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

22
게시물 검색 폼
  • 기우제
    당산제가 정기적으로 매년 올려지는 것에 반해, 기우제는 한발이 심해 농사가 크게 위협을 받게 되면 올리는 임시제(臨時祭)의 성격을 가진다. 과학적 사고와 관개용수가 발달한 관계로 지금에 와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민속이 되었다. 그러나 몇십년 전만 하더라도 가뭄이 계속되면 마을 단위나 행정관청 단위로 제사를 크게 올렸다. 기우제가 올려졌던 사례를 들어본다.1) 문흥동 기우제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당산제에 비해, 가뭄이 심할 때만 한시적으로 지내는 기우제는 과학문명의 발달과 농업의 현대화에 따라 과거의 하늘만 바라보고 농사짓던 때와는 달리 이제는 매우 찾아보기 힘든 의식이 되고 말았다. 농사의 젖줄인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일제의 침략기에는 곡창인 호남벌에 수많은 저수지를 축조하였는데 대문산과 소문산의 마을 사이에도 이 때 저수지가 만들어졌으나 토사가 밀리고 수량이 적어 이제는 낚시터 정도로만 남아있을 뿐이다.대문산과 소문산 그리고 평교에서 지냈던 기우제로는 33년 전인 기해(1959)년 음력 7월에 가뭄이 혹심하여 문화동 인근의 농민들이 두암동 군왕봉(무제등)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로 합의하고, 기우제 비용으로 각 호당 50원씩 갹출했다.기우제 준비를 위해서 화주에 장익호, 이흥호(작고)씨를 선출하고 제관은 문화동 초대 동장을 지낸 곽정희(남, 현 각화동 거주)외 2명을 뽑아 제를 추진하였다.화주와 제관의 금기와 몸가짐은 당산제를 지낸 때보다 더 엄하다고 한다. 기우제의 순서는 확실히 밝힐 수는 없으나 유교식 제 절차로 분향-진설-상신-헌작-독축-소지-헌식 순이다. 정결한 한복에 갓을 쓴 제관들이 동서남북 방향에 비를 내려주십사하는 배례와 천제에게 비는 기우제문을 간곡하게 읽은 뒤 헌식으로 생돼지머리를 땅에 묻고 산꼭대기에 불을 크게 피웠더니 과연 3일 뒤에 비가 내렸다는 것이다.기해년 가뭄의 원인은 신성한 군왕봉 정상이 명당으로 소문이 나 누군가 몰래 묘를 썼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농민들과 여자들이 앞장서서 군왕봉 정상을 파헤치자 양림동 최부자집 모친 명정이 나오자 이에 격분한 주민들이 준비해간 오물을 사방에 뿌리고 산을 내려오자 곧바로 비가 쏟아졌다고 한다. 그 후 파묘 문제로 소송이 생겨 기우제를 주관했던 제관 등이 파출소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등 곤욕을 치르기도 했으나 긴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려 기우제의 덕을 본 각화동 하성대(작고)씨의 주도로 기우제를 지낸 제관과 화주 등을 위로하는 행사를 갖기도 하였다.2) 충효동(忠孝洞) 금곡(金谷) 기우제몇 십년전 기우제를 지냈던 사례가 노인들의 기억 속에서 찾아진다. 마을 뒷산 인금산 중턱에 제단이 있다. 마을에서 회의를 하여 제일을 정하게 되면 마을민 모두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금기를 지킨다. 그리고 몇 사람의 제관을 선정하여 제사준비에 들어간다. 제비는 마을에서 걷어 쓰는데 호구전으로 하였다고 한다. 제물로는 몇 가지 음식과 돼지머리, 산닭을 쓴다. 저녁 무렵 제관들은 제물을 가지고 산에 오른다. 제단은 산중턱에 있는 너른 바위다. 옆에는 밤을 새워 불을 지필 수 있을 만큼 많은 나뭇단을 마을의 젊은이들이 전날 준비해 놓는다.자정 무렵 제사를 지낸다. 제물을 진설하고 유교식 제차에 따라 제사를 한다. 제사가 일단 끝나면 산닭의 목을 잘라 제단(바위) 주위에 뿌린다. 피로 신성한 제단을 더럽혔으니 비를 내려 씻도록 하라는 일종의 주술적인 비원이다.또 이 마을에서는 마을의 아낙네들이 키를 가지고 마을 앞 개울가에 나가 곡식을 까불 듯이 물을 떠서 까불기도 했다. 물을 까불면서 ‘비가 온다. 비가 온다.’ 하고 외쳐댄다. 비가 오는 모습을 의사한 일종의 유감주술이다.(광주직할시, 문화재도록, 1990)
    더보기
  • 당산제
    호남과 영남지방에서 행해지는 마을 제사이다. 마을의 수호신인 당신신(당산 할아버지와 당산 할머니)에게 마을의 풍요와 평안 등을 기원하는 지역공동체적 의례이다. 당산국 동제(洞祭) 당제(堂祭)라고도 한다.제일(祭日)은 주로 음력 대보름이나 정초가 가장 많고, 그밖에 10월 보름에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제관은 생기복덕(生氣福德)을 가려서 부정이 없는 깨끗한 사람으로 선정한다.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은 산가(産家) 상가(喪家)의 출입이나 외지출타 등을 금하고, 개고기 등의 궂은 음식을 피하고 연행을 삼가며, 목욕재계를 하는 등 매사에 근신한다. 