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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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화동
    ● 동명의 유래 각화동(角化洞) 본래 광주군 두방면의 지역으로서, 삼각산 밑이 되므로 각화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치면의 문산리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각화리라 해서 서방면에 편입되었다가, 1955년 광주시에 편입되어 리를 동으로 고치고, 1957년 동제 실시에 따라 문화동회의 관할이 되었다가 각화동이 되었다. 위에서 각화동(角化洞) 삼각산 밑이 되므로 각화라 하였다.그러나 각화동(角化洞)의 각화(角化)는 삼각산(三角山) 아래라는 의미에서 줄어진 각하(角下)라는 말에서 유래한 이름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각하(角下)라는 말보다는 ‘각화(角化)’라는 말로 바꾸어 불린 지명이라 생각된다.▶ 각화마을의 유래백제 말기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군왕봉과 태봉이 소뿔의 형상을 하고 있어 각화라 불려졌으며 서방이나 풍향동이 역촌인 반면 각화마을은 고을터였다고 한다. 옛부터 명당이 있어 진사가 백 명이 나올 자리였으나 白(백)씨가 진사가 되어서 그 한 사람으로 끝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 마을의 연혁- 구 한 말 오치면, 송정, 문산리, 서양면 신흥리, 두방면 각화리가 있었음.- 1935. 10. 1 광주군 서방면 문흥 각화리가 됨.- 1955. 7. 1 광주시 풍향출장소 관할 문흥, 각화리가 됨- 1957. 12. 2 본청직할의 문화동이 됨.- 1961. 3. 10 북부 출장소 관할이 됨.- 1973. 7. 1 구제 실시에 따라 문화동은 동구 관할이 됨.- 1980. 4. 1 동구관할의 문화동은 신설된 북구관할이 됨.- 1985. 11. 1 문화동에서 두암동이 분동됨.- 1995. 3. 1 문화동에서 문흥지구와 우산주공 APT 지역 일부가 문흥동으로 분동됨.▶ 마을의 옛 지명- 각화(마을) : 각화동- 각홧들(들) : 각화서쪽에 있는 들.=조횟들- 강력골(골) : 각화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저수지 위 남쪽.- 군버들(들) : 각화 북쪽에 있는 들. 지금은 화물터미널이 있다.- 꼬시랑굴(골) : 각화 동쪽에 있는 골짜기. 저수지 위 북쪽.- 낡은솥골(골) : 꼬시랑굴 동쪽에 있는 골짜기- 뒷동산[세자봉](산) : 각화 뒤에 있는 동산- 들싸드릿재(고개) : 들싼재. 청오동과 경계- 들싸릿재(고개) : 각화 동남쪽에서 청풍동으로 가는 고개- 들싼드릿재(고개) : 들싼재- 마갈재(고개) : 각화 동북쪽에서 망월동으로 가는 고개. = 모갈재- 무숫골(골) : 마갈재 북쭉에 있는 골짜기- 바래봉(산) : 북당골 남쪽에 있는 산- 북당골(골) : 낡은 솥골 남동쪽에 있는 골짜기- 세자봉(산) : 뒷동산- 소까끔(산등) : 강력골 동쪽에 있는 등성이- 수웃등(등) : 숭엇등- 숭엇등[수웃등](등) : 소까끔 동쪽에 있는 등성이- 장수논(논) : 정가베미 아래쪽에 있는 긴 배미의 논. 지금은 금호타운- 정가배미(논) : 각화 서쪽에 있는 논. 정씨가 개간했다 함. 지금은 금호타운- 조횟들(들) : 각화동과 문흥동에 걸쳐 있는 들- 쥐말(골) : 두암동의 '쥐말' -두암동의 경계- 참판골(골) : 각화 남쪽에 있는 골짜기. 두암동. 현재 정수장.- 초깔모팅이(모롱이) : 소까끔 위쪽에 있는 모퉁이. 저수지 위 남쪽- 큰골(골) : 꼬시랑굴 북쪽에 있는 큰 골짜기. 마을 뒤-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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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곡동
    ● 동명의 유래 금곡동(金谷洞)은 본래 광주군 석저면의 지역으로서 쇠가 났다하여 서름 또는 금곡, 서림, 서촌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원촌리, 신촌리, 이치리와 상대곡면의 화암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금곡리라 불렀다.이곳은 ‘서림’이라 한다. 이곳 이름 ‘서림’은 ‘西’자를 빌리거나 또는 ‘書’자를 빌어 표기하고 있는데 ‘西林’으로 인해 ‘西村’이라 불리고, ‘書林’은 이곳에 서당이 있었기 때문에 불린 이름일 것이다. 그러나 ‘서당’이 있었던 곳은 대개 ‘서당골’이라 불리는 곳이 많고 ‘西洞’으로 불리는 곳은 극히 제한적인 실정이다. 또한 ‘西林’이라 하여 ‘林’자를 붙여서 불리는 지명은 ‘서’라는 소리의 ‘ㄹ’종성표기를 위하여 차용된 글자로 생각된다. 또한 이곳에는 ‘영발암터’와 ‘영발절터’가 있다. ‘영발’의 ‘永’은 훈이 ‘얼음’이니 ‘얼’이라는 소리를 빌려 표기한 지명어이다. 우리 지명에 물줄기가 합수되는 곳의 이름에 合을 뜻하는 고대국어 ‘얼’이 쓰이는데 ‘永’은 이 ‘얼’을 표기하는 지명어이다.금곡동의 금곡은 ‘쇠골’에서 나온 지명일 것인데 이곳에서 ‘쇠’가 많이 나왔기 때문에 불린 이름이라 전한다. 조선 왜란때 충장공 김덕령 장군이 이곳 출신이었기에 이곳에서 철을 많이 제련했거나 무기를 많이 제조하여 불린 이름이라 전한다.그러나 이 금곡은 ‘설’과 말의 뿌리가 같기 때문에 ‘서름’ 또는 ‘서림’이라는 이름과는 서로 무관하지 않다 생각한다. ‘설’은 지나간 해와 돌아오는 해의 갈림길에 서있는 날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땅에 금을 긋는 것은 이곳과 저곳을 구획하는 경계를 짓기 위하여 긋는 행위이다. 때문에 이 두 어사는 동일한 어원을 갖는 어사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두 지명은 이곳의 지리적 환경이 이곳에서 물줄기가 갈라지는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생각한다.