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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천石泉 김성은金成銀<처사,선비>
    존경받는 스승 “석천石泉 김성은金成銀”
      김성은(1578~1619)은 자는 사신士愼. 호는 석천石泉. 본관은 광산. 김일金逸의 아들로 광주 북구 용전동 출신이다.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문리를 일찍이 성취하여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평생 후학을 양성하며 종족애가 두터워 원근 자제들이 믿고 따라그 선행을 실천하여 명성이 높았다.  1619년(광해 11) 타계하니 생용동 지내池內 마을 좌측 언덕 임좌에 장사하였다. 뒤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증직됨으로 묘갈명을 위계도魏啓道가 찬하여 상석과 비갈을 세웠다. 또 후손들이 옛 집터 옆 광주광역시 북구 용전동 628번지에 유적비를 광산 김씨 문중에서 1951년에 세웠다. 비문은 종인 운파雲坡 진현珍鉉이썼다.비의 규모는 높 이150cm, 폭 55cm, 두께 21cm이다.  석천 김공유적비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族善表宅朝家之公褒而無階則雲宿之立石記蹟以寓私仲亦其次石泉金公雲衍今日之事是也謹按公諱成銀字士愼號石泉光山人金氏肇祖於新羅王子諱興光文貞公諱策文安公諱良鑑忠貞公議義元文貞公諱台鉉麗代顯祖 國廟都觀察黜陟使諱文發其近祖高祖諱祈忠武衛副司直曾祖諱礇忠順衛展力副尉祖諱敬男號漆石有行義考諱逸隱德不仕妣咸平李氏父副護軍春杰公生 宣祖代戊寅卒已己後 贈詞憲府監察墓芝山面池內左岡壬原夫人慶州李氏命誠女公德行後孫庚洙所述祖德孫述其言足徵據而以爲紋公幼有異質甚聰穎上學不煩師是而文理夙就長而聲譽蔚然名高士友事親志兼養奉祭齊素致誠御家以正敎于以義陸於宗族德於朋友聞人善悅如芻泰見人惡畏如蛇蜴而到臨利害分是非處義理峻嚴不敢于以然嘗四書五經循環熟讀如誦已言而歷代史記諸賢全書手不停披殆無暇日遠近子弟信從來嶽因第樂之多所成就此昆踐履之可敬可書則其餘善行推此可槪所抱才德可以需用於桓而刺史不薦名聲不聞潛興晦跡於淸江白石之涯潤阿陸之孝槃碩人此其非耶一男泳三孫震鋒震玉震鐸皆孝友趾美五傳而尙洪 憲宗己酉成均生員亦公不食之報而容在實生員曾孫根固源深枝亦茂流亦長十世雲仍蔚然成林課忠孝敦詩禮爲其世風君子之遺澤餘陰陰果如是夫容在將碑于古宅之傍與之同心容捖埰中勤於從事道洙權洙容順始終經紀事功克成容澈獨賢石旣具來余問刻感其誠不以不文辭而爲之銘銘曰 竹峰之陰龍江之陽有士懷玉不市深藏石我志竪泉我心流泉石中間琴架書床嘐嘐自適分外名場不亦樂乎靑於浦堂貽謨維何詩禮農桑世以傳守餘韻孔長侁侁子姓性皆溫良無念爾祖陽遠易忘立石記蹟古宅之傍事不偶成邱園增光出入起敬寓慕羹牆                                              歲在 辛卯 春三月 上旬                                            同宗 後生 雲坡 珍鉉 謹撰                                             前寢郞 完山 李錫鍾 謹篆                                                不肖後孫 容瑾 謹書                                                      容在 謹堅 출전 지산 향토지리지, 광주의 문화유적, 북구 문화유적조사, 석천김공유적비문.-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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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암楓巖 김덕보金德普<처사,선비>
    풍암정의 의로운 선비 “풍암楓巖 김덕보金德普”
      김덕보(1571~1627)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 자는 자룡子龍. 호는 풍암楓巖. 본관은 광산光山. 아버지 김붕변金鵬變과 어머니 남평박씨南平朴氏의 셋째 아들로 광주光州 북구 충효동 석저촌石底村에서 태어났다.어려서 종조인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로부터 공부를 하였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김덕홍金德弘, 김덕령金德齡과 함께 의병을 규합하여 3형제가 함께 고경명高敬命 의병에 참여하여김덕령은 전주에서 돌아오고, 큰형 김덕홍은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였다.