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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곡蘭谷 이연관李淵觀<처사,선비>
    무등산 유람기 ‘유서석록’의 저자 “난곡蘭谷 이연관李淵觀”
       이연관(1857~1935)은 조선 말기의 유학자. 자는 형국炯國. 호는 난곡蘭谷. 본관은 광산. 아버지 이인석李麟錫과 어머니 광주 노씨 사이에 광주북구 황계리黃鷄里에서 태어났다.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의 엄한 가르침을 받으며 일곡日谷 외가에서 성장하였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잡스러운행동을 일체 삼갔다. 이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른 결과이다. 18세에 모친을 모시고 고향인 황계리로 돌아와 집안을 일으키고 여섯 가지의 덕행(효도, 형제 우애, 친족 화목, 외척 친목, 친구 간의 믿음, 구휼)을 수행修行하여 인근 향리에 문장과 현인으로 이름을 날렸다.1891년 그는 박성의朴誠義, 임장준任璋準, 송재담宋在淡 등 무등산을유람하고 『난곡유고蘭谷遺稿』에 「유서석록遊瑞石綠」을 남기기를“서석봉瑞石峯을 우러러 바라보니 한 덩어리의 뭉쳐진 숙기淑氣가 엄연하면서도 또한 엄숙하였고, 입석의 만 길은 삐죽삐죽 천겹으로 신령스러운새들과 기이한 짐승들이 무리를 지어 노닐고, 기이한 꽃과 아름다운 풀들이 구름을 헤치며 웃고 있었다. 광석대廣石臺와 풍혈주風穴柱는 생긴 꼴이 기이하였고, 주검굴鑄釰窟과 용추동 龍 湫洞의 고적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어서 별천지의 특이한 격은 붓으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산수가 이처럼 맑고 맑은데 어찌하여 생김새나 재주가 뛰어난 인물이 없었겠는가?”하였다.1895년 동학東學의 교도들이 그의 명성을 듣고 유혹하여 그를 끌어들이려고 하였으나 단호히 거절하였다. 1906〜1907년에 송사 기우만奇宇萬이 항일의병장으로 체포되어 광주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조금도 주저하지않고 위험한 곳을 모시고 따라갔다.1898년 4월 무등산과 금당산이 한눈에 보이는 운암산에 그가 지은 영풍정迎風亭은 아쉽게도 일제 말기 무렵 없어져 불과 50년 남짓 짧은 기간존재했지만 많은 문인들이 시와 글을 짓고 학문을 연마하는 장소이기도했다. 1919년 고종의 국상을 당하여서는 두문불출하였다. 만년에는향산고사香山故事를 본떠서 구로회九老會를 만들어 시문詩文을 통하여 울분을 달래다 향년79세로 타계하였다. 저서로 난곡유고蘭谷遺稿는아들 완상玩相이 편집, 1979년손자 재복再福이 간행하였다.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호남절의록, 호남 정자기행, 북구 문화유적, 난곡유고.-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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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암竹巖 이응구李應龜<처사,선비>
    학창의를 입고 백우선을 흔들며 유유자적한 “죽암竹巖 이응구李應龜”
      이응구(1703~1781)는 조선 후기의 유학자. 자는 주서周瑞. 호는 죽암竹巖. 본관은 광산. 삼우당 이제백李齊白의 아들로 광주 북구 운암동 황계마을 출신이다. 그는 눈썹이 맑고 눈동자가 밝았으며, 타고난 성품이 인자하고 온화하였다. 또 부모에게는 효심을 다하고 형제간에 우애도 깊었다. 지조를 지키고몸가짐을 단정하게 하였으며, 문사文詞에도 능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않아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선산先山 아래 집을 짓고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선영을 바라보며절을 하기를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에도 멈추지 않았으며, 늙어서도그치지 않아 마을에서는 그의 한결같은 효심을 칭찬하였다.