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
총 2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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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우제 및 깃대제
- - 각화마을 기우제각화동의 각화마을에서는 예전에 기우제를 모셨다. 1959년(기해년) 음력 7월에 가뭄이 혹심하여 문화동 인근의 농민들이 두암동 군왕봉(무제등)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로 합의하고, 기우제 비용으로 각 호당 50원씩 걷었다. 기해년 가뭄의 원인은 군왕봉 정상에 누군가 묘를 썼기 때문이라 하는데, 이에 농민들과 여자들이 앞장서서 군왕봉 정상을 파헤치고 오물을 사방에 뿌리고 산을 내려오자 곧바로 비가 쏟아졌다고 한다. 기우제의 순서는 유교식으로 거행되었는데, 정결한 한복에 갓을 쓴 제관들이 동서남북 방향에 비를 내려 주십사고 배려한 뒤에 기우제문을 읽고 나서 헌식으로 생돼지머리를 땅에 묻고 산꼭대기에 불을 피웠다고 한다.- 재매마을 깃대제신안동 재매마을에서는 마을의 액운을 막기 위해 매년 음력 이월 초하룻날 깃대제를 모셨다. 마을의 동, 서, 남 세 곳에다 꼭대기에 기러기 모양의 나무 조각을 단 짐대를 세워 두고 그 밑에서 제사를 지낸다. 제사 음식은 3곳의 정결한 집을 정해 금줄을 치고 부정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도시화로 인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금곡마을 기우제금곡마을에서도 과거 기우제를 모셨다. 마을 회의를 통해 기우제 모실 제일이 정해지면 마을 사람들 모두가 몸과 마을을 정갈히 하고 금기를 지킨다. 그리고 몇 사람의 제관을 선정하여 제사 준비를 들어간다. 제비는 호구전으로 걷었으며, 제물로는 몇 가지 음식과 돼지머리, 산닭을 준비한다. 그리하여 저녁 무렵에 제물을 가지고 마을 뒤 금산 중턱에 올라가 너른바위에 제물을 차려놓으며, 그 옆으로 불을 지필 나뭇단을 차곡차곡 쌋아놓는다. 제의는 유교식으로 하며, 제가 끝나면 산닭의 목을 잘라 바위 주변으로 뿌린다. 한편 비가 오지 않으면 마을 아낙네들을 키를 가지고 마을 앞 개울가에 나가, 곡식을 까불 듯이 물을 떠서 까불면서 '비가 온다, 비가 온다'고 외쳐 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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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사라진 민속놀이 - 충효마을 당산제, 평촌마을 당산제, 화암마을 당산제
- - 충효마을 당산제충효마을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음력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당산제를 모시고 있다. 당산은 할아버지당산, 할머니당산 2곳인데, 할아버지당산은 원래 마을 입구 모정곁에 있는 수령 5백년 정도의 귀목나무였으나 오래전에 벼락을 맞은 후 새로 가지를 친 것이라 한다. 할머니당산은 광주댐 상류의 서쪽 논가에 무덤처럼 흙을 돋우어 세운 입석과 그 주위의 팽나무 세 그루이다. 정월 초순경에 마을 회의를 통해 생기복덕이 맞는 사람 가운데 연장자를 우선으로 제관 3, 축관 1, 화주 1, 집사 4명을 뽑는다. 이 가운데 화주는 궂은 데를 피하고 찬물로 목욕하는 등 금기를 철저히 지킨다. 제비는 마을 전답으로 충당한다. 제일 당일에는 마을 입구, 당산, 제관, 축관, 화주댁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놓아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는다. 제의 시간이 되면 풍물을 치면서 마을을 한 바퀴 돈 뒤에 할머니당산으로 나아가서 제를 모신다. 제는 진설-초한-메 올리기-아헌-독축-종헌-헌작-소지-음복-헌식 순서로 거행된다. 당산제 모신 다음 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마당밟기를 하며, 동네잔치를 벌인다.- 평촌마을 당산제평촌마을에서는 해방 무렵까지 음력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당산제를 모셨다. 당산은 모두 12당산이었으나, 비용이 많이 들어 할아버지, 할머니당산 2군데에서만 뫼다가 그나마 오늘날에는 모시지 않게 되었다. 