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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곡梧谷 류인식柳寅湜<처사,선비>
    향리의 사표 “오곡梧谷 류인식柳寅湜”
      류인식(1879~1951)은 일제강점기의 유학자. 자는 무경武卿. 호는 오곡梧谷. 본관은 문화文化. 양정헌養靜軒 기찬基瓚의 아들로 광주 북구 오치동 하오치 마을에서 출생하였다.용모가 단아端雅하고 재주가 총명하고 민첩하여 글을 배움에 어른의독촉을 번거롭게 하지 않더니 약관弱冠에 아우 인호寅浩와 함께 송사松沙 기우만奇字萬의 문하에서 자신을 위하는 학문을 독실히 익혀 향리의사표師表가 되었다. 한편 효우孝友가 지극할 뿐 아니라 성의와 공경으로몸을 닦고 법도와 예절로서 집을 다스리며, 의리로서 자녀들을 가르치고신의로서 사람을 대하였다.  일찍이 향리의 후생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는데 항상 이르기를 “성현의도道는 효제충신孝悌忠信에 지나지 않으니 바로 이에 힘쓸지어다.” 하고,또 자질子姪들에게 이르기를 “오직 서책을 가까이하고 장기와 바둑을 멀리 할지니라.”하였다.때때로 술을 마련하고 벗들을 초청하여 시부詩賦로서 쌓인 회포를 풀었으며, 문학이 유여하고 지조가 고상하여 많은 사우士友의 추중을 받았으며, 특히 송사松沙 선생이 호기號記를 지어 주었다.향년 73세로 별세하니 묘소는 지금 광주시 삼각동 후록後麓에 모셔졌다.  5남 5녀를 두니 아들은 동렬東烈, 수열壽烈, 광렬次烈, 병렬昞烈, 흥렬洪烈이요, 딸은 광산 노지영盧智永, 영천 이병구李秉龜, 광산 이승찬李承燦, 하동 정찬룡鄭燦龍, 광산 정제섭鄭濟燮에게 출가하였다. 묘갈명은 광산 이민수李玟秀가 지었다. 자손은 광주시 오치동에 세거하고 있다.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시사.-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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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강春岡 노문영盧文永<처사,선비>
    '영원정’의 주인 “춘강春岡 노문영盧文永”
      노문영(1896~1989)은 현대 한학자. 자는 동국東國. 호는 춘강春岡. 본관은 광산. 청계聽溪 종구鍾九와 경주 최씨의 아들로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출신이다.  일찍이 학행을 겸비한 한말의 선비로 일신재에서후진교훈에 힘썼으며, 특히 애족정신과 위선사업에 열과 성을 다하여 1926년 오치동에 광주노씨 삼능단三陵壇을 조성하는데 일제강점기에도 이북 함경도까지왕래하면서 전국 9개 종파의 모금과 문헌을 수집하여 도시조都始祖 노수盧穗의 아들 9형제가 노해盧垓는광주, 노오盧塢는 교하, 노지盧址는 풍천,노구盧坵는 장연, 노만盧樠은 안동, 노증盧增은 연일, 노판盧坂은 평양, 노항盧恒은 곡산 등으로 관향을하고 있으나 한 곳에 단비를 세우고, 9개 종파가 모여매년 3월 15일에 시제를 봉향케 결정하고, 겸하여 각종파의 문헌을 종합하여 노씨대동종안盧氏大同宗案을 정리해 노씨의 역사를 정립함으로 후일에 수보하는 자료로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이에 9관 노씨 대문중에 기여한 공로가 지대한관계로 그의 문중에서 결의하여 노문영을 추모하는 사업으로 영원정永源亭이란 정자를 지어 만년을 한가로이 지내도록 그의 노고에 보답하였다.영원정은 숭일고등학교로 들어가는 우측 아미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이 정자는 1971년 이 마을 춘강 노문영이 만년 거처를 위해 노씨문중에서지어준 정자인데 정자의 형태는 사방 1칸의 팔작지붕으로 그의 기둥이 시멘트로 되어 있고, 아산정사峨山精舍, 독락헌獨樂軒, 망운대望雲臺 등의별칭이 있다. 