그는 사람을 대할 때나 사물을 접할 때는 언제나 성심을 다해서 대했으며, 입으로는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다. 또 한가한 겨를이 있으면 꽃을가꾸고, 때때로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 부르기를 즐겼다.만년에 자미산紫微山 선산 아래 집을 지었는데 가파른 바위가 사진 같이 솟아 있고 바위 가에 대나무가 있어 덮으니 호를 죽암으로 하였다. 죽순이 여름에 나는 것인데 겨울에 돋아나 무성하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기었다. 뜰가에 연못을 파고 향기로운 연꽃을 심었다. 그리고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백우선白羽扇을 흔들며 이 가운데서 산책하니 원근선비들이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그의 둘째 아들 경인 또한 그가 병이 났을 때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그의 목숨을 3일 동안 연장하게 하는 등 집안 대대로 효자가 나자 고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향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그의 유집으로 『죽암유고竹巖遺稿』 4권이 있다. 권 1에는 오언절구81수, 오언율시 1수, 오언고시 1수, 칠언절구 134수와 화답시 9수가 수록되어 있고, 권 2에는 칠언율시 36수와 화답시 48수가 실려 있다. 권 3에는잡저 4편과 화답글 5편, 잠箴 1편, 명銘 2편, 제문 5편이 수록되어 있고,권 4에는 만挽 69편, 제문, 행록, 행장 등이 실려 있다.서문序文은 조선을 대표하는 마지막 유학자 기정진(奇正鎭,1798~1879)이 썼고, 발문跋文은 고시홍高時鴻이 썼다. 이응구의 행장行狀은 오광원吳光源이 썼다.출전 북구 역사인물, 죽암유고, 광주읍지, 광산이씨선세유집, 광주운암.-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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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우당三友堂 이제백李齊白<처사,선비>
    매화와 동백과 수석을 사랑한 “삼우당三友堂 이제백李齊白”
       이제백(1682~1759)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 자는 백여白汝. 호는 삼우당三友堂. 본관은 광산. 아버지 필재必栽와 어머니 창녕 조씨의 아들로 광주 북구 운암동 황계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8세에 부모를 모두 잃고 의지할 곳이 없어 외가에서 자라다가 장성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천성이 어질고 몸가짐이 온화하였으며 정성과공경으로써 선현을 받들었다. 먼저 조고祖考의 묘소를 정비하고 손수 비문을 써 후세에 전하도록 하였다.문학에 뛰어나고 시문을 잘 하였지만, 과거 보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아니하였고, 집안이 가난하였지만 이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다. 시문을짓고 풍류를 읊는 사람들을 높이 받들고 귀하게 여겼기에 교우들도 모두문인과 운치가 있는 인사들이었다.그는 집에 매화와 동백을 심고 수석水石을 그 아래에 두고 즐겨 구경하면서 집의 편액을 삼우당이라 써 걸고 호를 스스로 삼우당이라 하였다. 그까닭은 매화의 청결함과 동백의 곧음, 돌의 견고함을 벗하고자 하는 뜻을취함이었다.  그는 마을의 정신적 지주로 애경사를 주도했던 어른 역할을 하였다. 마을의 규약으로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의 남전여씨藍田呂氏 향약 4대 강령을 바탕으로 조직해 규율 등을 정해 시행했다. 그는 『삼우당유고三友堂遺稿』 2권을 남겼다. 권1에는 오언절구 10수와 화답시 21수, 오언율시 2수와 화답시 34수, 칠언절구 6수와 화답시 20수, 칠언율시 2수와 화답시 4수 등을 남겼고,특히 무등산 유람기인 유산록을 남겼다. 권2에는 만輓 2편,행록과 행장, 실적, 발문 등이실려 있다.출전 북구 역사인물, 삼우당유고, 광주읍지, 광산이씨선세유집, 남도 정자기행.-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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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술재述齋 안종기安鐘基<처사,선비>