제물은 닭, 떡, 삼실과, 술 등을 준비한다. 닭은 작은 것으로 12마리를 준비하고 떡은 작은 시루를 사용한다. 제가 끝난 뒤에 음복을 하는데, 특히 떡은 '액맥이떡'이라 하여 마을 사람들 고루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화암마을 당산제화암마을 당산제는 '12당산제'라 하여, 마을을 중심으로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제를 모셨다. 그리고 풍물패가 12당산을 돌아다니며 마을의 안녕과 건강을 빌었으며, 날이 새도록 흥겨운 잔치를 벌여 친목과 화목을 다지는 계기로 삼았다. 6․25사변 당시 희생된 주민과 전사자들의 이장비를 마련하기 위해 당산나무 12그루 중 11그루를 베어 판 뒤로는 당산제가 없어졌다. 마지막 남은 한 그루는 수령이 4백년 된 소나무로 잘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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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사라진 민속놀이 - 주룡마을 당산제, 어운마을 당산제, 해산마을 당산제, 용호마을 당산제, 지야마을 당산제, 신촌마을 당산제
- - 주룡마을 당산제주룡마을에서는 일제시대까지 음력 정월 열나흗날 자시경에 당산제를 모셨다. 당산은 마을 뒷산 고갯마루에 있는 소나무 3그루로, 2그루는 여자나무라 불리고, 여자나무 사이에 작은 남자나무가 있었으나, 20여 년 전에 고사하고 없다. 당산의 크기는 나무둘레 3m, 높이 15m이다. 정월 11~12일에 마을 회의에서 깨끗한 사람으로 유사를 정한다. 정해진 유사는 그로부터 궂은 데를 피하며, 매일 찬물로 목욕하는 등 여러 가지를 금한다. 제비는 돈이나 곡식을 집집마다 거출하였으며, 제기는 보관해 두었다가 다시 사용한다. 제물은 유사집에서 준비하며, 금줄과 금토는 젊은 사람들이 마을 입구와 당산 주변에 한다. 제의 시간이 되면 제관이 제물을 들고 가고, 풍물패가 뒤를 따른다. 제의는 유교식으로 하며, 헌식은 당산 옆에 땅을 파고 돼지머리, 명태를 일부 떼어 백지에 싸서 묻는다.- 어운마을 당산제어운마을은 해방 이후까지 음력 정월 열나흗날 당산제를 모셨다. 당산은 마을의 동쪽 구릉의 능선에 위치하며 당산 밑에는 우산각이 있다. 원래 4그루의 느티나무가 있어서 할아버지당산이 2그루, 할머니당산이 2그루였으나 지금은 2그루만 남아있다. 정월 초순경에 마을회의를 통해 유사를 뽑는데, 깨끗하고 손 없는 사람으로 한다. 제비는 집집마다 갹출하는데 다른 신을 믿는 자와 상복 입은 자는 제외시키고 걷었다. 금줄과 금토는 3일 전에 당산과 유사집에서 하였으며 유사는 문 밖 출입을 금한다. 제기는 매년 새로 구입한다. 제물로는 떡시루, 감, 대추, 밤, 명태 등이다. 당산제는 제관 부부만이 당산에서 조용히 제를 모시고 돌아온다. 헌식은 명태를 백지에 싸서 당산 앞에 놓아두고, 감, 대추, 사과, 밤 등은 주변에 던진다.- 해산마을 당산제해산마을에서는 1970년대까지 음력 정월 열나흗날 당산제를 모셨다. 당산은 마을 뒷산의 할아버지 당산과 마을 입구의 할머니당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월 10일경 마을회의를 통해 화주와 축관을 선정하는데, 깨끗하고 생기복덕에 맞는 사람으로 가려 뽑는다. 제비는 걸궁으로 마련하며, 제물은 돼지 1마리, 명태, 삼실과, 삼채등이며, 제기는 매년 새로 구입한다. 제수장만은 화주집에서 하는데 화주는 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말을 안하며 간도 보지 않는다. 돼지는 머리만 올리는데, 위턱은 할아버지당산에, 아래턱은 할머니당산에 쓴다. 금줄은 화주가 결정된 후 마을 입구와 당산 주변, 화주집 앞 등에 치며, 금토는 제일 아침 일찍 뿌려 부정의 출입을 막고, 마을 사람들은 비린 것을 먹지 않는다. 열나흗날 저녁 9시경에 할아버지당산에 올라 당산 주위를 돌면서 굿을 친 후에 나발을 불어 제의 시작을 알리고 진설한다. 제의는 유교식이며, 헌식은 제물을 조금씩 떼어 백지에 싸서 당산나무 옆에 묻는다. 그리고 할머니당산으로 가서 다시 제를 모시는데, 이때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나와 구경하고 음복한다.- 용호마을 당산제용호마을의 당산제는 일제시대 말 대동아 전쟁 때 일제의 억압 때문에 잠시 사라졌다가 해방 후부터 1993년도까지 모셨다. 