규모로 보아서는 정자라기보다 산간의 초막에 불과한 작은건물이지만 경관이 아름다운 편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아 폐허가 되어 있다. 정자의 이름을 영원永源이라고 한 것은 노씨구파盧氏九派의 선조를 추모하고, 구파의 종친의 뜻을 두텁게 하여 그의 원류를 길이 보존한다는 영언사지원천혼혼永言思之源泉混混의 뜻을 가지고 있다.정자 내에는 남쪽 면에 정자 주인이 직접 쓴 영원정永源亭, 북쪽에는 독락헌獨樂軒, 동쪽 면에 망운대望雲臺, 서쪽면에 아산정사峨山精舍라는현판이 있으며 정자는 좌우 1칸에 마루가 깔려 있으며 사방 8작지붕 무실형 건물로 4곳에 목기둥의 오랜 보전을 위해 시멘트로 감싸져 있어 주련은 안쪽 기둥에 걸었다. 그리고 천정에 춘헌 노상기, 노진영, 이문수의 영원정기를 비롯해 시문 현판이 10여개가 걸려 있다.출전 남도 정자기행, 광주노씨세고, 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 노공순충비문.-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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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곡은谷隱 노훈규盧勛奎<처사,선비>
    산림에 은거한 곡은거사 “곡은谷隱 노훈규盧勛奎”
     노훈규(1844~1915)는 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덕화德化. 호는 곡은谷隱. 초휘初諱는 동규仝奎. 본관은 광주. 양진헌養眞軒 경도景燾의 아들로 광주 북구 일곡동에서 태어났다.1893년(고종 30) 음사로 통사랑通仕郎 참봉參奉을 지냈으며 성품이 효행스러워 삼년상을 치른 후에도 성묘하는데, 가는 길이 모룡대慕龍臺를지나는데 수석의 경치가 좋아 올라가 경관을 바라보고 내려와서 성묘했다. 늦은 나이에 산림에 숨어 지내니 사람들이 곡은거사라 하였다. 시 두수를 지어 당시에 회자되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화답하여 읊었다. 족질 소해蘇海 종용鍾龍이 묘갈명과 행장을 지었다.  1934년 아들 종구鍾九가 부친의 유적을 기념키 위해 세운 모룡대慕龍臺라는 정자가 있다. 향년 70세로 졸하였는데 1967년 후손들이 모룡대곁 벼랑에는 암반전면에 곡은노공훈규지천谷隱盧公勳奎之阡의 비를 세웠다. 정 내부에는 방은芳隱 임호응林鎬應이 쓴 모룡대기慕龍臺記를 비롯해 많은 기문이 현액되어 있다.광주 북구 일곡동 산 69-1번지에 건립된 비의 규모는 높이 237cm, 폭55cm, 두께 24cm이다.                                   谷隱盧公勛奎之阡 碑文公諱勛奎字德化系出光山五代祖信和高祖重邦號竹溪贈通訓大夫司僕司正曾祖升一壽通政祖弼皞號瑞隱考景壽號養眞軒妣南平文氏公以憲廟甲辰生官通仕郞享年七十配樂安吳氏墓同原艮坐配慶州金氏墓在日谷南麓邛峰坪丙坐南鍾九娶慶州崔氏女朴義休李永善孫文永寅洙宋洙曾孫柄寔柄澔柄官柄魯柄劼以公四五世事蹟祥載家狀與本邑誌東國仕宦錄史 谷隱公登于坮北望戀主東向慕先故名以慕龍且以如見銘曰上有瑞隱養眞軒之賢祖與父下有鍾九文永之肖子若孫公不其無憂遺祉繁延山高水長百世風韻我述其銘用昭億千丙辰中秋族侄 鍾龍 敢銘출전 지산 향토지리지, 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 광주의 문화유적, 남도 정자기행.-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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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파竹波 노수일盧守一<처사,선비>