집에서 모친상을 당한 김덕령은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 등의 권고로 의병장이 되어 경상도 고성에서 적을 방어하고 있었는데 1596년 7월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켜 도원수 권율의 명을 받아 진주에서 운봉까지 진군했는데 이때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체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과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무고로 체포되어 옥사하자 향리에서 세상의 일에는 뜻을 두지 않고 풍암정사風巖精舍를 중수하고 학문 연구에만 힘을 기울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창릉참봉을 제수받았으나 얼마 후 사직 하고 돌아왔고, 다시 오수찰방獒樹察訪과장원서별제掌苑暑別提 등을 제수 받았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은봉隱峯 안방준(安邦俊1573~1654)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노병으로 인해 전장에는 나가지못하고 죽었다. 1785년 전라도 유생 기석주奇錫周 등의 상소에 의해 큰형김덕홍과 함께 포상이 추증되어 의열사에 배향되고 집의執儀 벼슬을 받았다.  풍암정은 광주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15호로 지정되었으며 규모는 정면2칸, 측면 2칸,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졌다.정내에는 고경명, 임억령林億齡, 안방준安邦俊 등의 시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자는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져 있었고 1칸의 방이 있어 이곳에서의 칩거는 난 후인 것으로 보인다.출전 광주읍지, 북구 역사인물, 풍암기, 누정제영, 남도 정자기행,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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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곡水谷 기동익奇東益<처사,선비>
    풍습의 대가 “수곡水谷 기동익奇東益”
      기동익(1829~1897)은 조선 말기의 유학자. 호는 수곡水谷. 본관은 행주.정현正鉉의 아들로 광주 북구 우치동 출신이다.성품이 꼿꼿하고 용모容貌가 엄정하여 비록 외견상의 두려운 기상이있다 할지라도 실지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한만汗漫함이 있어서 사람들이 그의 속내를 알 수 없는 많은 궁금함이 없지 않았다.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고 1889년에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였다. 특히 예학禮學에 대한 깊은 연구를 거듭한 나머지사마온공司馬溫公 주자朱子의 모든 예설禮設을 뽑아 일반의 인정人情및 지리적 풍토風土에 알맞도록 이를 조절하여 한 지역의 풍습風習을 바로 하였고 또 성리의 학문을 탐구하여 여러 후생後生을 가르치는 등의 일을 소임所任으로 여겼다.  1891년(고종 28) 권숭입權崇立 등 상언上言으로 정려旌閭, 증직贈職 등의 등장等狀에 연명 수결하여 참여하기도 하였다.  1879년(고종 16) 광주읍지 간행본에는 박재방朴濟邦의 서序와 윤범구尹範龜, 기동익奇東益의 발跋이 있다. 그 구성은 발간사, 목차, 서, 범례,건치 연혁, 군명, 관원, 성지, 도로, 방리, 산천, 제축, 장시, 교량, 성씨, 풍속, 형승, 학교, 서원, 단묘, 공해, 역원, 사찰, 루정, 고적, 책판, 물산, 진공물선, 상납, 호구, 전총, 전세, 대동, 균세, 봉름, 요역, 창고, 조적, 군기, 군액, 노비, 읍선생, 인물, 재학, 충신, 효자, 효녀, 열녀, 발, 등으로 되어 있다.그 내용은 제영題詠 등 시문과 여러 분야의 인물을 간행 당시까지 자세히 정리해 놓아 호남의 중심이었던 광주의 사적, 문학, 인물 방면에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형승, 학교, 서원, 공해, 역원, 사찰, 누정, 고적 등에 많은 시문을 부기해 놓았다. 학교에 수록된 성현成俔의 「명윤당기明倫堂記」, 기대승奇大升의 「흥학비기興學碑記」를 비롯해서 누정에 수록된 신숙주申叔舟의 「희경루기喜慶樓記」, 풍영정風咏亭에 대한 김인후金麟厚, 이황李滉, 기대승의 시詩, 고적에 수록된 이색李穡의 「석서정기石犀亭記」, 박상朴祥의 「향안서鄕案序」 등이 주목할 만한 것들이다. 인물, 재학에는 염장閻長, 김태현金台鉉, 정철鄭澈, 김장생金長生 등 신라부터 조선까지의 많은 인물에 대한 공적이 간략히 수록되어 있다. 한편 제축, 장시, 진공물선, 상납, 호구, 전총, 전세, 대동, 균세, 요역, 조적, 군기, 군액 등 경제, 재정, 군사적인 면도 충실히 기재되어 있어 읍지 자료의 중요성이 잘 나타나고 있다.출전 광주읍지, 지산 향토지리지.-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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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천梅泉 기동찬奇東燦<처사,선비>
    굳은 지절의 유학자 “매천梅泉 기동찬奇東燦”