이 마을의 당산은 세 곳으로 큰당산, 큰마누라당산, 작은마누라당산으로 불렸는데, 현재 남아 있는 곳은 큰당산 하나뿐으로 마을 위쪽 18번지에 있다. 당산제는 음력 정월 첫 정일에 모셨는데, 만약 설날과 겹치게 되면 그 다음 정일로 미루어 모셨다. 제관은 집관, 축관, 유사 각 1명씩을 선정하는데, 특히 유사는 섣달 스무날 정도에서 마을 어른들이 모여서 가려 뽑는다. 금줄과 금토는 제일 일주일 전에 하는데 마을 입구와 당산 주변에 했다. 제의 시간이 되면 유사가 제물을 들고 당산에 가고 풍물패가 뒤따른다. 제의는 비교적 간단하며, 소지와 음복이 끝나면 당산 옆에 헌식을 하는데, 이때 진설된 음식을 조금씩 덜어 백지에 싸서 묻는다. 당산제가 끝나면 그로부터 10여 일간 걸궁을 치고 이월 초하룻날 총결산하고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한다.- 지야마을 당산제지야마을에서는 6․25 무렵까지 음력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당산제를 모셨다. 당산은 귀목나무로 두 개의 당산이 있었으나, 지금은 한 곳만 남아 있다. 마을 서편에 위치한 할아버지다안나무는 6․25 때 불타버렸고, 할머니당산은 지산초등학교 안에 있다. 1월 초순경에 마을 회의를 통해 제관, 축관, 화주 각 1명을 뽑는다. 제비는 인구전으로 마련하며, 제물로 돼지머리를 구입하여 머리 위턱은 할아버지당산에, 아래턱은 할머니당산에 차린다. 제기는 매년 새로 구입한다. 제의시간이 되면 풍물패를 구성하여 굿을 치며, 나발을 불어 베가 시작됨을 알린다. 제의는 진설-헌작-강신-독축-소지-헌식-음복의 순으로 진행되는데, 헌식으로 제물을 조금씩 떼어서 당산나무 옆의 헌식터에 묻고 나서 음복한다. 당산제가 끝나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마당밟기를 하였다.- 신촌마을 당산제신촌마을에서는 최근까지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 자시경에 당산제를 모셨다. 당산은 마을 앞 개울가에 위치한 4백년 된 느티나무이다. 원래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이 있었는데, 마을 안쪽에 있던 할머니당산은 6․25 때 고사하자, 할아버지당산이 있는 곳에 화강암 자연석을 세워 할머니당산을 대신하고 있다. 마을회의를 통해 제관 3명, 축관 1명, 유사 1명을 정한다. 제의 시간이 되면 농악을 치며 마을을 돈 뒤에 당산 앞에 제물을 진설하고 헌작-재배-독촉-소지-헌식-음복 순으로 거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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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사라진 민속놀이 - 문산마을 당산제, 수곡마을 당산제, 신흥마을 당산제, 치촌마을 당산제
- - 문산마을 당산제문산마을은 1991년 문흥지구 택지개발사업으로 사라졌으나 근래 들어 할머니당산에서 당산제를 모시고 있다. 문산마을 뒤쪽에 위치한 할아바지당산에서 당산제를 모시고 있다. 문산마을 뒤쪽에 위치한 할아버지당산은 둘레가 열두아름이 넘는 튼실한 귀목나무였는데, 8․15 해방 전 태풍으로 인하여 밑둥이 부러진 뒤 뿌리에서 다시 자란 나무가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할머니당산은 과거 문산마을 입구였으나 지금은 명지아파트 입구에 서 있으며, 그 주위로 여섯 그루의 나무들과 우산각이 있다. 예전에는 음력 정월 초순에 그해 생기복덕이 맞고 깨끗한 사람으로 제관, 축관, 화주, 집사 등을 가려 뽑았으며, 제비는 인구전으로 충당하였다. 제물로는 할아버지당산에 비린 생선류는 일절 올리지 않고 조용히 모신 반면에, 할머니당산에는 이를 가리지 않고 온갖 제물을 올려놓으며, 풍물도 흥겹게 쳤다.1998년부터 음력 정월 대보름에 할머니당산나무에서 문산당산축제가 개최된다. 제주양시 문중을 중심으로 동사무소와 유관기관, 주민대표가 주관하는 이 행사는 당산제, 풍물놀이, 외줄다리기 등이 행해진 가운데, 주민들 간의 친목과 화합을 도모하고 있다.- 수곡마을 당산제수곡마을에서는 일제 말까지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 당산제를 모셨다. 당신은 귀목나무로 마을 앞과 뒤 2곳인데, 아랫당산, 윗당산으로 불리웠다. 현재 윗당산나무는 고사했고, 아랫당산나무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수령이 200여 년 된다. 