    망국의 한을 비분강개한 구인회를 조직한 “술재述齋 안종기安鐘基”
     안종기(1881~1949)는 구한말 유학자. 자는 중술仲述. 호는 술재述齋.본관은 죽산. 서헌瑞軒 안규용安圭容의 아들로 북구 용봉동 봉곡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타고난 맵시가 순수하여 가정의 근본 학문을 이어받고, 송사松沙기우만奇宇萬을 사사師事하여 학문의 지름길을 정하고 진실한 공부를 일찍이 성취했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경술국치로 일제가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빼앗고 한일합병조약을 강제 체결함으로써 고향에 삼양정사三陽精舍를 짓고 은거하며 상고上古 박노원朴魯寃과 부해浮海 안병택安秉宅으로부터 문인門人으로 칭하여 졌으며, 서평西坪 김기상金基尙, 현와弦窩고광선高光善, 송산松山 권재규權載奎에게서 견문을 넓히었고, 율계栗溪정기鄭琦, 과재果齋 이교우李敎宇, 만백晩柏 김병대金炳大 등이 그와 가장 가깝게 교우했던 이들이다.효행이 돈독하여 어버이 질환에는 생피를 먹이려고 자기 손가락 끝을째기도 하였고, 스승의 일에 성의가 있어 담대헌澹對軒을 중건重健하고고산사高山祠를 창건創建하였으며, 송사집松沙集을 발간할 때도 심력을기울이곤 하였다.그의 성품은 밖으로는 화락하나 안으로는 강인하고 행동은 민첩하나말은 느리게 하고 실하면서 화사하지 아니하고 검소하나 결코 비루하지않았다고 한다. 그는 또한 그의 부친인 서헌端軒과 같이 망국민亡國民이된 것을 서러워하여 동지들과 구인회九人會5)를 만들어 비분강개悲憤慷槪로 세월을 보내다 타계하였다.그는 저술著述에 힘쓰지 않아 긴 유고遺稿는 많지 않으나,그가 하세후에 장자인 방순邦淳이 약간 자료를 수집하여 『술재유고述齋遺稿』만남게 되었다. 이 유고 중에서 「논궁리論窮理」, 「소학문목小學問目」,「논어문목論語問目」은 초학初學의 가르침에 지표가 되었고,「사우간왕복문師友間住復文」은 그의 학문과 사상 엿볼 수 있겠다.『술재유고述齋遺稿』는 1989년에 전라남도에서 향토문화연구자료 제28집으로 『서헌유고端軒遺稿』와 함께 영인 간행하게되었다.5) 구인회九人會 : 1933년 8월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결성된 문학 문인 단체이다. 이종명(李鍾鳴)·김유영(金幽影)의 발기로 이효석(李孝石)·이무영(李無影)·유치진(柳致眞)·이태준(李泰俊)·조용만(趙容萬)·김기림(金起林)·정지용(鄭芝溶) 등 9인이 결성하였다.그러나 발족한 지 얼마 안 되어 발기인인 이종명·김유영과 이효석이 탈퇴하고 그 대신 박태원(朴泰遠)·이상(李箱)·박팔양(朴八陽)이 가입하였으며, 그 뒤 또 유치진·조용만 대신에 김유정(金裕貞)·김환태(金煥泰)가 보충되어 언제나 인원수는 9명이었다.출전 술재유고,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남도 정자기행.-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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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헌瑞軒 안규용安圭容<처사,선비>
    광주공원 ‘안규용의적비’의 주인공 “서헌瑞軒 안규용安圭容”