      기동찬(1823~1853)은 조선 말기의 유학자. 자는 경문敬文. 호는 매천梅泉. 본관은 행주. 항석恒錫의 아들로 광주 북구 우치동 출신이다.노사盧沙 기정진奇正鎭 선생의 문인으로 당시 많은 선비가 학문의 도리를 강론講論할 때에 비록 많은 선비의 추중推重이 있었다 할지라도 당시의 모든 사람이 그를 가리켜 누구에 지지 않는 제일의 인물이라는 많은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광주 목사 조철영趙撤永이 부임한 그 당시에 그의 출사出仕를 권유하는 여러 차례의 교섭이 있었을 때도 끝내 자신의 학업學業을 이루지못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사절하는 굳은 지절志節을 가지었다.노사 선생의 문집 15권 서書에 왕복 서신이 있어 소개하자면 "족질 경문 동찬에게 주다與族姪敬文 東燦" 요사이 풍우風雨가 자못 괴상한데 어버이 모시는 생활이 한결같이 평안한가? 접때 한 폭의 편지를 받았는데 안부를 물어주어 고마웠을 뿐만 아니라, 자획字劃이나 내용에서 행실을 삼가고 학문을 힘써 닦는 마음을 볼 수 있었으니, 반갑고 기쁜 마음이매우 많았네. 그때 위군魏君이 바삐 출발하는 바람에 답장을 쓰지 못했네. 나는 스스로 잘 지탱하고 있고 나머지는 말할 만한 것이 없네. 날씨가이미 서늘해졌는데 혹시 한 번 틈을 내서 찾아올 수 있겠는가? 이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그가 행실이나 학문에 힘쓰고 있는 마음을 볼수 있어 매우 기쁘고 반가웠다고 하는 것으로 그의 학문과 행실을 짐작할수 있지 않은가 한다.출전 지산 향토지리지, 광주읍지.-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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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봉竹峰 기부奇玞”처사,선비>
    장자의 모범을 보인 “죽봉竹峰 기부奇玞”
      기부(1619~1659)는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죽봉竹峰. 본관은 행주. 정묘·병자 양호란 때 호남 의병의 도유사를 지냈던 기은棄隱 기의헌奇義獻의 장자로 광주 북구 효령동 출신이다. 가계를 보면 1521년에 낙남한 덕성군 기진(奇進 1431~1473)의 고손이다. 그는 학문과 의리가 높았으나 장자는 가정을 책임져야 하고 차자 이하는 출사하여 가문을 빛내고 국가에 헌신해야 한다는 덕성군 기진의 가르침에 따라 그는 벼슬을 접고 가문의 규약과 집안 내림을 바로 세우는데정진하였다. 아우인 기침奇琛은 1651년 30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승문원隷承文院정자正子에 임용되었으나 불행히도 1654년에 큰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타계하였다. 죽봉과 기은을 제향하는 존성재는 원래 묘 앞에 있었으나 연도 미상에소실되어 재실 마련을 염원하던 중 2007년 행주기씨 후손들의 헌성금으로 광주광역시 북구 효령동 352-4번지(우산정사 내) 토지를 매입하고 재실과 회관을 건립하게 되었다. 헌성비는 13대 종손 기용주가 세웠으며 높이 152cm, 폭 174㎝, 두께 48.5cm이다출전 광주읍지, 북구 문화유적, 광주의 문화유적.-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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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당畏堂 고한주高漢柱<처사,선비>
    의리의 선비 “외당畏堂 고한주高漢柱”
      고한주(1871~1959)는 일제강점기의 유학자. 자는 방서邦瑞. 호는 외당畏堂. 본관은 장흥長興. 아버지 제인濟寅과 어머니 하동정씨河東鄭氏의아들로 광주 북구 장등동 출신이다.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도에 있는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 선생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의 종지宗旨를 알고 이치理致를 깨우쳐 실천에 임하였다. 이때 간재 선생은 고한주가 학문을 좋아하고 독실히 배운 것을 행하는 것을 보고 외당畏堂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그는 간재의 의리 정신과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을 계승하여 향리에 은거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나가며 후학을 가르쳤다. 구한말의 국가적 변란에 대해 도리道理의 보존과 전수를 자신의 처세 기준으로 삼고,혼란의 시대를 만나 스스로 의리에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따르는 것을 자정自精으로 하여 처세의 기준으로 삼아 현실에 대응하였다.1905년 봄에는 옥천沃川 산중에 있는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5)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 1839~1912) 두 선생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만년에는 집 뒷산에 집을 지어 만송재晩松齋라 이름하고 원근 학도들을 가르치며 학칙學則을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정색하여 질책하고 춘추로 설강設講하여 사기士氣를 진작振作하였다.