제관은 정초에 마을회의를 열어 화주 1명, 헌관 1명, 축관 1명 등 3명을 가려 뽑았다. 화주는 마을입구, 당산주변, 화주집 앞, 샘 주변에 금줄과 금토를 거쳐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제물은 돼지머리, 과실, 채소 등 간단한 것으로 진설하며 비린 것은 절대 준비하지 않았다고 한다. - 신흥마을 당산제신흥마을에서는 6․25전까지 매년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당산제를 모셨다. 마을안 옹기가마 옆에 있는 느티나무를 할머니당산으로 모시고 지내왔으나, 땅주인이 천주교 신자여서 당산나무를 베어 버려 입석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당산제를 모시면서 마을을 평안하게 하고 풍년을 빌며 옹기그릇도 잘 구어지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이 마을이 폐촌됨에 따라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 입석을 기증하여,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치촌마을 당산제치촌마을에서는 1960년대까지 매년 음력 이월 초하룻날에 독당산에서 당산제를 모셨다. 독당산은 마을 입구 죄측에 위치한 입석으로, 높이 110㎝, 두께 45㎝, 둘레 195㎝인데, 오룡동에 공업단지가 생기면서 없어졌다. 제관은 마을의 연장자인 촌장이 맡았으며, 제물은 돼지머리, 시루떡, 삼실과, 메, 탕, 향, 초, 제주 등을 올린다. 제차는 유교식이며, 제의 시작과 끝에 풍물을 친다. 당산제가 끝나면 그 전날 했던 줄다리기 줄을 입석 아랫부분부터 감아서 '당산 옷 입히기'를 한다. 독당산에서 옷입히기가 끝나면 마을 뒤 나무당산나무에서 준비한 제물로 다시 당산제를 모신다. 그리하여 제가 끝나면 풍물패는 샘굿을 친 뒤에 마을을 돌아다니며 마당밟기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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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사라진 민속놀이 - 분토마을 당산제, 죽곡마을 당산제
- - 분토마을 당산제분토마을에서는 일제시대까지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당산제를 모셨는데, 근래에 들어 부녀자들 중심으로 당산제를 다시 모시고 있다. 당산제는 할아버지당산, 할머니당산 2곳으로, 할아버지당산은 마을의 우산각 옆에 있는 수령 5백년 정도의 귀목나무이며, 할머니당산나무는 고사하고 그 터만 남아 있다. 당산제 준비는 정월 12일 경에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친다. 황토는 마을 뒷산에서 퍼온 깨끗한 흙으로 마을 입구와 당산나무 근처의 길목에 뿌린다. 제물 장만에 쓰이는 비용은 제를 모시고자 하는 사람들만 돈을 내서 마련한다. 제물은 떡, 메, 대추, 곶감, 삼실과, 나물 등을 준비한다. 그리하여 정월 열나흗날 8시경에 할아버지당산에 가서 제물을 진설하고 제를 모신다. 제가 끝나면 제물을 조금씩 떼어서 당산나무 옆 개울에 흘려보낸 것으로 헌식한 뒤에 모여서 음복한다.- 죽곡마을 당산제죽곡마을은 과거 음력 정월 열나흗날 자시경에 당산제를 모셨다. 제관 선정은 마을 총회에서 결정하는데, 유사 2명, 제관 1명을 가려 뽑는다. 제비는 마을 기금으로 충당하였으며, 제물은 돼지머리, 환육, 삼실과, 떡, 탕, 나무 등을 준비하였다. 금줄은 제일 일주일 전에 당산 주변에 치고, 금토는 당산나무 주변과 유사집 앞에 뿌려 부정의 출입을 막았따. 제의는 진설-헌작-재배-소지-헌식-음복으로, 헌식은 제물을 조금씩 떼어 백지에 싸서 당산나무 옆에 묻고, 돌 3개로 누르고 그 위에 황토로 덮는다. 당산제를 모신 뒤에 집집마다 돌면서 마당밟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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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사라진 민속놀이 - 금곡마을 당산제, 대촌동 당산제, 중외마을 당산제