      안규용(1860~1910)은 구한말 유학자. 자는 삼공公三. 호는 서헌瑞軒.본관은 순흥. 아버지 국환國煥과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에 광주 북구 용봉동 봉곡鳳谷 마을에서 태어났다.어려서 할아버지인 봉수鳳壽에게 수업하였고 또 어머니의 명을 받아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선생을 스승으로 삼고 태극이기설太極理氣說을 터득하고 명정학明正學 척사설斥邪說로 당시 학문의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고 선생에게 누차 상서하여 시의時義와 경의經義의 의문점을 토론하였던바 선생은 “견해가 정밀하니 극히 옳은 말입니다(極是極是 見得精密). 군자의 도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니 어찌 희열을 이기오리까(碩果消息 豈勝喜悅)?” 등의 답이 있었다.그와 교류했던 이들로는 일신日新 정의림鄭義林,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상고上古 박노원朴魯寃, 부해浮海 안병택安秉宅, 판서判書 서상우徐相雨, 주목州牧 이희성李羲性 등 이었다.을미시변乙未弑變이 있은 후 송사선생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는 사생死生을 맹서盟誓하는가 하면, 1906년(丙午)에 송사선생이 의병을 꾀하다가사전에 발각되어 광주옥光州獄에 체인逮囚되었는데 그는 수개월 동안 잠시도 옥문을 떠나지 않으면서 식사를 제공하였고, 선생이 경성감옥으로압송됨에 그가 또 시종배종終始陪從하여 무사귀환하였다. 의병장 기삼연奇參衍이 사형되어 그의 유해는 한동안 광주천변 백사장에 방치되어 뉘 감히 접근하는 자가 없었으나 그가 단독으로 관棺을 갖추어 수습하여 광주군 공수방 서탑등(현. 광주광역시 남구 사동 사직공원)에 안장되고 ‘호남의병장 기삼연’이라 새긴 나무 비석을 세웠다. 그로부터20여 년 후에 장성군 황룡면 관동리 보룡산 선영에 이장되었다가 2009년고향 마을인 황룡면 아곡리 뒷산에 재차 이장되었다.왜적이 광주향교에 병원을 설치코자 통문을 돌리어 군 관아에서 유림회의를 열었는데 군수 이하는 오히려 반대를 못하나, 그는 적극반대하여 결국 주장主將에게 끌려가 무수한 변론 끝에 계획을 변경하고 중지하였는데 얼마 후에 돌연 병원간판이 향교에 걸려있어 그가 또 힐책하여 못하게함으로 교궁校宮이 보호되었다. 광주유림은 향교근처에 그의 의적비義績碑를 건립하여 그 공을 기리었다.그는 51세에 타계하여 저서 『서헌유고瑞軒遺稿』를 남기었는데 증손 병도秉度가 여러차례 간행코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89년에 전라남도에서 향토문화연구자료 제28집으로 영인간행하게 되었다.출전 서헌유고,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광주향교지.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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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강三岡 송재학宋在鶴<처사,선비>
    후손들의 친목에 힘쓰고 숭조 정신을 이어간 “삼강三岡 송재학宋在鶴”
      송재학(1889~1961)은 조선 말기의 유학자. 호는 삼강三岡. 본관은 홍주.후해後海 송정묵宋廷黙의 아들로 광주 북구 용두동 거상 마을 출신이다.송사 기우만을 삼산재로 찾아가 스승으로 받들고 학문을 익혔다. 후석後石 오준선,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 외당畏堂 고한주高漢柱, 김일규,박남규 문인 등과 깊이 교유했다.향교, 서원, 사우 등에 제관으로 출입하며 유학자로서 널리 활동 하였다.그리고 애족심이 강해 문중 일에 열과 성을 다하였다. 해광海狂 송제민의 영모재永慕齋를 중건하고, 장령공 후손계를 만들어후손들의 친목과 숭조정신을 이어가는데 정성을 다 하였다.세보世譜와 지장록誌狀錄을 편수하고, 선대의 글을 모아 호은과 후해後海 두 유고를 간행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작고했다.문집으로는 『삼강집三岡集』이 있다.출전 삼강집, 광주시사, 지산 지리지.-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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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해後海 송정묵宋廷黙<처사,선비>
    경술국치의 울분을 품고 산 재야 지식인 “후해後海 송정묵宋廷黙”