늙어서도 지극한 효성이 시들지 않았다. 만송재에서 집까지 수리數里가고한주(1871~1959)는 일제강점기의 유학자. 자는 방서邦瑞. 호는 외당畏堂. 본관은 장흥長興. 아버지 제인濟寅과 어머니 하동정씨河東鄭氏의아들로 광주 북구 장등동 출신이다.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도에 있는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 선생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의 종지宗旨를 알고 이치理致를 깨우쳐 실천에 임하였다. 이때 간재 선생은 고한주가 학문을 좋아하고 독실히 배운 것을 행하는 것을 보고 외당畏堂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그는 간재의 의리 정신과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을 계승하여 향리에 은거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나가며 후학을 가르쳤다. 구한말의 국가적 변란에 대해 도리道理의 보존과 전수를 자신의 처세 기준으로 삼고,혼란의 시대를 만나 스스로 의리에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따르는 것을 자정自精으로 하여 처세의 기준으로 삼아 현실에 대응하였다.1905년 봄에는 옥천沃川 산중에 있는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5)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 1839~1912) 두 선생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만년에는 집 뒷산에 집을 지어 만송재晩松齋라 이름하고 원근 학도들을 가르치며 학칙學則을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정색하여 질책하고 춘추로 설강設講하여 사기士氣를 진작振作하였다.  늙어서도 지극한 효성이 시들지 않았다. 만송재에서 집까지 수리數里가되는데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부친을 문안하면 부친이 말하기를 “너도나이 70이라 몸이 노쇠하니 이후로는 그러지 말아라.”하였다. 그러나 듣지않고 스스로 말하기를 “입신立身하여 부모를 현양顯揚치 못할지언정 소절小節인 이것을 못하면 어찌 자식의 도리이리요.”하고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59년에 죽으니 향년 89세였고, 뒷산 가장동可獐洞에 초장初葬하였다가 동복同福 옹성甕城에 안장하였으며, 죽기 전에 스스로 만가輓歌를 짓기도 했다.『외당유고畏堂遺稿』는 9권 2책으로 되어 있으며 석인본이다. 1책은유실되어 그 내용을 알 수 없고, 권6의 내용은 「소쇄원기瀟灑園記」를비롯하여 19편의 기記와 그밖에 발跋, 명銘, 사辭, 가사歌詞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7에는 「연재선생제문淵齋先生祭文」등 8편의 제문과 축문祝文, 상량문上樑文, 비문碑文 등이 다수 실려 있다.권 8에는 묘갈명墓碣銘,묘지墓誌, 행장行狀이 수십 편 실려 있고, 권 9는부록附錄으로 가장家狀과 권순명權純命이 쓴 행장行狀, 송재성宋在晟이 쓴 묘갈명墓碣銘과 25인이 쓴 만장挽章, 제문祭文 8편이 수록되어 있다.서문은 권순명權純命이 썼고, 발문은 없다.  외당고선생경모비畏堂高先生景慕碑의 위치는 북구 장등동 205(장등마을 입구)번지에 있다. 비의 규모는 길이 175cm, 폭 61cm, 두께 31cm이며 비문은 1996년 이가원이 짓고 송성용이 썼다.출전 외당유고, 두산세계대백과사전, 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 광주권 문집해제,북구 역사인물, 광주시사.-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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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연당自然堂 정대중鄭岱重<생진,음사>
    효성이 하늘에 닿은 수재 “자연당自然堂 정대중鄭岱重”