- - 금곡마을 당산제금곡마을에서는 해방 이전까지 당산제를 모셨으나, 지금은 모시지 않고, 당의 형태만 남아 있다. 금곡마을 사람들은 당산제를 모시면서 마을의 무병과 안녕, 자식의 성공, 출산 등을 기원했다. 당산제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할아버지당산(큰당산), 큰할미당산, 작은할미당산(꾀꼬리당산) 세 곳에 모신다. 할아버지당산은 마을 가운데 있는 귀목나무였으나, 베어지고 그 후 이팝나무를 심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큰할미당산은 논 가운데의 들돌인데, 지금은 없어졌으며, 작은할미당산은 남근 형태의 입석으로 현재는 삼괴정 옆으로 옮겨 놓았다. 정초에 마을 회의를 통해 제관, 축관, 화주를 뽑는데, 대개 연장자가 맡게 된다. 제일 당일에는 마을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려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는다. 그리하여 제의시간이 되면 풍물을 치면서 마을을 한 바퀴 돈 뒤에 진설-헌작-재배-독축-소지-헌식-음복 순으로 제의를 거행한다. 제가 끝난 뒤에 장만한 음식으로 동네잔치를 벌이며 즐겁게 어울린다.- 대촌동 당산제대촌동은 1990년까지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당산제를 모셨다. 원래 7곳에서 당산제를 지내다가 나중에는 할머니당산이라 불리는 입석에만 모시다가 그나마 신도시 건설로 모시지 않는다. 옛 삼소지면 사무소터 앞에 당산나무 2그루가 위치해 있는데, 이 당산을 일러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당산이라 부른다. 수종은 푸조나무, 느티나무이며 수령은 3백년 가량 된다. 그리고 3기의 입석 중 1기의 입석만이 마을 앞 공원 부지에 남아 있다. 정월 초 첫 뱀날에 마을회의를 열어 생기복덕이 맞고 정결한 사람으로 화주, 제관, 축관 각 1명씩을 선출한다. 이렇게 뽑힌 사람은 부정한 곳의 출입을 삼가는 등 청결과 근신을 해야 하며, 특히 화주는 부정한 일이나 상을 당한 사람을 보지 않으려고 삿갓을 쓰며, 제물 구입 시에는 값을 깍지 않는다. 제비는 과거 인구전으로 거출하다가 마을 기금으로 충당하였다. 1990년대의 제비는 약 20만원 소요되었다고 한다.정월 열사흗날이 되면 마을 골목에 금줄을 치고, 마을 곳곳에 황토를 뿌린다. 그리고 제일 아침에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비린 것을 먹지 않는다. 당산제는 유교식으로 진행되는데, 밤 10시쯤에 화주집에서 준비된 제수를 가지고 나와 진설한 뒤 제를 모신다. 헌식은 진설한 제물을 조금씩 떼어내어 지름이 30㎝ 정도 되는 항아리 안에 담는다. 이렇게 제가 끝나면 풍물을 울려 당산제가 끝났음을 알리고, 이 후 각 가정에서는 보름날 차례상을 준비한다.- 중외마을 당산제중외마을에서는 오래전에 당산제를 모셨으나, 지금은 모시지 않는다. 현재 마을 입구 도로 중앙에 당산나무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당산의 영험함을 믿기 때문인지 상여가 당산나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뒤로 돌아가게 한다. 몇 년전 마을에 궂은 일이 있어 간단하게 제를 모신 적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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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촌마을 세시풍속놀이
- 평촌마을 세시풍속놀이평촌마을은 닭뫼, 동림, 버성골, 담안, 평모 등 다섯 마을이 모여 이루어졌으며, 빼어난 자연경관(광주호 호수생태공원과 증암천 등)과 풍부한 문화관광자원(평촌도예공방, 장승과 솟대, 무돌길, 담안마을 돌담 등)으로 2005년 광주시 제1호 건강장수마을, 2013년 국립공원공원단의 '명품마을'로 각각 지정되었다.예부터 우리나라 전통농경사회에서는 정월을 '노달기'라 하여 농민들이 휴식을 취하면서 다양한 세시민속놀이를 즐겼다.평촌마을도 오래전부터 정월에 풍년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당ㅅ나제와 세시민속놀이를 행하여 왔으나, 많은 주밀들이 광주 시내로 이주하고 농업이 현대화되면서 당산제는 지내지 않게 되었으며, 세시민속놀이도 점차 잊혀 가고 있었다.