       송정묵(1855~1927)은 한말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명오鳴吾. 호는 후해後海. 초명은 황묵晃黙. 본관은 홍주. 증조부는 송수호宋守浩, 조부는송찬현宋贊賢, 부친은 송내규宋來奎이다. 광주 북구 용두동 거상 마을출신이다.  그는 타고난 품성이 강직하고 품기가 고결하였다. 노사 기정진(奇正鎭1798~1879)에게 10년 정도를 배운 문인으로 당시 재야지식인으로 삶을살았던 처사였다.  노사 손자 송사 기우만과 도의로써 사귀면서 동문수확한 오산梧山 이용헌(李龍 憲, 1851~1895) 등이 들려 시를 남겼으며 난와難窩 오계수吳繼洙, 춘담春潭 기동준奇東準, 수헌睡軒 기경연奇慶衍, 익재益齋 고재붕高在鵬,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 외당畏堂 고한주高漢柱,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 신종재愼終齋 기동겸奇東謙 등과 서신을 통해 교류했다.당시 재야지식인으로 삶을 살았던 처사 송정묵은 낙호樂湖라 자호하고정자 낙호정樂湖亭을 짓고 경술국치의 울분을 머금고 죽지 못해 사는 유민이라 칭하였다. 뒤에 후해後海로 고쳐 공자의 부해浮海를 사모하고 9대조 해광海狂 송제민宋齊民의 후손이라는 의미를 담고 그곳에서 학문을강구하며 유유자적했다. 국상을 당한 뒤에 국가의 원수를 갚지 못하자 끝내 복을 벗지 않았으며타고난 품성이 고결하고 강직하였다.그가 쓴 기문과 시가 광주 남구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의 은거처 엄이재기掩耳齋記, 장성군 진원면 김영원金榮源이 4형제의 교유처로 지어 지냈던 사회정四會亭記, 진원면 삼성산三聖山에 조선말기 학자요 의병장,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에 입각하여 의병을 이끌었던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1846~1916)의 강학터 삼산재기三山齋記, 삼호정기三湖亭記, 낙호정운次樂湖亭韻, 물염정논勿染亭論重 등이 현판으로남아 있다.문집으로 5권 1책, 석인본으로 1956년 간행되었던 후해유고後海遺稿가 있다.출전 후해유고, 지산 향토지리지, 남도 정자기행.-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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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은湖隱 송일현宋一賢<처사,선비>
    ‘호은유고’의 저자 “호은湖隱 송일현宋一賢”
       송일현(1788~1874)은 조선 말기의 유학자. 자는 희성希聖. 호는 호은湖隱. 본관은 홍주. 통덕랑通德郞 송수영宋守永과 전의이씨全義李氏의 아들로 광주 북구 용두동 거진 마을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정중했으며 효성이 지극하였고 학문에도 열중하였다. 17살에 아버지의 상을 슬픔과 예의로 치르고 시묘하였다.49세에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에게 강학을 청하여 그의 학문적 성숙을 인정받았고, 노사 기정신奇正鎭과도 교류하여 언행이 모두 당시의 모범이 되었고, 고향에서 후학의 지도에 전념했다.  그가 1874년(고종 11)에 84세로 세상을 뜨자 그의 손자인 송정묵宋廷黙이 그의 시문을 수집하여 조부와 교류했던 송사 기우만의 서문을 받아발간을 서두르다가 이루지 못하고 그의 증손 송근옥宋釿鈺 형제가 노력하여 1911년에 발간했다.  저서인 『호은유고湖隱遺稿』는 3권 1책의 석인본으로, 권1에는 심心,성性, 정情 등의 오언절구와 복행귀로효발원평覆行歸老曉發元坪, 차종대부탄로운次從大父歎老韻 등의 칠언절구, 호은원운湖隱原韻, 봉화기노사회갑운奉和奇蘆沙回甲韻 등의 칠언율시가 수록되어 있다.권2에는 청이문정공부조소請李文貞公不祧疏는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에 반대하다 귀양간 이신의李愼儀가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일이있음을 들어 그를 부조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이다. 계자질서戒子侄書, 상홍매산선생서上洪梅山先生書 등의 서書, 호은자서湖隱自序계묘족보서癸卵族譜序 등의 서序, 이무당기二務堂記, 괴암기槐菴記 등의 기, 발, 잡저가 수록되어 있다.권3 부록에는 서序, 행장,묘갈명과 1911년에 송흥진宋興鎭이 찬한 발跋과 1896년에 기우만奇宇萬이 찬한서序가 수록되어 있다.출전 호은유고, 북구 역사인물, 지산 향토지리지.-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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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옹野翁 범현식范玹植<처사,선비>
