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절효공節孝公 노준공盧俊恭<효자,열부>
손가락을 잘라 흘러내린 피로 어머니를 살린 “절효공節孝公 노준공盧俊恭”


  노준공(1340~1397)은 고려말의 충

신·효자. 호는 심계心溪. 시호는 절효節

孝. 본관은 광주. 고려 말 밀직사를 지

낸 사청士淸의 아들로 광주 일곡동 출

신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기개가 높

아 학문에 열중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광주에서 최초로 효자 인물로 『동국여

지승람』에 등재되었다.

그는 고려말 두문동에 은거한 충신으로 어머니 병환 중에 있을 때는 옆

을 지키며 손수 약을 달여 드리고, 변(똥) 맛을 보아 병세를 가늠하였으며,

병세가 위태로울 때는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를 어머니 입에 넣

어 일시 소생하게 하는 등 극진한 효도에 주위 사람들의 감탄과 함께 그

누구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특히 고려 우왕 때 상례 제도가 폐지되고 없어져 모두 백일 동안 복을

입고 벗는데, 그는 묘의 여막廬幕에서 3년을 지냈다고 『동국여지승람』

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절요』에는 3년 상복을 입고 시묘를 살았던

효행과 호랑이가 보호했다는 일화가 알려져 나라에서 효자정려를 하사

받았다.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는 노준공의 학문과 명성을 듣고 벼슬을 내

리고 몇 차례 불렸으나 거절하고 무등산 아래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

하다 타계하니, 정종은 그에게 정려를 명하고 ‘절효節孝’라는 시호를 주었

다. 정려는 1399년(정종 1)에 광주 용산동에 창건하였다.

1859년(철종 10년)에 각지의 사람들이 절효사節孝祠를 지어 노준공과

노희서를 배향하였으나,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86년에 옛 터에 다시 사당을 중건하고 3위를 추배하여 5

위가 배향되어 있다.

현재 절효공 노준공과 병조참판 노영국盧永國, 좌찬성 노영방盧永

邦, 증병조참판 노희서(盧希瑞 1558~1592), 증병조참판 노윤발(盧潤發

?~1598)을 배향하는 절효사는 일곡동 567(일곡로 41번길 41-8)에 위치

한다.

사우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기단은 잔다

듬한 화강암 장대석으로 60cm 정도 높이로 축조하고 상면 역시 화강암

부석으로 정연하게 포장하였다. 계단은 양 협문 정면으로만 설치하여 사

우의 원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초석은 다듬어 원형초석으로 전퇴 기둥만 사용하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고, 그 밖의 기둥들에는 방형 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가구架

構는 기둥 위로 창방昌枋이 결구되고, 주두柱頭가 얹혀 있는 1고주高柱

5양가樑架이다. 처마는 겹치마이고 박공벽에 풍판을 갖추고 있다.

절효사 현판은 성균관장 박중훈朴重勳이 썼으며 어간 실내 후면에 노

준공 영정을 봉안하였다. 숙경문肅敬門은 사우 전면 좌우에 건립된 제실

구역 내의 정문으로 규모는 정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경내에는 1946년 여흥 민병승이 짓고 위창 오세창이 쓴 절효사유허비명

병서節孝祠遺墟碑銘並序와 1978년에 이건한 정려비각, 강당인 일신재가

있다. 


 출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북구 역사인물, 고려사 절요, 절효공 행장, 광주노씨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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