이를 안타깝게 여긴 평촌마을 사람들이 마을 복지기금과 북구청의 지원을 받아 2008년부터 선조들의 삶의 지혜가 담겨 있는 다양한 세시민속놀이와 전통문화공연을 개최하여 도시민들과 어린이들에게 세시민속놀이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주요 행사내용으로는 연날리기, 팽이치기, 제기차기, 쥐불놀이, 소원지 쓰기, 달집태우기 등이 있으며, 문화공연과 정월대보름 음식(오곡밥, 나물)도 준비하여 행사에 참여한 시민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를 개최함으로써 우리 지역의 사라져 가는 전통의 맥을 잇고 찾아가 머물고 싶은 행복공동체를 조성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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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버들 기원제
- 왕버들 기원제왕버들 기원제는 광주 충효동 왕버들의 천연기념물 지정을 기념하고 충효동 왕버들의 무병장수와 마을의 안녕과 복을 기원하기 위해 충효동당산제추진위원회에서 개최한다.2012년 10월 13일 광주충효동왕버들의 천연기념물 지정을 축하하고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제례와 기념음악회를 처음 개최하였으며, 2012년 11월 충효동왕버들보존회 설립하고 왕버들 기원제의 지속적인 개최를 의결하였다.왕버들 기원제는 진설→풍향→강신→참신→초헌→독촉→아헌→종헌→사신→음복→헌식순으로 진행된다. 특히 2013년 기원제에서는 김덕령 장군의 억울함을 해원하기 위한 상징적 의식으로 해원제를 함께 개최하고 소원지 붙이기 등의 행사 진행으로 관람객의 참여를 유도하였다.왕버들 기원제는 마을의 화합을 이끌어 내고 천연기념물인 충효동 왕버들의 보존관리를 위한 대책을 고심하는 기회를 가지며 관광객과 지역주민들에 소통의 장 역할을 하고 있다. 『북구청 문화관광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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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전당산제(龍田堂山祭)
- 용전당산제(龍田堂山祭)용전마을은 본래 광주군(光州郡) 우치면(牛峙面) 지역으로 풍수지리상 마을의 지형이 배가 흔들리는 형국이라 하여 해유로 불리다 어느 해 홍수가 있은 후 물이 흔한 마을이란 뜻으로 낙촌(洛村), 용전(龍田)이라 불리게 되었다. 1957년 광주시 우치동에 편입되었다 1998년 9월 21일 건국동에 통폐합되었다.용전마을의 성촌 시기는 약 300여 년 전 진주정씨(晉州鄭氏)와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처음으로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지금은 주로 농업과 하우스 농사(묘목, 원예, 딸기, 참외, 고추 등)를 하고 있다.용전마을은 마을 중앙의 할아버지당산과 마을 아래쪽 할머니당산에 매년 음력 정원대보름에 당산제를 지냈으나, 일제시대 노남용(소작회의 회장) 씨에 의해 당산나무가 베어진 후 당산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가 20여 년 전부터 옛 용전장터 자리에 있는 왕버들나무에 제관 3명(노인회장, 용전들노래보존회장, 장년회장 등)과 집사 2명을 정하여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제비(祭費)는 전년도 마당밟이를 통해 모은 자금과 북구청 지원금으로 준비하며, 제물은 삼실과, 나물(간을 하지 않음), 돼지머리, 포, 떡 등을 준비한다.14일 오전에 마을입구와 당산목 주위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길목마다 뿌려 부정을 막으며, 제의는 유교식으로 진행한다.제관은 백색 한복에 도포를 입고 유건을 쓰며, 제물은 부녀회에서 마련하여 진설한다. 현재 제기는 일회용 접시를 사용하고 있으나 추후 마을제기를 마련할 예정이며, 당산제에는 제관, 화주, 성인남자, 농악대만 참여하며 소지는 마을소지, 개인소지 순으로 진행된다.헌식은 음식을 조금씩 떼어서 땅에 묻으며, 참가한 사람 모두 음복한 후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당밟이를 집집마다 한다.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서 발간한 『광주의 당산제』(1993년)에 따르면 과거 용전당산제는 정월 14일 밤 자시(子時)에 모셨다. 제관은 정월 초 닷 세날 마을회의에서 아들이 많고 학식이 있는 어르신을 제관과 축관으로 정하고 화주는 깨끗한 사람으로 뽑았다. 