    예제와 가법을 존중한 “죽파竹波 노수일盧守一”
     노수일(1739~1797)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 자는 봉흥鳳興. 호는 죽파竹波. 본관은 광주. 죽계竹溪 노중방盧重邦의 아들로 광주 북구 일곡동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효우하고 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하며 문예에도 밝았다. 또한 내외상內外喪에도 예제禮制를 극진히 하였으며 너와 나의 구분없이 형제간에도 우애가 돈독하고 극진히 가법을 고수하였다. 운평雲坪 송능상宋能相과 더불어 종유從遊하였으며 임천林泉에서안빈낙도安貧樂道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1797년에 사망한 후통훈대부사복사정通訓 大夫司僕司正에 증직 되었다.슬하에는 1남 노필환과 2녀는 울산인 김경창 金慶昌과 강능인 유기택劉基澤에게 출가하였다.  그의 후손들은 묘하墓下에 영모각永慕閣 광산노씨죽파공파세장비光山盧氏竹波公派世葬碑를 세웠다.출전 일곡동 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 광주의 문화유적.-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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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계竹溪 노중방盧重邦<처사,선비>
    안빈낙도의 선비 “죽계竹溪 노중방盧重邦”
      노중방(1723~1770)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 자는 내언乃彦. 호는 죽계竹溪. 본관은 광주. 부친인 후송後松 노신화盧信和와 모친인 밀양박씨의 아들로 광주 북구 일곡동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효행을 실천하고 학문을 부단히 연마하였으며 운평雲坪 송능상宋能相, 1710~1758의 문인이다. 임천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성리학에심취하여 집에다 글방을 차리고 후진을 가르키며 부모를 지성으로 섬기어 상사를 당함에 한결같이 예절을 따랐다. 스승인 운평雲坪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가난에 편안하고 도를 즐기며 의지가고상하고 세속을 멀리했다.”고 하였다. 안빈낙도하면서살다가 48세에 작고하였다. 뒤에 통훈대부 사복시정에증직되었다. 행장은 현와 고광선高光善이 짓었다.죽계 노중방비는 처음에선암들 길 위에 있었는데 글자가 마멸되자 문중에서 논의하여 1979년 10월 일곡동 숭일고 입구 산 69-1 번지에 청계 노종구비와함께 세웠다. 비의 규모는 높이 150cm, 폭 55cm, 두께 22cm이다.  죽계 노공비문 내용生 正宗朝有援乎流俗守經不廻能盡忠孝之 敎命旌其閭 贈諡曰節孝享節孝祠是爲中祖生諱永國兵曹參判是生諱興利號式齋大司成是生諱珪郡守生諱中崙參判生諱漢經判尹五傳至諱希瑞號嗨齋秉節校尉拰猘倡義旅赴錦山與高霽峰敬命同日殉死 贈兵參錄宣武原從勳寔公之高祖也曾祖諱應濱通德郞祖輝汝八號晩松堂考諱信和號俊公妣密陽朴氏父仁命以 景廟癸卯月日生公于日谷里弟公幼而潁悟父母有命一無諱咈有味必先獻就孰讀小學每鷄嗚而起盥軟問溫情弱冠淹貫經史專以格致用力焉丁外丙艱情以盡哀禮以盡誠使無憾焉除外光陰消盡於黙口坐凝思之中所以神明內膄義理精詳其也禮樂刑政天文地理醫藥卜筮兵農之流無不通曉而迺能贄書謁雲坪宋先生能相論大道之源雲坪大加獎言羽曰安貧樂道從志遠俗歸而忽一日谷昧爽而興沐浴要衣謁廟且省壟而還從容就臥夜靜而暝却有一線紫氣橫空抵簷時 英宗庚寅月日也享年僅四十八歲矣藏之三角山北日谷里左麓老獜洞飛仙嶝卯唑原 哲宗己未以學行贈通訓大夫司僕寺正配淑人李氏全州昌賢其考襄度公矢佑后閨範貞淑墓洞原祔下擧四男三女長守一次升一壽資通政次廷一次奉一號東庵 贈通政俱有文行守一男弼恒升一男弼皥號瑞隱弼位弼龍廷一男弼斗弼樞奉一男弼崑弼仁號南谷操守瑞巖官同樞弼禎餘不能盡錄嗚呼公之學之識維正維博足以有用於世矣而深藏不市又從以年命局之若連城之璧不離王????