제일이 다가오면 당산나무와 당산석신당 등 제장주변을 청결히 한 뒤 금줄을 두르고 황토를 몇 줌 놓아 부정을 막는다. 제물은 화주나 제관 집에서 준비하는데 대체로 메 주(酒) 과(果) 포(脯) 편 채(菜) 등이다. 제사비용은 마을공동 제답의 수입에서 충당하거나 집집마다 추렴하여 쓴다. 제사는 대개 자정을 전후한 시간에 시작하여 새벽녘에 끝마친다. 제의는 주제자(主祭者)에 따라 진행방식이 다른데, 마을 사람 가운데 선정된 제관이 주제할 경우에는 제물진설(祭物陳設), 신주헌작(神酒獻爵), 재배, 당산축, 소지(燒紙), 퇴식, 음복 등의 순서로 유교식 절차에 따른다. 무당이 주관할 경우에는 제관이 헌작, 재배, 축문, 소지 등 간단한 제를 올린 다음 무녀와 공인이 열두거리굿으로 진행한다. 대부분의 경우 제의는 유교식 절차로 행하여지는데, 풍물을 울리는 매국(메국 또는 매구굿)과 병행하여 진행된다. 농악대가 치는 매굿은 마을제사의 시작을 알리거나 신을 맞아들이는 의미로서 치는 들당산굿이 있고, 제당의 잡귀잡신의 침입을 막고 또 쫓는 의미의 埋鬼굿, 그리고 제가 끝나고 신을 보내기 위한 날당산굿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당산제가 끝나면 마을공동 시설인 우물·창고·정자·다리 등을 돌면서 굿을 친 다음 각 가정을 방문하여 문굿·샘굿·조왕굿·마당굿 등 집안 구석구석을 돌면서 굿을 치는데, 이를 매구치기 또는 마당밟기, 지신밟기라고도 한다. 이러한 당산굿은 당산제를 전후하여 2, 3일 동안 계속되기도 한다. 또한 당산제가 끝난 당일이나 그 이튿날 밤에는 마을 사람들이 동서 또는 남녀로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하여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친다. 이기는 쪽이 풍년이 드는데, 특히 여자쪽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한다. 줄다리기를 한 뒤 줄은 태워서 논밭에 거름이 되게 하거나 신체인 당산나무나 당산석 등에 감아두어 풍년을 기원하기도 하는데 이를 ‘당산 옷입힌다’고 한다. 줄을 감을 때는 부정을 가리며 감아놓은 줄에는 일년 내내 손을 대서는 안된다고 한다.당산제는 다른 동제와 비교하여 볼 때 유교식 제사와 매국, 줄다리기가 복합 병행되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또한 다른 동제와 마찬가지로 마을의 풍년과 평안을 위한 제의인 한편, 마을 사람들 모두가 참여하여 즐김으로써 축제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신성기간 동안 마을 사람들은 얽혀있는 감정을 해소하는 화해의 장을 마련하고, 마을 성원 모두가 참여하여 일체감을 가짐으로써 지역공동체의 유대를 강화시키고, 노동의 힘든 생활에 활력을 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한다.북구 관내의 당산제는 주로 음력 정월 대보름을 즈음하여 모셔졌던 것으로 조사되고 있는데, 지금도 모시고 있는 마을이 수적으로 많지는 않다. 상당히 급속도로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전통적인 의미의 마을이 해체되었고, 또 전반적으로 민간신앙에 대한 의식의 변화와 고등종교의 확산 등 여러 가지의 요인이 작용하여 이제 당산제는 거의 사라져 가는 민간신앙의 하나가 되고만 것이다.지금까지 조사 보고된 북구의 당산제에 대한 개괄적인 정리를 하면 다음과 같다.1) 충효동(忠孝洞) 성내(城內) 당산제(堂山祭)정월 보름에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에 제사를 모시고 있다. 마을에 궂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빌며, 제사는 화주가 맡는다. 제사방식은 유교식 절차에 따르지만, 제관의 구성이나 제물의 장만 등에서 민간신앙의 전통적인 방식이 많이 남아 있다.2) 충효동(忠孝洞) 배재 당산제(堂山祭)17호에 6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이 마을에서 6·25 전까지 당산제를 모셔왔으나 그 후 중단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전에 모시던 방식만이 촌로들 사이에 기억되고 있는데, 이 마을 역시 정월 보름에 농악대를 갖춰 당산에서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3) 충효동(忠孝洞) 평촌(平村) 당산제(堂山祭)본래 이 마을에서는 신목으로 12당산을 모셨다. 그러나 너무 번거로워 두 당산으로 줄여 해방 전까지 모셔왔다고 한다. 마을에서 제사를 모시는 목적은 풍년을 기원하고, 귀신이나 질병으로부터 마을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4) 충효동(忠孝洞) 금곡(金谷) 당산제(堂山祭)해방 전까지 당산제를 모셨던 이 마을에는 지금도 당터만은 남아있다. 