니 병환 중에 있을 때는 옆을 지키며 손수 약을 달여 드리고, 변(똥) 맛을 보아 병세를 가늠하였으며,병세가 위태로울 때는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를 어머니 입에 넣어 일시 소생하게 하는 등 극진한 효도에 주위 사람들의 감탄과 함께 그누구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특히 고려 우왕 때 상례 제도가 폐지되고 없어져 모두 백일 동안 복을입고 벗는데, 그는 묘의 여막廬幕에서 3년을 지냈다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절요』에는 3년 상복을 입고 시묘를 살았던효행과 호랑이가 보호했다는 일화가 알려져 나라에서 효자정려를 하사받았다.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는 노준공의 학문과 명성을 듣고 벼슬을 내리고 몇 차례 불렸으나 거절하고 무등산 아래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다 타계하니, 정종은 그에게 정려를 명하고 ‘절효節孝’라는 시호를 주었다. 정려는 1399년(정종 1)에 광주 용산동에 창건하였다.1859년(철종 10년)에 각지의 사람들이 절효사節孝祠를 지어 노준공과노희서를 배향하였으나,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훼철령에 의해훼철되었다가, 1986년에 옛 터에 다시 사당을 중건하고 3위를 추배하여 5위가 배향되어 있다.현재 절효공 노준공과 병조참판 노영국盧永國, 좌찬성 노영방盧永邦, 증병조참판 노희서(盧希瑞 1558~1592), 증병조참판 노윤발(盧潤發?~1598)을 배향하는 절효사는 일곡동 567(일곡로 41번길 41-8)에 위치한다.사우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기단은 잔다듬한 화강암 장대석으로 60cm 정도 높이로 축조하고 상면 역시 화강암부석으로 정연하게 포장하였다. 계단은 양 협문 정면으로만 설치하여 사우의 원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초석은 다듬어 원형초석으로 전퇴 기둥만 사용하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세웠고, 그 밖의 기둥들에는 방형 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가구架構는 기둥 위로 창방昌枋이 결구되고, 주두柱頭가 얹혀 있는 1고주高柱5양가樑架이다. 처마는 겹치마이고 박공벽에 풍판을 갖추고 있다.절효사 현판은 성균관장 박중훈朴重勳이 썼으며 어간 실내 후면에 노준공 영정을 봉안하였다. 숙경문肅敬門은 사우 전면 좌우에 건립된 제실구역 내의 정문으로 규모는 정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경내에는 1946년 여흥 민병승이 짓고 위창 오세창이 쓴 절효사유허비명병서節孝祠遺墟碑銘並序와 1978년에 이건한 정려비각, 강당인 일신재가있다.  출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북구 역사인물, 고려사 절요, 절효공 행장, 광주노씨세고.-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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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사竹史 김광언金光彦<효자,열부>
    부친의 병환에 허벅지를 베어 간병한 “죽사竹史 김광언金光彦”
       김광언(1755~1810)은 조선 후기의 효자. 자는 명여明汝. 호는 죽사竹史.본관은 광산. 광주 북구 본촌동 출신이다.타고난 천성이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의 병환에 허벅지를 베어 간호하였으며, 모친의 상사에는 예로서 정성을 다하였다.유학 임관수林寬壽 등이 광주光州의 고故 학생 김광언金光彥의 효행을 포양하기를 청한 상소가 예조에 접수되어 그 실적을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겠다는 것을 1866년(고종 3) 10월 5일 주상에게 보고(승정원일기)하고 또 전라도 유학 임사욱任思郁 등은 광주光州의 고故 학생 김광언金光彥의효행을 정려하여 포상하기를 청하였다고 1867년(고종 4) 9월5일 예조에서 보고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이에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증직 명정命旌되었다. 1868년 목조로 정려각을 광주광역시 북구 본촌동 317번지에 신축하였다. 세월이 오래되어 목조 정려각은 퇴락하여 그 자리에 1995년 8월에 석조로 교체하였다. 정려비각 내부에는 김광언의 정려비와 전면 위에 증손김영기의 중수기가 새겨져 있으며 옆에는 와비로 중수비가 새겨져 있다.