    적은 즐거움을 좋아하는 아름다운 선비 “야옹野翁 범현식范玹植”
     범현식(1862~1923)은 대한제국기의 유학자. 자는 양선良善. 호는 야옹野翁. 본관 금성. 윤숙潤璹의 아들로 광주 북구 생룡동에서 출생하였다.일찍이 송사 기우만을 찾아 수업하여 경사를 널리 통하고 성리를 명백히 밝히었다.1890년(고종 27) 무렵에 그의 강학소 겸 처소로 세운 야옹정野翁亭이있다. 여기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 1851~1931)의 기문이 있다.이곳은 당대의 유명인들 집합소로 순국지사 연재 송병순의 아들 지재止齋 송철헌宋哲憲, 성지재 송동식, 경당敬堂 최윤환(崔允煥 1898 ~1979)의 시가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제강점기 초기에 이곳에서 이들과 활발하게 교유하였다.또 그는 선조의 묘 가까운 곳에 또 죽취정竹翠亭을 지어 선조를 추모하며 강학소로 사용했으며 아들 희채가 중수하고 이곳에는 순국지사 심석송병순의 재액과 후석 오준선의 기記와 석음 박노술, 춘단 기동준, 송사기우만, 난와 오계수, 경당 최윤환의 시가 전하고 있다.그는 사람됨이 욕심이 없어 언제나 스스로 적은 즐거움을 좋아하는 아름다운 선비였다.                                     야옹정기 번역문 평평한 들을 배경으로 정자를 지은 주인 늙은이가 외로이 정자 위에 앉아 그 이름을 야옹이라 한 것은 그의 실지를 표현한 것이다.이 정자의 주인이 날마다 여기에 거처하며 그의 마음을 경사에 두고 또그의 뜻을 농포에 의탁하였다. 바쁜 일이 없는 한가할 때는 동쪽 언덕과서쪽 밭두둑을 산책하고 몸이 고달파 쉴 때는 처마 밑 토상 위에 임의로자적하여 그의 몸을 편안히 하였다.엎드려 맑은 들녘을 보고 고개를 들어 먼 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덧 맑은 바람이 실내에 불어오고 밝은 달빛이 회중을 향하여 비치고 있다. 한가한 넓은 들에서 사는 이 즐거움을 어찌 말로 형언할 수 있겠는가?이외에도 봄, 가을 두 철에 지내는 사제의 제주가 넉넉하여 일할 때 입은 작업복으로 서로 자리를 다투어 가며 즐겁게 마시는 일이라든지 책을펴고 글을 읽는 늙은 나무의 그늘이 시원하여 마을 아이들이 공부하려 모여드는 일 등은 이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뜰 위에 섞인 티끌이 없고 빈방에 남은 한가함이 있다.’라는 옛말이 이를 두고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또 어지러운 이 세상이 아무리 백번의 변천이 있다 할지라도 이늙은이의 굳은 뜻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며 또 이치에 맞지 않은 괴상한말이 아무리 세상에 가득하다 할지라도 이 늙은이의 맑은 지조는 조금도흔들림이 없다. 그가 보고 읽는 것은 모두 옛날 성인이 지은 글뿐이요, 또그가 행하고 익힌 것은 모두 옛날 선왕이 만든 예뿐이다.  그의 이러한 행위가 얼핏 세상을 버린 망세자처럼 보이지만 그의 힘으로 농사를 지어 소식을 아니 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세상을 완전히 잊은 벌 단의 군자나 하소의 장인 등에는 미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다음의 아류에 속할 수 있는 위치가 된다는 점에서 부자께서 말씀하신 선진지 야인이라는 그 부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일찍 들은 바에 의하면 ‘세상을 등진 은둔한 사람들이 반드시 산꼭대기나 물가에 들어가 그의 고상한 지위를 이뤘다.’라고 한다. 그런데도 이 늙은이는 이와 달리 산수를 버리고 농촌의 들녘을 택하게 되었다.