財斗之劍次의하여 1979년 10월 일곡동 숭일고 입구 산 69-1 번지에 청계 노종구비와함께 세웠다. 비의 규모는 높이 150cm, 폭 55cm, 두께 22cm이다.죽계 노공비문 내용生 正宗朝有援乎流俗守經不廻能盡忠孝之 敎命旌其閭 贈諡曰節孝享節孝祠是爲中祖生諱永國兵曹參判是生諱興利號式齋大司成是生諱珪郡守生諱中崙參判生諱漢經判尹五傳至諱希瑞號嗨齋秉節校尉拰猘倡義旅赴錦山與高霽峰敬命同日殉死 贈兵參錄宣武原從勳寔公之高祖也曾祖諱應濱通德郞祖輝汝八號晩松堂考諱信和號俊公妣密陽朴氏父仁命以 景廟癸卯月日生公于日谷里弟公幼而潁悟父母有命一無諱咈有味必先獻就孰讀小學每鷄嗚而起盥軟問溫情弱冠淹貫經史專以格致用力焉丁外丙艱情以盡哀禮以盡誠使無憾焉除外光陰消盡於黙口坐凝思之中所以神明內膄義理精詳其也禮樂刑政天文地理醫藥卜筮兵農之流無不通曉而迺能贄書謁雲坪宋先生能相論大道之源雲坪大加獎言羽曰安貧樂道從志遠俗歸而忽一日谷昧爽而興沐浴要衣謁廟且省壟而還從容就臥夜靜而暝却有一線紫氣橫空抵簷時 英宗庚寅月日也享年僅四十八歲矣藏之三角山北日谷里左麓老獜洞飛仙嶝卯唑原 哲宗己未以學行贈通訓大夫司僕寺正配淑人李氏全州昌賢其考襄度公矢佑后閨範貞淑墓洞原祔下擧四男三女長守一次升一壽資通政次廷一次奉一號東庵 贈通政俱有文行守一男弼恒升一男弼皥號瑞隱弼位弼龍廷一男弼斗弼樞奉一男弼崑弼仁號南谷操守瑞巖官同樞弼禎餘不能盡錄嗚呼公之學之識維正維博足以有用於世矣而深藏不市又從以年命局之若連城之璧不離王????財斗之劍次乎津上而使朝廷有遺賢之歎使後生未蒙啓迪之效可不惜哉後孫懼夫卓行懿德愈久而愈泯乃伐石將樹之隧側而表之以高弦窩光善氏狀末告之曰願有言也辭不獲謁余文者錫容文永一則公之五代孫一則公之六代孫也其儀表端雅言行溫重不惟其追遠一事爲可敬也 歲己丑五月擧畧而書之則文永也其時尙永斗永相力焉在坪岩上 贈通訓大夫司僕寺正竹溪盧公重邦阡表歲己卯陽月前嘉善大夫 經筵參贊官奎章閣副提學延安李炳觀所撰省略曰士讀書窮理行修身齊家之宜知事君牧民之要而遭遇無因衒鬻爲趾畢生於蓅閒寂寞之濱囂囂然自樂里巷爲之慨指點其所居若所藏此豈不求知於當世者之所得歟近古竹溪處士盧公諱重邦字乃彦光山人竹溪其號也其先有諱俊恭郞節孝先生也時當麗末倫常康獻朝受命先生守岡僕之義不應累徵築室于瑞石山下洗心溪上日臨流賦詩自靖而終人亦謂之心溪先校竪于峨嵋峯下路上也門任昌永宗孫柄黙六代七代也   출전 지산 향토지리지, 일곡동 지표조사보고서, 광주노씨세고.-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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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암慕庵 김상순金尙淳<처사,선비>
    장렬사를 건립한 “모암慕庵 김상순金尙淳”
     김상순(18세기)은 조선후기의 유학자. 자는 여행汝行. 호는 모암慕庵.본관 김해. 망헌공 김광립의 7대손으로 광주 북구 우치동 죽방촌에서 태어났다.어려서부터 효도로써 수신을 하였고 예로써 집안의 법도를 세우고 문중 일을 위해 솔선 수범하였다. 1849년(헌종 15) 광주 두암동에 흥무왕 김유신의 사당인 장렬사 건립을 주도하며 곡식 수 백석의 재물을 부담하여 완공하고 김유신과 김일손, 김광립을 배향함으로 문중의 존경 받는 어른으로 추앙을 받았다. 이 장렬사는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해훼철되고, 1957년 다시 중건하면서 김일손과 김광립을 두암사로 옮겨 배향하였다. 그리고 그해 김해 김씨 문중에서 김상순의 전 공적을 기리기 위해 광주 북구 효령동635-4번지 우곡 마을 입구에 모암거사김공유적비慕庵居士金公遺蹟碑를 세웠다.비의 규모는 높이 161cm, 폭63cm, 두께 28cm이다.