정려각의 규모는 높이 202cm, 폭 59.5cm, 두께 27.5cm이다.                            旌閭重修記惟我族曾祖府君至誠之孝鄕道儒林之薦狀及本道伯之啓辭及諸公之記實甚詳而府君之孝行著于世爲其後裔者何不黽勉以效祖先之行乎立旌己經年歲風雨磨洗丹靑己變棟字己朽則及時修繕不可不謹也令春之役周旋財力者判洙三乭喆洙也終始勤勞者永浩洪仁滿洙字植學稙也事至竣功永基會宗族而告之曰今日吾輩粗知愛親敬兄而不與禽獸同歸者府君所使也今若外修而不修內行是治其未而不治其本其可乎吾家當此國家創建之時勉於問學益修德行母泰祖先是爲承家之道也丙戌春三月上弦 族曾孫永基謹識출전 광주읍지, 승정원일기, 광주의 문화유적, 북구 문화유적조사.-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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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민공忠愍公 전상의全尙毅<충신,의병>
    정묘호란때 안주성에서 장렬히 싸우다 순절한 “충민공忠愍公 전상의全尙毅”
         상의(1575~1627)는 조선 중기의무신. 자는 희원希元 또는 환중桓仲.호는 구성龜城. 본관은 천안天安. 전용全蓉의 아들로 광주 서구 구동에서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력이 남달리 뛰어났으며 화재 서당에서 박붕朴鵬에게서 수학하였다. 말타기와 활 쏘는 솜씨가 뛰어나 그의 나이 29세 때인 1603년에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주부를 거쳐 함경도 갑산도호부 운총만호, 평북 강계도호부의 고산리첨사, 경기도 통진 현의 덕포첨사, 내금위예차預差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 7월에 오윤겸과 함께 회답사回答使로 일본에 건너가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150여 명을 송환해 오는데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왔다. 1618년(광해군 10) 8월에 대궐의 경비를 맡아 보는 어모장군, 행중무위겸사복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개천군수로 좌천되었다가 1625년(인조 5) 구성도호부사 겸 좌영장이 되어 반란으로 폐허가 된 관아를 정비하고 군사를 점검하는 등 변방의 방어에 최선을 다했다.  1627년 1월 14일 후금(청) 태종이 3만 대군을 몰고 의주까지 진출하여파죽지세로 남하한다는 소식을 듣고 평안도 병마절도사 남이흥南以興과 안주목사 김준金浚, 구성 도호부사 전상의 등이 안주성에 모여 청천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방어 전략을 수립하고, 남이홍과 김준은 중영中營을 지키고 전상의 장군은 남영南營인 백상루百祥樓에 진을 치고 지키게되었다.1월 18일 백상루 위에서 적진을 바라보니 적병이 점점 가까이 옴에 따라일시에 적을 공격하니 포성은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날 적병은 크게 패하여 일시 후퇴하였다가 전열을 가다듬어 대군으로 다시 침범함에 장병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으나 중영이 적에게 함락되어 남이흥과 김준이순절하였다. 더욱이 군량이 고갈되고 원병이 오지 않자 전 장병과 함께 죽기를 결의하고 누상에 올라 적을 맞아 5일 동안 싸우다가 그 또한 장렬히순직하고 말았다. 1627년(인조 5) 2월 7일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으며, 시신은 안주로부터 출생지인 광주로 옮기어 동년 7월 26일 무등산 북쪽 능선인 평두산에 예장禮葬하였다. 1684년(숙종 10) 안주의 충민사忠愍祠에 배향되고, 1849년(헌종 15) 광주 경열사景烈祠에 배향되었는데, 1868년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977년에는 광주 지역민들의 뜻을 모아 장군의 묘소를 지방문화재 기념물로 지정하고, 1985년 그의 묘소로 가는 곳에 충민사를 건립하여 배향하고 있다.충민사에는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을 비롯하여 수의문, 정려각, 장군의 유물을 전시한 유물관 등이 있다. 또한 광주고등학교에서 사구동에 이르는 거리를 <구성로>로 명명하여 그 이름을 기리고 있다.출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북구 역사인물, 구성공 전상의장군 실기, 인조실록,매산집, 북구 문화유적, 광주읍지.-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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