당산은 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 작은 당산으로 세 곳에서 제사를 모셨으며, 특이한 것으로 작은 당산이라는 곳은 일명 꾀꼬리당산이라고도 하는데, 입석으로 되어 있다. 제사는 음력 정월 보름에 모셨다고 한다.5) 청옥동(靑玉洞) 신촌(新村) 당산제(堂山祭)이 마을의 당산제는 6·25전까지 모셨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는다. 당산제가 모셔지게 된 내력담이 전하고 있다. 마을 앞에 큰 내가 흐르는데, 보가 있어 어느 해 홍수에 보가 무너질 지경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정자나무 앞에 모여 당산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불러 보를 보호해 달라고 빌었다. 그러자 정자나무에서 흰노인이 나와 막대로 갈라 물길을 잡아주었다. 그로 인해 홍수에 피해를 보지 않고 마을이 무사할 수 있었다. 이 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매년 정월 보름을 기해 당산신에게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6) 청옥동(靑玉洞) 분토 당산제(堂山祭)예전에는 정월 보름에 당산제를 모셨으나 해방 후로는 지내지 않고 있다. 당산은 숫당산과 암당산으로 불리는 신목이 지금도 남아있는데 제의 비용은 일정액을 거출하여 사용하였다고 한다.7) 청옥동(靑玉洞) 정촌 당산제(堂山祭)해방되기 전까지 당산제를 모셨던 이 마을은 신목만 지금까지 남아 있다. 웃당산과 아랫당산으로 불리었고, 매년 정월 보름이면 제관들을 뽑아 당산에서 제사를 지냈다. 당산제를 지내고 난 다음 날 마을민들이 모여 음복을 하고, 또 이 때 가정에서 짚을 한 단씩 가지고 나와 줄을 다려 줄다리기를 했다고 한다.8) 청옥동(靑玉洞) 화암(花岩) 당산제(堂山祭)꽃바우라고도 부르는 이 마을은 6·25사변 이후로 당산제가 끊겼다. 12당산이 마을에 있었다고 전하는데, 매년 정월 보름에 제관을 선정하여 당산에서 제사를 모셨다. 제비는 ‘지붕머리돈’이라고 하여 호구전으로 갹출하여 썼다. 노인들 중에는 다시 당산제를 모셨으면 하는 사람도 있으나 마을의 젊은 층에서 반대하고 있다고 한다.9) 문흥동 대문산 당산제대문산 마을 입구에는 할머니 당산이라 부르는 괴목나무 숲이 있는데 당산의 좌우에 용과 호랑이라 부르는 선돌 2기가 지키고 있으며, 당산제가 중단된 지 20여년이 지난 오늘도 그 푸르름은 여전하다. 짓봉이라 부르는 야트막한 야산을 뒤로하고, 마을 정면에는 대주 아파트 단지가 자리잡았으며 마을을 빙 둘러 감싼 형국으로 광주로 진입하는 남해고속도로 동광주 교차로가 있다.대문산의 주요 성씨는 입향조인 제주 양씨와 김해 김씨 등이며 상주인구는 569명, 호수는 125호인데 대부분이 농업에 생활근거를 두고 있다. 이 마을의 당산제는 음력 정월 7일이나 8일경에 주민들이 모여서 그 해의 제관, 축관, 화주, 집사 등을 뽑으면서 시작된다.제관의 선정은 엄격한 법도가 있어서 산고나 상을 당하지 않았고 3년 이내 성주를 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생기복덕이 맞는 남자를 선정하고 금기에 들어간다.당산제의 제물준비는 1월 12일 천정장(泉町場 : 오늘날 양동시장)을 이용했는데,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에 쓸 제물은 성격이 달라 각각 따로 구입한다. 제물에 쓸 물건값은 깍지 않으며 제관은 매년 사기 그릇을 새로 사는데 제가 끝난 뒤 화주에게 주었다.주요 구입 제물은 돼지머리, 삼색실과, 제관, 쇠고기, 나물류, 북어, 조기, 김, 초, 향, 소지종이 등이며 제주는 미리 담근 청주를 쓴다. 제물 준비를 할 때에는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서 머리에는 수건을 쓰고 입에는 입마개를 했으며 음식의 간을 보질 않는다.화주와 제관 등은 당산제 전날, 당산 주변과 마을 입구는 물론이요, 각자의 집 안팎을 정결히 하고 13일에 큰 무등 등에서 파온 황토를 놓고 왼새끼에 백지를 끼운 금줄을 쳐서 잡인의 출입을 막았다.당산제를 잘 지내기 위해 제관, 축관, 화주, 집사는 물론이요, 온 마을 주민이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는데 특히 제 지내기 삼일 전부터는 비린 음식을 일체 먹질 않고 심지어 젓갈이 들어간 김치도 먹지 않는다.제관, 제주, 화주로 선정된 사람들은 화장실만 다녀와도 찬물로 손발을 씻거나 목욕을 하는 정결함을 유지하며 부정한 일이나 장소에도 가질 않고 잡인과의 상면도 피했다. 당산제의 순서는 할아버지 당산에서 14일 자정쯤에 제를 먼저 지낸 다음, 닭이 운 뒤에야 마을 앞 할머니 당산에서 제를 올린다. 마을 뒤쪽에 있는 할아버지 당산은 둘레가 열두 아람이 넘는 튼실한 귀목나무였는데 8·15해방 전 태풍으로 인하여 밑둥이 부러진 뒤, 그 뿌리에서 다시 자란 나무들이 숲을 이뤄 그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할아버지 당산나무가 서 있던 자리는 문흥동 421번지로 지금은 김용현씨댁 마당자리에 해당된다.