그의 깊은 뜻은 알 수 없지만, 옛날 고인의 ‘시냇가에 사는 늙은이는 언제나 시냇가에 있기 마련이고 산 가운데 사는 늙은이는 언제나 산속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들 가운데 사는 사람은 그의 뜻대로 냇가와 산속을 드나들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 시의 뜻으로 미루어 생각한다면 비록 산이나 강이 아닌 들녘에 산다고 할지라도 그의 뜻대로 산에 올라 나물을 캐어 그 맛을 즐길 수 있고 또물가에 나아가 고기를 잡아 생선을 먹을 수 있으므로 구태여 한가한 들녘을 버리고 외로운 산수의 사이를 방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오늘의 이 늙은이가 시간의 제한 없이 그의 편리 때문에 산수의 사이를내왕하며 스스로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의 몸은 비록 한가한 넓은 들녘에 있다 할지라도 그 마음의 즐겨한 바가 거의 산수의 사이에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내 비록 병들고 쇠약하여 한 번도 이 정자에 오르지 못하였으나 이 늙은이의 마음에 있어서는 익히 알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에 그의 마음을 헤아려 이 기문을 지은 바이다.주인 늙은이의 성은 범 씨이고 이름은 현식이며 그의 사람됨이 욕심이없어 언제나 스스로 소락을 즐겨하는 아름다운 선비이다.- 금성 오준선 -출전 지산 지리지, 북구 문화유적, 광주의 문화유적, 남도 정자기행.-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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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사海史 문인환文仁煥<처사,선비>
    균산정을 지은 위선사업의 선구자 “해사海史 문인환文仁煥”
     문인환(1863~1930)은 일제강점기의 유학자·효자. 호는 해사海史. 본관은 남평. 균산筠山 문용현文龍鉉의 아들로 광주 북구 청풍동 신촌 마을출신이다.  그는 구한말의 선비로 문행이 높을 뿐만 아니라 남평의 향사鄕祠 건립과 이곳의 서석단瑞石壇 축조 등 많은 위선 사업을 하였고, 부모에 대한효성이 지극하여 정성감지精誠感知의 정성을 다하였다. 그가 이곳에 균산정이란 정자를 짓게 된 것은 그의 선친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였다.그의 선친은 노사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으로 죽파재竹坡齋의 문중 재실에서, 많은 후학을 배출한 당시의 선비였다. 원래 이 자리엔 그의 5대조인성재惺齋 문필상文弼尙이 학문을 연마하며 후학을 가르쳤던 수헌水軒이라는 별당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 이 집이 무너져 없어지면서 황폐해졌다. 이를 애석하게 여긴 선친이 그에게 이 집의 복구를 당부하였으나당시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여러 해를 끌어오다 아버지가 작고한 36년 후에 이 정자를 지어 선친의 호를 따라 ‘균산정筠山亭’이라 하였다.1921년에 그가 광주 북구 청풍동 1025-1에 정자를 건립할 때 그의 내종질인 전前 교관 김기홍, 종제 국환, 족형 찬환 등의 협력을 얻어 창건하였고 그 후 1961년에는 지붕을 기와로 교체하였다.정자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정자 입구에 단칸 기와의 정문이 있고, 정자 전면에 석촌石村 윤용구尹用求의 「균산정」 현판이 걸려 있다. 정내에는 창건주의 정기亭記, 정운亭韻을 비롯한 광산 김만식, 현와 고광선, 동강 김영한, 호음 박노춘, 동보 김기홍 등 22개의 현판이 걸려 있고 전면 좌우의 기둥에 10개의 주련이 부착되어 있다. 정자의 한 중앙에는 다른 정자와는 달리 네 개의 기둥이 별도로 정립하여 판자 마루로 되어 있는 정사각형의 거실이 꾸며져 있고, 그위에 이층 다락이 설치되어 있다.출전 광주읍지, 남도 정자기행, 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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