慕庵居士金公遺蹟碑公諱尙淳字汝行慕庵其號金海人系出駕洛國首露王新羅興武王諱庚信麗朝金寧君諱牧卿忠簡公諱普遠代之名祖也李朝兵議諱孝源大提學諱永錫 仁祖功臣 贈兵判望軒公諱光立近代之顯祖而公其望軒公之七代孫也公正朝時人生于光州之竹坊村自少孝以立身禮以刑家嫺於文詞爲一時士友之矜式尤長於經濟之才蓋栗數百斛以爲財之畜將以用之而今可以圖爲先之素志遂慨然奮詢議于一省之章甫曰吾金氏興武王之於西岳文愍公之於○溪諸院俱得 賜額之崇典然惟吾七世祖望軒公忠勳功烈赫赫乎 宣仁兩朝而尙闕賜額俎豆之儀者亶由乎子孫之零替也困心衡慮櫛風沐雨三十有餘年紏合縉紳章甫之互應以啓道伯聞 朝庭創建壯烈祠主享興武王文愍公以望軒公配侑焉鳴呼雖不得 朝家之崇典而士林俎豆之儀則敬虛而無怠者干今二百有餘載使湖南人士稱籍乎金海氏之有此祠宇者是誰之賜歟瞻仰功蹟有若泰山之高矣宗族之間每有如許人物則何憂乎先德之不顯何患乎後生之無賴乎公之玄孫慜鎭氏吾宗之英也念先忠志之懇惻而恐泯遺蹟囑余記之余惟慕庵公之述先裕後者若是則繼而述之使之有聞於後世者亦必不無其人焉                        乙酉光復後三十年乙卯新元駕洛金亨在 撰                                            綾城 具哲祐 書출전 지산 향토지리지, 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 광주의 문화유적.-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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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겸재謙齋 김효의金孝義<처사,선비>
    실천하는 유학자 “겸재謙齋 김효의金孝義”
      김효의(1645~1718)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효자. 자는 군성君聖. 호는 겸재謙齋. 본관은 김녕金寧. 부친 김득양과 모친 울산 김씨의 아들로 광주신용동 복룡 마을 출신이다.  제월당霽月堂 송규렴宋奎濂, 문하에서 학문을 공부하였다. 평생 후생들을 가르치며 학문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상을 당해서는 조석으로 묘를 지켰다. 수직으로 통정대부 품계를 받았다.겸재김효의유허비謙齋金孝義遺墟碑는 1969년 금녕김씨문중에서 광주광역시 북구 신룡동 62-26(복룡 마을 입구)에높이 137cm, 폭 53cm, 두께24cm의 크기로 조성하였다. 그비문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通政大夫謙齋金寧金公諱孝義遺墟碑金寧金忠基鐵哲兩章甫將具鳥珉庸表其先祖謙齋公事蹟兩曰携其譜而諸文於文永義不敢固群謹按而爲之言曰公天禀高潔自少之長雅言不離於忠信經學恭儉謙謹而喜怒不形於色不俗競華麗不與人較利害其篤行可知也通明邃學旱有定向從師於霽月堂宋先生文辭典雅無妄動絶外慕築室於濯錦江上敎導後生無疾言遠色律身以禮曰與友朋春暄秋涼論水談山觴詠自適其之學可知也侍親婾婉能竭其力可ロ之味適體之物無不畢備親癠有年夙夜憂懼煮粥煎藥必親誠丁憂哀慽動人乃葬晨昏於基不避雨雪其孝誠可知也此望重之德得其高齡而壽資通政其蒙○天恩可知也於乎偉哉公諱孝義字君聖號謙齋籍金寧 仁廟乙酉八月戊戌十月公之生卒也系出高麗光祿大夫平章事文烈公諱時興爲中祖八我朝大司憲諱光儲吏判退休堂諱順吏判唾軒諱觀端廟名臣白村先生諱文起於公爲八代祖也諱永守業儒進士隱齋諱窷植顧思庵諱敎國高會祖也考諱得良有文行妣蔚山金氏其考洪相也光州日谷村後負乾原公之墓而配淑夫人光山金氏雙墳焉元錫女判書公承魯後也有時寬時綱時望三男而英載時寬出尙載潤時綱出尙鉉萬載時望出其孫男也鳴呼公之平生事爲卓然爲世所難及而其遺風餘韻百世不泯以昌其門欄也於光州城兆伏龍里公之遺墟附近大路上方謀竪石則至於后孫追遠敬慕之城何如是至極也使人士之行過是里者一倍膽仰爲之起敬而式焉者也,                            歲乙酉春三月 上潮 光山 盧文永 謹撰                                        十代孫 鎭哲 謹書                            檀紀四千三百二年 乙酉 四月 日竪                                            十代宗孫鎭石출전 광주읍지, 지산 향토지리지, 겸재김효의 유허비.-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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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파雲坡 김진현金珍鉉<처사,선비>