할아버지 당산은 산신의 성격이 강해 금기사항이 많은데 그 중 당산제의 제물도 가려서 비린 생선류는 일체 쓰질 않는다.화주 집에서 준비한 제물은 당산으로 옮길 때에는 햇물을 들거나 떡시루, 찰밥 시루 등을 각각 든 18명의 남자들만 참여한다. 제물은 시루떡, 삼색실과, 나물, 돼지머리 등을 진설하고 매를 올린다. 제의 순서는 유교식인데 향을 피우고 초를 켜 제단을 정화시킨 뒤 강산-참신-초헌-독축-개반삽시-아헌-종헌-소지-재배-헌식 순으로 진행된다.독주문의 내용은 당산신에게 마을의 무사태평과 재앙을 막아주며 풍년이 들도록 기원한다. 축문의 구체적 문안은 중단된 지가 오래되어서 찾아 볼 수 없다. 할아버지 당산에서 제를 마친 뒤, 마을 앞 할머니 당산에서 따로 준비한 제물로 진설을 하는데 할아버지 당산에 비해 제물도 생선류가 추가되어 다양하고 넉넉하며 풍물도 흥겹게 친다.진설과 제의절차는 동일하나 시작과 끝 부분에 풍물이 있는 점만 다르다. 할머니 당산나무 밑에는 제단처럼 쓰이는 밑 부분을 파고 돼지머리와 함께 제물을 조금씩 나눠 한지에 싸서 묻는다. 당산나무 밑둥에는 높이 136cm 너비 70cm 둘레 165cm인 입석이 박혀 있다.당산제가 끝난 뒤 15일 오전 중에 당산제 때 준비한 재물의 음복을 겸하여 마을의 중요한 안건을 결정하는 목청계를 열어 그 해의 품삯이나 공동관심 사안 또는 머슴의 새경 등 마을의 크고 작은 일들을 논의하고 결정하였다. 할머니 당산 옆에는 1927년 정묘 삼월에 건립한 정자가 있고 몇 개의 입석과 머리부분이 떨어져 나간 길이 90cm의 용과, 높이 55cm, 길이 100cm인 호랑이라 부르는 자연석이 마을을 향해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서 있는 위치나 당산나무와의 관련성을 생각건대 입석신앙 유물로서 마을 수호신 성격의 선돌이라 생각된다.당산제가 끝난 15일부터는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마당밟기를 하였는데 이 때 거두어진 돈과 곡식 등은 마을의 공동기금으로 사용하였다.엄격한 금기를 지키며 모든 주민들의 정성을 모아 지내오던 대문산 당산제는 이제 단절되고 말았다.당산제 후 집집마다 일정량의 볏짚을 내어 마을 안 사거리에서 줄을 드리는데 괴목나무에 3합의 줄을 걸고 50미터쯤 되는 큰 줄을 만든 다음 마을을 양지와 음지로 편을 갈라 풍년을 기원하는 외줄다리기를 2월 초하루에 실시했으나 이제는 보기 힘든 민속이 되어 버렸다.(광주직할시 향토문화총서 8집, 문흥동 문화유적 지표조사, 1991)10) 문흥동 소문산(送亭) 당산제소문산은 현재의 대주아파트 자리에 있던 여술마을과, 6·25때 피난 와서 정착한 월남민들의 정착마을(혹은 수용소) 그리고 현재 터의 송정마을을 통틀어 소문산이라 부른다. 소문산의 주요 성씨는 경주 김씨로 22호이고, 상주인구는 386명, 총 호수는 98여호로 농업이 대부분이다.송정이란 마을 명칭은 지금은 없어졌으나 회동댁(양규율씨 조모) 집 앞에 있던 마을의 할아버지 당산인 커다란 소나무 때문에 생겼다고 구전된다. 밑둥이 성인 5명이 손을 맞잡아야 안을 만큼 커다란 소나무가 해방 이후 큰바람에 부러진 뒤 없어져 버렸다. 할머니 당산은 통장인 김치호씨 집 앞에 있었는데 수종은 귀목나무이며 둘레는 성인의 6발정도 되는 거목이었다.소문산의 당산제는 현재 중단된 상태이나 20여년 전까지는 온갖 정성을 다해 지내왔다고 전한다.당산제의 준비는 현재 중단된 상태이나 20여년 전까지는 온갖 정성을 다해 지내왔다고 전한다. 당산제의 준비는 음력 1월 10일 저녁 마을회의에서 그 해의 운세와 생기복덕이 맞고 궂은 일이 없는 사람을 선발하는데 제관은 초, 아, 종헌관으로 3명, 축관, 화주 3명을 뽑아서 각각의 임무를 부여하면서 시작된다.제관은 김내문(작고), 축관은 김신원(작고)씨가 주로 맡았다. 제의 비용은 용머리돈이라 부르는 호구전으로 충당했으며, 제물은 음력 1월 12일 종방 옆 버드내 천정장(현 양동장)에서 구입하는데, 화주내외를 포함하여 4명이 구입한 뒤 저녁 늦게야 동네에 돌아온다.주요 제물은 생선으로 부서와 북어, 대추, 밤, 곶감, 배, 소고기, 돼지머리, 시루떡, 3채나무와 초, 향 등이며 당산제에 쓸 제기는 마을에서 보관하고 있는 목기를 쓰며, 제주는 화주 집에서 준비한 청주를 쓴다. 1월 13일이 되면 화주와 제관 집 그리고 마을 입고와 당산주변에 왼새끼 금줄을 치고 마을 뒤 북덕산(경주김씨 선산)에서 파온 황토를 소복하게 세 군데씩 놓아 잡인의 출입을 막는다.제관과 화주 축관들은 제관으로 선정된 이후 철저히 금기생활을 하는데, 마을 들샘에서 찬물로 목욕하고, 상가 출입을 하지 않고 잡인과의 접촉도 피하는데 대소변 후 목욕재계하는 등 정성을 기울인다.1월 14일 밤 10시쯤 제관과 축관들이 화주집에 모여서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에 쓸 제물을 각기 나눠 제 지낼 준비를 한 다음, 자정에 쇠, 징, 북, 장고, 나발, 소고 2명으로 짜여진 풍물패를 앞세우고 남자들만 할아버지 당산으로 간다. 부정탄 사람은 지골 맞는다는 속신 때문에 당산에 가질 못했다고 한다.