      정대중(1703~1788)은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언고彦皐. 호는 자연당自然堂. 본관은 하동. 약포藥圃 정오도鄭吾道의 아들로 광주 북구 오치동梧峙洞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글을 널리 읽고 잘 기억하여 한번 보고외우며 붓을 던지고 문장을 이루는 수재秀才였다. 효성을 하늘에서타고나 양친께 음식의 절도와 어버이의 마음에 들도록 봉양하는 일을 어김없이 이행하였다.  1774년 아들이 시종신侍從臣으로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사승事承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고,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의 교지를 받고, 부인 고령신씨도 숙부인淑夫人의교지를 함께 받았다.  1782년 가선대부嘉善大夫 - 종2품에 오르고, 1786년 가의대부嘉義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 종2품의 자급資級을 받았다.  1788년 7월 8일 오치동梧峙洞 자택에서 86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정부인貞夫人 신씨는 착한 일을 즐기며 시를 좋아하고, 부녀자의 법도가 있어 4덕여사四德女士라 하였다.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북구 문화유적.-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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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천松泉 이계익李啓翼<생진,음사>
    독립운동 후원과 빈민구제에 힘쓴 독지가 “송천松泉 이계익李啓翼”
      이계익(1878~1946)은 구한말의 선비 독지가. 호는 송천松泉. 본관은 함평. 오산梧山 용헌의 아들로 북구 오치동 하오치에서 태어났다.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으로 일찍이 학문과 시문에 뛰어나 여러선비들과 교유하였다. 그는 1903년 8월 1일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임명되고, 뒤에 승훈랑承訓郞 등의 관작이 제수되었다.1911년 부친을 위해 오산정을 짓고, 동시대를 살았던 학자 운파雲坡 김진현金珍鉉, 소방小舫 윤정식尹廷植, 소파小波 송명회宋明會, 최익현의아들 운제雲齊 최영조崔永祚, 소봉小峰 이일李鎰 등이 이 정자에서 차오산정운次梧山亭韻 등의 시를 남겼다. 따라서 이 정자에는 우리네 선인들의 충언이 고스라니 묻혀져 있어 오치동은 유서 깊은 사연이 많은 곳이다.1906년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거의擧義와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과 이완식李完植의 독립운동 등에 많은 협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또 남달리 자선심이 뛰어나 자신의 회갑 비용을 아껴 빈민구제에 힘쓴 진실한 독지가이기도 하다.이러한 사실은 비단 함평이씨 기성군파보箕城君派譜나 그리고 그의 손자로 이 정자를 수호하고 있는 이재열의 증언뿐 아니라 당시 각 명사 2백명분의 육필원본肉筆原本을 모아 4권 1상자의 고급장정으로 표구한 그의회갑시첩回甲詩帖에서도 이의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이 시첩의 내용을 살펴보면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를 비롯한 백관수白寬洙, 최두선崔斗善, 오세창吳世昌, 정인보鄭寅普 등의 뛰어난 필적筆跡이 그대로 남아 있어 보는 사람의 마음을 황홀케 하였다. 이러한 점을 보더라도 송천 이계익의 당시 사회적 위치가 어느 정도임을 느낄 수 있고 또그의 효심에 의해 지어진 이 정자의 규모가 어떠함을 알 수 있다.이 정자의 창건 내력을 살펴보면, 1911년에 오치의 안산案山에 세워져별다른 이상 없이 그대로 보존해 오다가 1971년도의 남해고속도로 공사로 인하여 부득이 오치동 518번지의 본가로 이건하였다가 1987년도에 다시 그의 위치를 바꿔 현재의 장소로 이건 오늘에 이르고 있다.이 정자를 관리하고 있는 주인 이재열씨의 말에 의하면 당초 이 정자를이건할 당시 주변의 여러 사람으로부터 “필요 없는 옛날의 정각을 무엇하러 많은 경비를 들여 옮겨 지으려 하느냐.”는 많은 핀잔을 받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손의 도리로 선대의 유업을 지켜야 한다는 굳은 신념으로 두차례의 어려운 이건을 거쳐 오늘의 보전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의당 정내亭內에 결려 있어야 할 주인 이계익의 12원운原韻, 정기亭記를 비롯한윤용구尹用求, 김영한金寗漢, 최영조崔永祚, 고광조高光祚 등의 대서 현판 및 찬미 시문詩文 등 30여개의 판각版刻이 창고에 방치되어 있어 정자로서의 품위를 잃고 있다. 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북구 문화유적, 남도 정자기행.-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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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곡逸谷 이남李楠<생진,음사>