    구한말의 강직한 지식인 “운파雲坡 김진현金珍鉉”
      김진현(1878~1966)은 구한말의 유학자. 자는 경유景儒. 호는 운파雲坡.본관은 광산. 만포처사晩圃處士 재화在華의 아들로 광주 북구 풍향동에서 출생하였다.어려서 집에서 기초 학문을 닦은 다음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에게 수업하였다. 따라서 노사의 수제자격인 노문삼자 가운데 영남에서는 정재규, 호남에서는 정의림 등에 의해서 노사의 학문이 계승되었다. 장성의 기우만과 함께 호남지역에서 노사학파의 확산을 위해 영광의 이종택李鍾宅, 공학원孔學源, 능주의 양회갑梁會甲, 옥과의 여창현呂昌鉉, 광주의김진현金珍鉉, 장성의 기노백奇老柏, 고창의 성경수成卿修 등이 노사학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송사 기우만 선생이 일으킨 의병 활동에 참여했으나 뜻을 펼칠 수 없자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서자신이 지은 운파재雲坡齋에 숨어 살면서 제자를 양성하면서 추앙받은문학 절의로 석음石陰 박노술朴魯述, 창성滄醒 김보수金寶洙 등 당대에일대의 걸출한 벗들과 기우는 국운을 걱정하는 유유상종한 인물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는 부친이 지은 청음정에서 학문을 강구하고 유유자적했던 서재였으나 도시 개발로 정자는 없어졌다. 이 정자에 구한말 호남 의병장 고광순高光洵, 기삼연奇參衍, 김준金準, 경술국치에 죽음으로 항거한 황현 등의 우국충정을 시로 노래하는 등 우국충정으로 삶을 일관했던 난와難窩오계수吳繼洙, 최익현崔益鉉, 조종필趙鍾弼, 기우만奇宇萬, 기재奇宰,이근호李根澔, 춘담春潭 기동준奇東準 등과 학술 관계로 교유했던 그들의 시가 남아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고 율계栗溪 정기鄭琦, 경당敬堂 최인환崔仁煥, 쌍석雙石 이용희李熙容, 죽하竹下 윤종림尹宗林,춘파春坡 고언주高彦柱, 선중善仲 범형식, 운암雲岩 기낙도奇洛度, 노암老庵 양효묵梁孝默, 오강梧岡 김영철金永喆, 외당畏堂 고한주高漢柱 등과 교류하며 시를 남겼다.  그는 한일 합방 이후 일본인 다지마田島가 와서 유적儒籍에 날인捺印하면 식전息典이 있을 것이라며 날인을 요청하자 분개하며 호통쳐 돌려보내기도 했던 강직한 지식인이요 처사였다.  그는 시문에도 능해 초은정시회樵隱亭詩會, 충원미국시사회忠院薇菊詩社會, 운림당시회雲林堂詩會, 풍영정시회風詠亭詩會, 오산정시회吾山亭詩會, 청음정아회淸陰亭雅會, 청심당속회淸深堂續會, 연파정개회蓮坡亭開會 등에 참여했다. 백양사 쌍계루의 정포은선생판상운鄭圃隱先生板上韻을 비롯해서 100여 곳에 많은 시문과 기문을 남겼다.1924년 장성 고산서원의 담대헌澹對軒 중건 때 25냥을 성금으로 내었다.  1933년 중구일重九日에 동료 제자들과 스승의 지우知友 등 300여 명을 모아 채국계採菊契를 창계하였다. 그는 이미 강의계講義契를 만든 바있고 채국계의 창계를 지원하였으며 해방 후 난심계蘭心契까지 결성하는등 시문을 좋아하고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즐겼다.  『운파유고雲坡遺稿』는 6권 2책 석인본으로 1978년 조카영만永滿이 편집하고 간행하였다. 권1에는 부賦와 시詩가, 권2에는 서書와 화수록花樹錄이,권3에는 서序, 기記, 발跋이 수록되어 있으며, 권4에는 잡저雜著, 제문祭文, 권5에는 비문碑文, 묘표墓表, 행록行錄, 행장行狀이 권6에는 부록이 수록되어 있다.출전 운파유고, 광주시사, 북구 문화유적.-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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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실蘭室 김만식金晩植<처사,선비>