제순은 유교식 절차를 따르는데 진석-인사굿-초헌-개반삽시-풍물-아헌-축문-종헌-소지-충물-헌식 순으로 이어진다. 헌식은 돼지머리를 한지로 싸서 당산 밑에 묻고 나머지 음식은 화주 집으로 옮겨 보름날 아침에 나눠 먹는다.당산제의 축문은 전하지 않으나 마을의 무사태평과 풍농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1924년 갑자년에 호열자가 창궐하여 부득이 당산제를 한번 중단한 적은 있었으나 그 후 일제의 중지령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당산제를 지내오다 광복이후 몇 차례 지낸 뒤 6·25를 전후하여 중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할아버지 당산에서 제를 마친 뒤 닭이 울고 나야 따로 준비한 제물을 가지고 할머니 당산에서 제를 지낸다. 축문의 내용 일부만 다를 뿐 기타 제례 절차는 할아버지 당산과 동일하다. 당산제를 모두 마친 제관, 화주, 축관 등은 이레 동안 출입을 삼가고 근신한 뒤 대문에 두른 금줄을 거둬 당산 밑에 가서 불을 사뤄 묻는다.보름날 아침 화주집에서 준비된 제물로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음복을 한 뒤, 그 해의 당산제를 결산하고 마을의 공동안건을 논의하며 품삯과 머슴의 새경, 공동작업을 결정하는 마을회의가 열린다. 회의를 마친 뒤 화주집에서 풍물을 치고 즐겁게 하루를 보낸다.16일부터는 마을 안 샘굿을 시작으로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문굿-마당굿-조왕굿-천룡굿 등을 치며 잡귀잡신을 쳐내고, 명과 복을 빌어 그 집의 태평을 기원하는 마당밟기를 한다. 쇠, 징, 북, 장고, 속 등이 굿을 이루고 농악대 뒤끝에 잡색들이 따르는데 양반, 망구, 도령, 포수, 초랭이, 중, 조빡광대, 조리광대(농악대를 선도하고 온갖 장난을 치며 마당밟기의 경비 등을 거둬들임) 등이 흥을 돋운다. 이때 거둬진 경비는 마을의 공동계에서 관리한다.(광주직할시 향토문화 총서 8집, 문흥동 문화유적 지표조사, 1991)11) 문흥동 평교(平橋) 당산제대문산과 송정마을의 당산제는 중단된 지 20여년이나 됐지만 평교에서는 지금도 약식화된 다산제를 매년 지내오고 있다.평교는 현재의 두암동과 각화동, 문흥동이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물려 있다. 대문산과 송정마을을 평교와 구분 짓는 남해고속도로가 뚫리기 전에는 대문산과 송정마을의 진입로에 해당되는 평교마을의 당산에는 수령 70년쯤 되는 괴목나무인 당산할아버지와 단기 4288년 을미년에 세운 정자 1동 그리고 독영감이라 부르는 80cm 높이의 입석 하나가 남아있다.매년 음력 1월 14일 저녁에 간단한 제물을 준비하여 당산제를 지내는데, 요즈음은 예전과는 달리 신명난 풍물도 빠지고 토박이 몇 가구만 남아서인지 주민들의 호응도 시원치 않은데다 젊은 층은 아예 얼씬도 하지 않아 87세인 김길암 옹과 예전의 상쇠로서 당산제때 풍물판을 이끌던 정용을(81세)옹이 당산제의 명맥을 잇고 있는 실정이다.평시에 지내는 당산제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음력 1월 14일 자정쯤에 제관격인 김길암 옹과 정용을 옹이 풍물패를 대동하고 삼색실과와 북어 몇 마리를 제물로 갖추어 소주를 제주로 하여 동네의 평안을 기원하는 약식의 당산제를 유교식 절차에 따라 지낸다.과거 동네가 성할 때는 풍물도 흥겹고, 제 자체도 경건함이 있었으나 설장고 가락이 일품이던 서금수옹이나 북가락이 뛰어난 김용득옹 등이 모두 타계한 지금은 농사짓던 이웃들마저 하나 둘씩 마을을 떠나 버리고 도회지의 변두리로 변한 지금은 모든 게 시들하고 신명도 없어져 상쇠를 맡았던 정영감님의 쇠가락만 외롭게 남아있게 되었다.평교마을은 마을 터가 배(舟)형국인지라 보름날 아침 동네사람 몇이서 20자 남짓의 가죽나무 짐대 2개를 준비하여 그 꼭대기에 각각 오리 1마리씩을 앉히고 입에는 대를 쪼개어 물린다.다산 할아버지 옆에 1기를 세우고, 하나는 현재의 남해고속도로 한복판쯤에 동네 좋으라고 세웠으나 8·15해방 후 단절되어 버렸다. 이로 인해 마을의 당산 근처를 짐대거리라고 불렀으며, 현재의 청과물 시장 건너편 교도소 옆은 장승이 서 있었기 때문에 장승배기라 불렀다고 한다.대정팔년(1919)에 호열자가 크게 번져 이 마을에 큰 피해가 속출하자 음력 8월 3일로 날을 받아 천제를 지냈는데, 정결한 몇 사람을 제관으로 선출하고 당산에 금줄을 두르고 황토를 깐 다음 생쌀과 조를 제물로 하여 정성껏 제를 지낸 뒤 밤새워 굿을 치다가 술을 마시고 모두 당산 부근에서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이 동네는 시끄러워 도저히 더 있을 수 없으니 이제 도동고개(마을 인근고개)로 넘어가자고 하더니 월봉댁(제보자 ○○의 외조모)만 데리고 병귀들이 마을을 떠나는 것”이 당산 옆에서 잠을 자던 사람들에게 현몽되어 깜짝 놀라 일어났는데 과연 그 다음날 꿈에 말한대로 월봉댁만 호열자로 죽고 나서는 마을에서는 더 이상의 피해자가 없었으며, 그 다음 해에는 대문산과 소문산에 열병이 유행했으나 평교에서는 당산의 영험으로 한 사람도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이후 매년 정월 보름에는 할아버지 당산에 더더욱 정성을 다해 제를 지내왔으나 이제는 지금은 몇 분 안되는 노인들만의 행사로 치러지고 있다.이외에도 북구 관내에는 광주 첨단과학산업기지 지역내의 오룡동 신흥마을 당산제, 대촌동 대촌마을 당산제, 오룡동 치촌 당산제 등이 있다. 이제 당산제의 명맥은 언제 그칠지 모를 위기에 봉착해 있다.(광주직할시 향토문화 총서 8집, 문흥동 문화유적 지표조사, 1991)