    스스로 일어나 집안을 일으킨 “일곡逸谷 이남李楠”
        이남(1603~1693)은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문칙文則. 호는 일곡逸谷.본관은 광산. 이달선의 현손이며 기호溰虎의 아들로 광주 북구 일곡동에처음으로 들어와 터를 잡고 살았다.  그는 가세가 빈약함을 걱정하여 아들 상룡, 철운, 철립, 철식을 거느리고처가가 있는 일곡으로 이거 정착했다. 그리고 전답을 개간하여 터전을 마련하고, 집을 짓고 살면서 재사齋舍를 건립하여 자손들이 학업을 하도록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입향조인 일곡 공께서는 수직으로 통정대부에증직되었다.  그러나 300여 년이 지나 기록이 거의 사라지고 없는데 겨우 한 편의 기문記文을 찾을 수 있어 후손들이 이를 근거로 1964년 2월에 일곡동 입구도로변에 유허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그런데 비문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 해독하기 어려워 2006년 5월 일곡회관 앞에 국한문 혼용으로 유허비를 만취공 종중에서 다시 세우게 되었다.  증통정대부일곡광산이공휘남지유허비 1은 17세기에 살았던 광산이씨일곡 입향조 이남을 추념하기 위해 후손들이 1964년 2월 광주 북구 일곡동 104번지(한새봉농업생태공원 옆)에 광산 이씨 문중에서 유허비를 세웠다. 비의 규모는 높이 227㎝, 폭 54cm, 두께 28㎝이다.  증통정대부일곡광산이공휘남유허비贈通政大夫逸谷光山李公諱楠遺墟碑 2는 2006년 5월 광주 북구 일곡동 528번지에 유허비를 광산이씨 만취공 종중에서 건립하였는데 비의 규모는 높이 184cm, 폭 122㎝, 두께31cm이다.출전 지산 향토지리지, 광주의 문화유적, 일곡동 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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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암聾巖 노재규盧在奎<생진,음사>
    농암聾巖 노재규盧在奎
      노재규(1836~1920)는 조선 말기 유학자. 자는 화서和瑞. 호는 농암聾巖. 본관은 광주. 증호조참판 진권鎭權의 아들로 광주 북구 일곡동 출신이다.  평소 옛 성현들의 글과 행적에 관한 일화를 좋아했고 재산을 털어 가난한 이웃들을 도왔으며, 한말의 이름난 선비였던 송병선과 최익현과 교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품이 과묵하고 행실이 의로우며 지극한 효성과 학행學行이 높아 유림의 천거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오른 후 품계가 당상관堂上官 이상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나 이를 사양하고 세상을 등진 채 임천林泉에서 학문을 하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자질子姪들을 가르치고 후손들의 교훈이 되는 「언행록言行錄」, 「자경잠自警箴」, 「계자잠戒子箴」 등을 지어 전한 바가 있다. 또한 일가간의 친목은 물론 일가 중에 살기가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이들을 돕는데 앞장섰다. 본시 출세나 영달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나라에서 내리는 벼슬도 마다하고 조용한곳에 들어가 한가로이 책을 벗 삼으면서 조그마한 모정茅亭을 지어 그 이름을 ‘원풍정願豊亭=聾岩亭’이라 하였다. 제액題額은 담산覃山 김경규金敬圭가 썼고 상량문上梁文은 난와難窩 오계수吳繼洙가 썼다. 그 후 당대의 이름난 석학碩學들이 글을 지어 공의 학문과 행의行義를 가찬嘉讚하였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은 수정구지우애독행(守靖求志憂愛篤行: 정절을 지키고 뜻을 구하는 것은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일)이라 하였고,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은 지취청한료묵진심(志趣淸閑了黙塵心 : 뜻을 두는 바가 맑아 한가롭게 사니 더러운 마음이 다 없어짐)이라 하였으며,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은 정대광명여석동맹공지입견불가급(正大光明與石同盟共志立堅不可及 : 마음이 깨끗하고 언행이 바른 것이 돌과 같이 헌출하며 굳은 맹서와 그의 뜻에는 아무도 이에 미치지 못한다)이라 하고, 송사 기우만奇宇萬은 숙신선가이언불입(淑身善家異言不入 : 내 몸을 바르게 하고 집안을 잘 다스리니 이에 딴 말이 있을 수 없다)이라 하였다. 저서著書로 『농암유고聾巖遺稿』가 있다.출전 농암유고, 광주읍지, 북구 문화유적, 남도 정자기행.-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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