제비(祭費)는 마을자본으로 나오는 이자로 충당했으며 제물은 삼실과, 나물, 돼지머리, 밥, 떡 등을 준비했다. 제상에 올릴 나물에는 간을 하지 않는다.14일 오전에는 마을입구와 당산목 주위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길목마다 뿌려 부정의 출입을 막았다. 밤 10시쯤 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로 나발을 불었으며 제관의 복장은 백색 한복에 도포를 입고 유건을 썼다. 화주집에서 장만한 음식들은 깨끗한 사람들이 당산까지 가지고 가서 진설을 하였으며, 마을제기가 따로 있어 목청에 보관해 두었다 사용하였다. 한밤중에 제를 지내므로 화톳불을 피우는데 거기에 쓰이는 장작은 각 가정에서 거두어서 사용했다.돼지머리의 위턱은 할아버지 당산에 아래턱은 할머니당산에 진설하며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제에는 농악대, 제관, 축관, 화주와 성인남자만 참여할 수 있었다. 소지는 마을 소지, 개인소지 순으로 하며 헌식은 할머니당산에 헌식터가 있어 음식을 조금씩 떼어서 땅에 묻는다. 그리고 참가한 사람 모두가 차려진 음식을 음복한다. 당산제가 모두 끝나면 나발을 불어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다.다음 날 마을에서는 마당밟이가 시작되는데 동네 공동 샘을 시작으로 당산나무를 거쳐 마을로 들어와 집집마다 굿을 친다. 그리고 정월 25일이 되면 이장선출 및 올해의 품삯을 정하는 마을회의를 연다. 『광주의 당산제』(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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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효당산제(忠孝堂山祭)
- 충효당산제(忠孝堂山祭)무등산 북쪽 자락에 있는 충효마을은 본래 광주군(光州郡) 석저면(石底面) 지역으로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형이 성안처럼 되어 있어 '성안' 또는 '성내(城內)'마을로 불리다가 조선 22대 정조 때 김덕령 장군이 태어나 자란 곳이라 하여 충효리라는 마을 이름이 하사(下賜)되어 지금껏 사용되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석곡면(石谷面)에 편입되었다가 1955년 담양군 남면(南面), 1957년 광주시 충효동, 1998년 석곡동 관할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충효마을의 성촌 시기는 450여 년 전으로써 대부분의 주민이 충장공의 후손들이 광산김씨이기에 마을 입구의 충장공 비각과 취가정 등 충장공과 관련된 유적도 잘 관리되고 있을 뿐 아니라 충장공의 탄생 설화를 안고 있는 430여 년 된 왕버들 3그루는 2012년 10월 5일 천연기념물 제539호로 지정되었다.충효당산제는 마을이 생긴 이래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음력 정월대보름에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에 당산제를 모셔왔으나, 많은 주민들이 광주시내로 이주하고 젊은이들은 미신이라 하여 참여하기를 꺼려해 근래에는 구색만 갖추어 할아버지당산에만 모시고 있다.할아버지당산은 모정 곁의 수령이 500여 년 되는 귀목이었으나 오래전 벼락을 맞은 후 새로 가지를 친 것이라고 한다.매년 정월 초 마을 연장자로 순으로 제관 3, 축관 1, 집사 4인이 선출되면 이들은 제를 모실 때까지 금기사항을 지킨다. 특히 화주는 곶은 데를 피하고 부부 잠자리 등을 하지 않는다. 제비는 마당밟이로 거둔 성금을 모아 마련한 동답(洞畓)에서 나온 것으로 충당한다. 제물은 13일에 집사와 부녀회원이 목욕 후 재래시장에서 값을 깍지 않고 제물(미역, 김, 가조기, 삼실과 등)을 구입하며, 제기는 목기로 마을에 보관하여 사용한다.14일에는 주민들이 각 가정과 마을 안팎, 마을공동우물 등을 깨끗이 청소하고 공동우물에 그릇에 촛불을 담아 띄워 정화시키며 제물을 부녀회원집에서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간이나 맛을 보지 않고 마련한다.당산제 당일에는 마을 입구, 당산, 제관, 축관집에 왼손새끼를 꼬아 금줄을 치고 황토를 놓아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고 있으며, 저녁 9시경 할아버지당산 앞에 모닥불을 지피고 농약대가 화주댁을 시작으로 마을 공동샘, 할아버지당산 순으로 풍물을 친 후 음식을 진설하고 당산제를 지낸다.