    더보기
  • 민요
    민요는 민중들 사이에서 저절로 생겨나서 전해지는 노래를 두루 일컫는다. 특정 개인의 창작이거나 아니거나 창작자가 문제되지 않는다. 그리고 악보에 기재되거나 글로 쓰이지 않고 구전된다. 엄격한 수련을 거치지 않고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다. 악곡이나 사설이 지역에 따라 노래부르는 사람의 취향에 맞게 노래부를 때의 즉흥성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민요는 이런 특징을 지니기에 민중의 소리이고, 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함축하고 있는 예술이라고 평가된다.민요는 이 지역 주민들의 공통된 생각과 느낌을 노래한 것이다. 따라서 이 민요는 그 시대에 상응하여 주민들의 생활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가요문학이요, 민간음악이라 하겠다. 사실 이 민요는 이 지방 주민의 생활사와 그 연원을 같이 하면서 삶의 애환을 읊어 시가음악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이러한 민요는 이 지방 주민의 각계각층에서 형성, 유통되어 왔기 때문에 그 범위가 넓고 내용이 다양하다.민요의 기본적인 형태는 생활에서 일정한 기능을 하는 것이고 그 가운데 노동요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노동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면 행동통일을 할 수 있고 흥겨워서 힘이 덜 들기 때문에 노동요는 전통적인 노동의 거의 전 영역에 걸쳐 구비되어 왔고 노동의 방식에 따라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불려졌다. 노동요는 최초의 민요이고 다른 여러 가지 민요를 파생시킨 모체라고 할 수 있다. 북구 지역의 경우 농업을 주로 하는 지역이 많아 특히 농업노동요가 많다.내방요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녀자의 한을 노래한 팔자노래와 시집살이의 고단함을 노래한 시집살이노래가 많다. 또한 정련요는 임에 대한 짝사랑을 노래한 경우가 대부분이다.광주 북구는 모든 분야에서 이 지역 발전의 중추적 구실을 하여 왔으므로 이 지역 나름의 토속적인 전통민요를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다. 다만 이 지역이 광산구와 밀접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양쪽 지역의 민요가 공통점과 유사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아래에 소개하는 민요는 문흥동 문화유적지 지표조사에 실려있는 내용이다.1) 농요<밭노래>못다맬 밭 다 매고 나니금봉채를 잃고 가네금봉채를 찾을라면내 품안에 잠들고 가소.놀다가세 놀다가세오늘 저녁에 어찌 그리 좋단가.(제보자 : 1991. 8. 27. 문흥동 625, 김윤덕, 여, 65세)2) 부요<세월아>세월아 봄철아오고 가지를 말어라아까운 이내 청춘이다 늙어 간다.세월아 봄철아갈라거든 네나 가제요네 청춘아가거나 간게(제보자 : 1991. 8. 24. 문흥동, 정순희, 여, 69세)3) 정요<사랑노래>나 죽었다고맘사줄 말고나 살은 동안날 섬겨 주소큰 애기 꽃따러 가는데구름은 더덩실비실로 가네(제보자 : 1991. 8. 25. 문흥동, 주혜순, 여, 83세)<과부노래>저그저 금천 비개안단목초로 선을 둘러둘이 비자고 지었던 비개혼자서 비고 잠을 자니비개 넘어로 눈물이 흘러 흘러서한강수 되었네(제보자 : 1991. 8. 25. 문흥동 514, 유덕순, 여, 67세)4) 오락요<화투타령>정월 솔아 속히 커라이월 매조 화사허도다삼월 사꾸라 산란헌 마음사월 흑사리 초시절에오월 난초 날아든 나비유월 목단에 살짝 앉어칠월 홍사리 홀로나 누워팔월 공산 달도 밝다구월 국화 서리맞은 잎에시월 단풍에 다 떨어졌네동짓달 오동 비 삼십에백설만 남기고그 많은 인생 가버리도다.(제보자 : 1991. 8. 27. 문흥동 324, 김을봉, 여, 77세)이제 이와 같은 민요는 상업주의의 산물인 유행가 또는 대중가요가 보급되고, 또 한편으로는 농촌사회의 전통적 생활방식마저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크게 위축 받게 되었다. 현대인들에게 민요는 그들의 일상생활과 직업생활에서 완전히 잊혀진 노래가 되고 있다.