    취가정을 세운 향약실천의 선구자 “난실蘭室 김만식金晩植”
      김만식(1845~1922)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 자는 사성司晟. 호는 난실蘭室. 본관은 광산. 홍태洪泰의 아들로 충효동 충효 마을에서 출생하였다.천성이 온화하고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입재立齋 송근수宋近洙에게 사사했고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과 종유하여 문예가 세상에 드러났다.과거에 뜻을 두어 공영문公令文을 습득하여 향시에 세번 장원하였으나뜻을 이루지 못하고 성현경전에 전념 초학방향初學方向이란 책자를 지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는 임진왜란 때 조선의병의 장수였던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의유덕遺德을 기리기 위해서 취가정醉歌亭을 여러 문족門族들의 협력을받아 1890년(고종 27)에 최초 창건하고 보존 관리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로 이현규와 함께 후학들을 지도하고, 회암晦庵주자朱子의 남전여씨藍田呂氏 향약을 모방하여 마을에서 시행하면서 마을은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흉년이 들면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워 이런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마을에서는 주민을 돕기 위해 구휼할 수 있는 농장을 개설하여 궁핍한 사람을 많이 구제하였다. 1922년78세로 타계하였다.  취가정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불에 타 없어졌으나 후손 김희준金熙俊이 여러 족인族人들과 함께 1955년 중건重建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그의 저서로 『난실유고蘭室遺稿』가 있다. 이 유고 권일卷一에 시詩402수首가 권이卷二에 서書, 기記, 서序, 발跋, 설說, 상량문上樑文, 제문祭文, 행장行狀, 묘표墓表, 묘갈명墓碣銘, 잡저雜著와 권삼卷三 부록附錄에 가장家狀, 행장行狀, 묘표墓表, 묘갈명墓碣銘, 발跋로 편집되어 있다.그가 1900년에 원효사元曉寺에 들러 남긴 시詩가 있어 소개하면十年來往秖園西 십 년을 동산 서쪽만을 오갔더니松檜依然繞舊溪 소나무와 전나무 여전히 옛 시내를 둘렀네.一梘穿林寒溜滴 한 홈통 나무 뚫어 찬 물방울 떨어지고亂藤縈樹密陰低 어지러운 등나무엔 빽빽한 그늘 드리웠구나.銅甁曾是聞龍化 구리병 일찍이 용으로 변했다는 말 들었고畵閣猶能許燕泥 사진누각은 오히려 제비집을 허락했구나.古塔題名誰所證 옛 탑에 붙인 이름 그 누가 밝히리요空山惟有夜猿啼 빈산에는 한밤의 원숭이 울음뿐이로다.출전 북구 역사인물, 난실유고, 광주시사, 남도 정자기행.-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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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졸재天拙齋 김치락金致樂<처사,선비>
    <처사,선비> 남쪽에 사는 참된 선비 “천졸재天拙齋 김치락金致樂”