제물 운반은 남자들이 흰옷과 흰장갑 착용 후 부녀회원집에서 한 사람이 한 가지씩만 제물을 머리에 이고 운반하여 진설한 후 초헌-메 올리기-아헌-독축-종헌-헌작-소지-음복-헌식 순으로 이루어지며, 축문은 예전 것이 길고 어려워 짧게 줄여서 사용한다.소지는 마을의 평안을 비는 마을소지 후 동민소지를 올리고, 헌식은 상에 올렸던 음식을 약간씩 덜어 흰 종이에 싸서 묻고 돌로 눌러 놓는다.제물 중 돼지는 한 마리를 잡아 머리는 제물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당산제 후 삼우날 마을 주민들이 화주집에 모여 제물과 돼지고기를 나누어 먹고, 그 뼈는 땅에 묻는다.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서 발간한 『광주의 당산제』(1993년)에 따르면 과거 충효당산제는 정월 3일~5일 경에 마을회의에서 그 해의 운세를 점쳐보고 생기복덕(生氣福德)이 맞는 사람 중 연장자를 우선하여 제관 3인, 축관 1인, 화주 1인, 집사 4인 등을 뽑으면서 시작된다. 제관들은 제를 모시기까지 금기사항을 지켜야 하는데 특히 화주는 금기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 궂은 곳을 다니지 않으며, 부부가 잠자리를 같이 해서도 안되고 대·소변을 보면 찬물로 목욕을 해야하기 때문에 먹는 음식을 줄이기도 하였다.제비(祭費)는 마을 공동답(共同畓)이 있어서 수확된 쌀로 충당했으나, 1957년 충효리가 광주시로 편입되면서 공동답을 팔아 마을 공익사업에 사용한 후부터는 『지붕머리돈』이라 하여 한마지기의 동답(洞畓)을 다시 마련하여 당산제의 비용으로 사용하고 있다.13일이 되면 화주와 집사가 목욕재계를 하고 양동시장에 나가 배석, 시루, 그릇 등 제기와 미역, 김, 가조기, 삼실과 등 제물을 일괄 구입하는데 값을 절대로 깍지 않고 지불한다. 제사에 쓰일 돼지머리는 돼지 한 마리를 잡아 사용하며 나머지 부분은 당산제를 지낸 후 삼우날 마을 사람들이 화주집에 모여 나누어 먹는다.14일에는 마을 사람들이 각 가정과 마을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며 화주집에서는 제사음식을 준비한다. 제물 장만에 사용되는 물은 전날 저녁 동네 청년들이 마을공동우물을 모두 펴내고 깨끗이 청소하고 난 후 새로 솟아 오른 물을 14일 첫 새벽에 길어다 쓴다. 마을 사람들도 조상들을 서서 기다린다고 한다. 화주가 제물을 준비할 때에는 머리에 흰 수건을 스고 입은 마스크로 가리며 간을 안하고 맛도 보지 않는다. 상에 올릴 떡은 동답(洞畓)에서 수확한 쌀로 만든다. 또한 마을입구와 당산, 제관, 화주댁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놓아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는다. 저녁 9시경 할아버지당산 앞마당에 모닥불을 지피면 마을사람들이 모여 농악대를 구성하며 서로 가락을 맞춰 보고 굿을 준비한다. 농악대는 제를 모시기 전에 굿을 치는데 화주댁을 시작으로 마을 공동샘, 할아버지당산, 충효초등학교 순으로 진행된다. 그동안 마을 사람 중 궂은 일이 없었던 남자들은 흰옷과 흰 장갑을 착용하고 화주댁에 모여 제물을 운반하며 당산제 준비를 서두르는데 한 사람이 한 가지씩만 운반한다. 충효마을 당산제에서는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에 따로 제를 지내지 않기 때문에 자정 무렵이 되면 농악대가 할머니당산을 할아버지당산으로 모셔 오면 운반해 놓은 음식을 진설하여 당산제를 시작한다.제는 진설-초헌-메올리기-아헌-독축-종헌-헌작-소지-음복-헌식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축문은 예전부터 내려오던 것이 너무 길고 어려워 짧게 줄여서 사용하고 있으며, 소지는 축관이 먼저 마을의 평안을 비는 마을소지를 드리고 나면 제에 참여한 제관, 농악대, 연장자 순으로 동민소지를 올린다. 지신을 달래기 위한 헌식은 상에 올렸던 음식을 약간씩 덜고 돼지머리에서 코, 귀, 입술을 떼어내 흰 종이에 싸서 묻는데 짐승들이 파먹지 못하도록 돌로 눌러 놓는다. 이로써 충효마을 당산제의 모든 절차가 끝나게 된다.다음 날 아침에는 마을 주민 모두가 화주집에 모여 제를 지내고 남음 음식과 마을에 잡았던 돼지고기를 먹으려 흥을 돋은 후 마당밟이를 한다. 『광주의 당산제』(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