    더보기
  • 월출동 : 궁중바우
    궁중바우는 월출동의 다리를 놓고 있는 부근에 있는 바위이름이다. 예전에 홍수가 져서 냇물이 동네에까지 닿았을 때, 어떤 사람이 그 바위 위에 앉아서 낚시질을 했다. 그 바위가 굉장히 컸다. 비가 많이 와서 궁중바위가 물에 떴다는 소문이 서울까지 났었다. 지금은 냇속에 쪼그맣게 있는데, 그 바위 밑이 무척 깊다. 그 바위 밑 마을이 궁암인데, 바위 이름을 따서 궁암이라 했다.
    더보기
  • 춘추새끼
    춘추새끼란 말은 토끼가 알 낳아가지고 닭이 주어먹었다는 것이데, 그 의미를 풀이하자면 해뜨는 방향이 동쪽 즉 卯방이고 해가 지는 방향은 酉방이다. 즉 해가 토끼 방에서 떠서 닭 방으로 진다고 한 것으로 풀이를 한다. 그러니까 하루 즉 낮이라고도 풀이한다.
    더보기
  • 대촌동의 당산나무 이야기
    이 마을에 당산나무가 있는데, 당산나무의 잎을 보고 그 해의 풍흉을 점을 쳤다. 풍년이 들려면 잎이 한물로 대번에 핀다. 만약 두물로 피면 모내기도 한번에 못하고 두어 번으로 나눠서 하고, 세물, 네물로 피면 가물어서 모내기도 여러 번 나눠 심는다. 당산나무 중 하나는 귀목이고 다른 하나는 팽나무다.당산나무는 함부로 자르거나 꺾지도 못한다. 그래서 옛날에는 당산나무를 불땐 적도 없다. 당산나무가지를 불때면 동태난다 해가지고 작은 가지도 꺾어서 때지 않았다. 동태난다는 말은 사람이 아프고 병이 난다는 말이다. 옛날에 지금은 돌아가신 분이지만 나무가 귀해서 당산나무의 싹다리를 가져다 불때다가 그 후로 통 목을 움직이지를 못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또 예전 어른들에 의하면 동네에 도둑놈이 들어오다가도 당산나무 앞에 오면 발이 떨어지지 않아서 도둑질도 해가지 못했다고도 한다.
    더보기
  • 대촌동 : 서출동 유수
    서쪽에서 물이 흘러가지고 동쪽으로 내린다는 말이제. 옛날에 물 좋기로는 첫째 설금(화순 동복) 둘째 응암했었어. 그렇게 여기 응암물이 좋다. 이곳은 저수지가 필요가 없었다. 이 마을에 통새암이 있고 물캐방죽이 있는디 이 두 방죽물로 농사를 짓고도 남았다.인제는 방죽도 필요없게 되었지만 예전에는 한해도 많았다. 아무리 한해가 심해도 우리 마을은 걱정없었다. 통새암이라는 곳에다는 애기 못난 사람이 공을 드리고는 했다. 그래서 아들 낳은 사람도 있다. 옛날에는 통새암이 아주 깊고 컸는데 지금은 작아져버렸지만 지금도 그 물을 먹을 수는 있다.지금은 경지정리해서 필요없게 되어서 방치를 하고 있다. 그래서 옛날부터 우리 마을의 물을 얘기하면서 서출동 유수라 했다.
    더보기
  • 대촌동 : 삼소지
    옛날 일제시대부터는 없어져 버렸지만, 삼소지면은 그대로 구 한국시절에 삼소지면으로 됐고, 옛날 지명으로 봐서는 이곳은 반쪽은 장성군이었다. 이곳은 외동면 주암리라고 했는데, 이 곳 학교를 옛 지명을 따서 주암국민학교라고 명명을 했다. 그런데 주암국민학교가 어디 있냐고 문의가 많이 들어왔다. 순천 승주의 주암초등학교 모두들 알고 있어. 그런 폐단이 많아서 삼소국민학교로 개칭을 하자고 했으나 위에서 안된다고 해서 그대로 명명을 하고 있다.물형으로 봐서 주암의 주자는 배주자이다. 근처의 지명에 맷등이라는 곳도 있고, 배를 맨다고 해서, 그 위에 배맷등이라고 있고 이 근처에는 밑등이라고 해서 배를 매놓은 물형이 되어가지고 있어. 예전 문헌을 보면은 장성군 외동면 주암인데 그때는 진원면 산동 전체가 한동네였던 모양이지요. 그때는 때니까. 그렇게 지형같은 것은 그런 것이여. 여그서 특별히 농요를 발굴한 것은 없으나 여러 가지로 미루어 볼 때 우리 마을이 한 250년 가량의 역사뿐이다. 이제 여러 성시가 들어와 제법 큰 마을이 되었었는데 이제 첨단과학기지로 이곳을 떠나야 하니 떠나기는 싫지만 국가시책이니 어쩔 수 없지요.삼소지는 그전에 외동면 주암리가 형성된 다음에 구한국시절에 삼소지면이 됐는데, 그 후 대촌면으로 되었어요. 삼소지라는 것도 내가 칠십살이지만 삼소지라는 이름이 될만한 일을 겪은 것이 없다. 아마 광주군으로 편입하면서 삼소지면으로 한 것 같다.삼소지라고 하면 글자 어원이 삼소라고 두 글자인데, 이러한 경우는 대개 한자로 쓸 경우에 두 개의 단어로 된 경우가 많은데, 삼소라고 한 것은 한자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자연발생적인 말로서 어떤 말이 변해서 삼소지로 되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예를 들어서 면 이름을 지을 때 비아면은 새로 생겼지만 월계리가 천곡이었거든요. 예전에는 비아면에 천곡이란 곳이 없었습니다. 천곡이란 곳이 샘골이라는 곳인데, 이곳이 바로 월계리 뒤에 큰물이 잘 나는 샘이 있어서 거기서 때왔을 것이다. 지금도 샘이 있다.보통 옛날에 면의 이름을 지을 때에는 그 지역의 소재지가 될 만한 마을의 지명을 따온 경우도 있지만 여러 마을을 합하다 보면 큰 두 마을의 한 글자씩을 따서 이름을 지은 경우도 많다. 법정리를 만들 때에도 그렇게 해서 대개 두 글자로 지명을 만드는데 삼소지처럼 석자로 만든 지명은 아주 드물다. 백제 때 지은 지명은 석자가 많다. 그래서 삼소지라는 지명이름이 역사가 아주 오래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더보기