      김치락(1768~1846)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 자는 운경雲卿. 호는 천졸재天拙齋. 본관은 광산. 석계石溪 김광택金光宅의 아들로 광주 북구 본촌동 출신이다.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1728~1807) 문하생이다. 강재 송치규, 선암송여규, 부사 송흠서 및 진사 김도환, 참판 정환이, 역재 장현주, 판서 양오운 등 여러 현인들과 도의로 종유從遊하였다. 수종재 송달수(宋達洙1808~1858) 선생은 그를 남쪽 고을의 높은 선비라는 의미로 남주고사南州高士라 칭하였다. 그는 학문을 바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스승이 되어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석계공石溪公은 효자로 나라에서 정려를 받고 학문이 뛰어났다라고 하여 이 비의 내용에 같이 소개하고있다. 5세손 김창규가 선조의 자취를 잊지 않기 위해 석비를 세웠다.천졸재 김치락 유허비天拙齋金致樂遺墟碑는 광주 북구 본촌동 292번지에 위치하며 1961년 광산 김씨문중에서 세웠는데 비의 규모는 높이 243cm, 폭 61.5cm, 두께 30.5cm이다.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文義石溪公鍾愛之期以昌大門戶弱冠熱努二性潭宋先生之門講質性理深蒙獎動先生手書人心道等語十六字以勉之至誠服勤殆無虛歲事親篤孝婾婉承順溫淸滫瀡靡不用極親癠積月色優心焦衣不解帶躬自湯進必先嘗之奄遭外艱哭擗過人不脫衰經三年啜粥日必拜墓不避寒暑人稱善居喪後丁內艱哀毁執禮一如前喪奉先追遠城極殫誠敬遍交當世賢流如剛齋宋先生善菴宋公如圭府使宋公欽書三昆季判書宋公宗洙守宗齋立齋及金進士道煥鄭參判煥履張餘力齋憲富周梁判書午文諸腎講磨道義契誼深重可以見其木而知其山者此非公之謂乎判書宋公以宋子大全附錄九冊印給剛齋先生亦題跋勉之盖公之謹拙篤行士友咸推是以守宗齋先生嘗稱南州高士立齋文獻公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梁判書贈之以詩有雪深三尺伊川路雨化千年泗水濱之句此皆知德獎詡之論也後之欲知公者盖於此徵信也哉 憲宗丙午壽七十九卒嗚呼公身長八尺鬚髥長義眼有光彩一出言而人皆悅服盖平居言行踏實無僞隱顯一致故遠近從化者甚多晩年築一室於先隴之下杜門養靜不求人知逍遙自適超然無累|潛心用力於體驗擴充之地知行敬義不欲偏廢接引來學諄諄誘掖期使有就咸稱威君子儒焉維茲芙山寔公之始終攸芋也雲仍就其遺墟密邇地大路邊竪石記事以表之謁余文者卽公五世孫昌奎也余以先誼之重固辭不獲猥綴其群行實蹟之大槩人俾歸刻焉噫一片貞珉其將與天壤俱存則人之過之者必矜式而咨嗟矣其上高昂之地又有公衣履之藏云賢人君子志趣高尙不屑祿仕而歛跡林泉讀書硏理進德修行泊然而無求卓爾而有立望一方而聞當世則其所擇仁里行義之地杖屢攸憩風詠所及雖婦人孺子指點咨嗟想像而如可得見也然遺韻餘澤久而浸沫則爲其後裔者不遽忘欲爲之表識者亦人情天理之所不能無者也近故天拙齋金公諱致樂字雲卿以光山巨族文行名德磊落相望汝雄號野隱興寒圃齋李忠愍公從遊曰尙河曰禹淵高曾若祖而考曰光宅號石溪有學行至孝聞于 朝命旌其閭 曰南平文氏重渭女公以 英廟戊子生于光州府北芙山第幼有異質不喜遊戲動止疑重儼若成人甫齔受書能通                                    己亥肇夏德殷宋在晟謹撰                                          光山慮文永謹書                                            幸江四月日堅                                            玄孫 熙鳳 熙鍊                                五代孫,世均 昌奎 相圭愛均 廣圭 출전 지산 향토지리지, 광주읍지, 광주의 문화유적, 북구 문화유적.-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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