  • 신룡동 : 연제동과 새암
    연제동 가면 지금은 없어졌지만 통시암 걸이란 데도 있고, 화전들이란 데가 있다.원래 연제란 이름은 그곳에 장구봉이란 산이 있는데, 거기가 담양 전씨들의 새암산인데 연꽃모양의 명당이 있다 해가지고 붙은 이름인데, 연제동은 풍수학상으로 터가 매 형국이다. 이 마을은 언제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꽤 오래되었다고 하는데, 그곳이 물이 귀하다. 마을은 굉장히 큰데, 거기서 한 500m 전방에 통시암 걸이라고 들판 속에까지 가서 물을 길러다 먹었다. 그렇게 물이 귀해서 마을 사람들은 새암을 굉장히 원했다. 새암을 아무리 구할라고 해도 물이 나올만한 데가 없어 할 수 없이 먼데서 길러다 먹었는데, 하루는 중이 와서 물었다. 그런데 마을의 부자되는 이가 성질이 괴팍해서 시주를 안했다. 추측키에 그 때가 이조 초기 억불정책을 쓸 때라 그러지 않았는가 싶은데, 아무튼 중이 보니까 마을에 새암이 없어서 먼데서 퍼다 먹으니까 그 중이 마을 복판에서 새암을 잡아줬다. 여기다 새암을 파면은 물이 잘 나오고 좋을 것이다 하고 그랬더니 물이 잘나오고 참 좋았는데, 배 한가운데를 구멍을 파버렸으니 샐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한 700m 가면은 통시암 걸이 있고, 화전들이 있고 들판에 꽃바우가 있고 들판에다가도 모두 꽃을 심었다고 전해진다.
    더보기
  • 북구 신룡동 : 신거무 장의 유래
    거가 지원고을이여. 담양 신평마을에 살던 홍주 송씨가 진월고을 원님으로 왔는데, 민치도 잘하고 지방통치를 잘할라면은 신거무를 조심해라.주변에서들 그랬는데, 신거무를 조심하란 것이 신거무를 없애부란 말로 알았어. 제일 위험한 인물인께 그래서 뚜드려서 없애부렀단 말이여. 그런디 신거무 죽은 뒤로 며칠 안가서 신거무 죽은 귀신한테 새 원님이 죽게되았어. 뭐 흰거미, 독거미가 나와서 원님 부랄을 물어서 죽었다고 글던가, 어쨌든 죽은 원님의 생이를 뜸고 간데, 생이가 못가요. 신거무 죽은 귀신이 생이 앞에서 가로막고 춤을 추고 있은께. 그래서 그 송원님 아버지가 송미암 선생인디, 나와가지고 보니까 아들 생이가 못가고 잡귀가 앞에서 춤을 추면서 못가게 하거든, 다른 사람 눈에는 안보인디, 미암선생 눈에만 뵈여. 그래서 생이를 내리라고 했어. 그래놓고 네가 누구냐 그런께 신거무라고 하거든. 그래서 왜 그러냐 물으니, 나를 무고하니 이렇게 죽엿다. 그러니 내 원한을 풀어줘야 하겠다. 그러거든. 그래서 관을 꺼내어 가지고 자기 아버지가 회초리로 때렸단 말이여. “네 이놈! 민치를 잘하고 행정을 잘하라고 그랬제. 신거무를 죽이라고 그러디 이놈아! 그런 법이 어디있냐!”고 관을 내려다가 두들겼다는 것이다. 그런께 신거무가 “반분이나 풀립니다. 분이 좀 풀립니다” 그러더란 것이여. 그것이 사실인가 어쩐가 몰라도 그래서 “그러면 네 소원이 무엇이냐?” 그러니 “여기다 장터나 하나 만들어 주쇼. 그러면 애가 거그서 귀신이나 얻어먹고 살아야겄습니다” 그래서 송미암이 장을 하나 세워줬다는 것이여. 그것이 신거무장이여. 그런디 신거무장은 파짝 장이 돼야. 제일 늦게 가는 놈이 그 날 죽어 장을 세었어도 잘돼는디, 제일 늦게 가는 사람이 죽어. 근께 얼른 싸서 도망가야제. 석양 제일 늦게 간 사람이 죽은께. 그래서 나중에 장이 없어져불고 비야 장터로 옮겨갔다는 것이여. 사람이 죽어싼께, 그래서 신거무장이 유명하재. 이 신거무장 이야기는 어떤 사람들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하고 결부시켜서 후백제 건국인 제2인자 견훤의 아들인 장수 신검의 이름이 송미암 선생의 아들은 죽인 흰거미하고 발음이 비슷한께 신거무를 이름이 붙여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하기도 한다.
    더보기
top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