* 금곡(金谷)마을▶ 마을의 유래금곡마을은 예전에 서림마을 이였다 한다. 서림이라 불리게 된 정확한 여유는 알 수 없지만 풍수지리상 앞산인 큰선배, 작은선배가 범이 누워있는 상태로 피난터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6.25 때도 이 마을은 피해가 별로 없었다 한다. 그 후 행정구역 개정 떄 전 석곡면장이 쇠가 많이 나는 곳이라 하여 금곡이라 했다 한다. 이 마을은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지석묘(고인돌) 등이 출토되고 있다. 그 후 전씨가 이 곳에 터를 잡았다 하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고 남평 문씨가 500년 전에 임진왜란을 피해 이곳에 와서 터를 잡았다고 한다.▶ 마을의 연혁- 조선후기 '호구총수(1789)' 기록에 지금의 이 지역으로 보이는 서림촌이 나타난다.-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폐합때 석저면 서림리가 석곡면 금곡리에 속했다.-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광산군 석곡면 관할이 되었다.- 1955년 7월 1일 담양군 남면 금곡리가 되었다.- 1957년 12월 2일 122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할 때 담양 나면에서 다시 광주시 석곡 출장소 충효동이 되었다.-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충효동은 동구 관할이 되었다.-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석곡출장소 충효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되었다.-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이 되었다.- 1998년 9월 21일 충효동, 청옥동, 장운동이 석곡동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탑배미 : 논의 모양새가 탑처럼 솟아 나왔다하여 탑배미라 불려졌다 한다.- 말배미 : 논의 모양새가 말처럼 생겼다 하여 말배미라 불려졌다 한다.- 섬배미 : 논의 모양새가 섬처럼 생겼다 하여 섬배미라 불려졌다 한다.- 벼락바위 : 바위가 벼락을 맞았다 하여 벼락바위라 불려졌다 한다.- 절터골 : 예전에 절이 있었다하여 절터골이라 불려졌다 한다. 기타 아니배미, 한적골, 지심터골, 배롱골 등의 지명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배재(梨峙)마을▶ 마을의 유래배재(이치)마을은 마을로 넘어오는재 이름이 배재고개라 하여 배재마을로 불려졌다 한다. 또한 배재를 한자로 풀기하면서 이치로 불렸다고 한다.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광산 김씨로 약 500년 전에 이곳으로 들어왔다 한다.▶ 마을의 연혁- 조선후기 '호구총수(1789)' 기록에 지금의 이 지역으로 보이는 서림촌이 나타난다.-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폐합때 석저면 서림리가 석곡면 금곡리에 속했다.-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광산군 석곡면 관할이 되었다.- 1955년 7월 1일 담양군 남면 금곡리가 되었다.- 1957년 12월 2일 122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할 때 담양 남면에서 다시 광주시 석곡 출장소 충효동이 되었다.-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 출장소 충효동은 동구 관할이 되었다.-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석곡 출장소 충효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되었다.-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이 되었다.- 1998년 9월 21일 충효동, 청옥동, 장운동이 석곡동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대추나무골 : 논에 대추나무가 있어서 대추나무골 이라 불렀다 한다.- 장구배미 : 논 모양이 마치 장구처럼 생겼다하여 장구배미라 불렀다 한다.- 구시 시암골 : 논에 소의 구시 같은 샘이 있어서 구시 시암골이라 불렀다 한다.- 백두재 : 배재마을 오른쪽에 있는 고개를 백두재라 부른다.- 지암재 : 배재마을 앞쪽에 있는 고개를 지암재라 부른다.- 등촌재 : 배재마을에서 등촌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등촌재라 부른다.- 접재 : 배재마을 왼쪽에 있는 고개를 접재라 부른다.- 덕봉 : 배재마을 뒤쪽에 있는 산봉우리를 덕봉이라 부른다.- 주막거리 : 배재마을 아래에 있는 곳으로 현재 새로 포장된 도로가 있는 곳이 옛날 주막이 있던 거리였다 하여 주막거리라 불렀다 한다.-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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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문동
    ● 동명의 유래 누문동(樓門洞)은 예전에 광주읍성의 북문의 누각(樓閣)으로부터 유래한 지명이다. 누문동 지역은 읍성의 ‘북문밖’ 지역으로 ‘北門外ㆍ北外ㆍ북문밖ㆍ붕밖’ 등으로 불린 곳이다. 광주 읍성은 고려말에 축성되어 조선초 석성으로 재축되었는데 “전남도청-구시청사거리-황금동사거리-중앙로-중앙초교-제봉로-노동청-도청” 주변이었다.읍성은 1907년 일제에 의해 헐리어 도로가 되었으며 96년 동구청의 전력지중화공사 때 석성 밑돌이 발견되어 97년 광주민속박물관에서 발굴조사했다. 일설에 지금의 광주일고 근처에 절양루(折楊樓)라는 누각이 있었는데 목사 오두임이 북문밖이라 하여 ‘공북루(拱北樓)’로 고쳐 불렀다 전한다. 아무튼 ‘누문동’은 공북루나 또는 절양루의 누각으로부터 생긴 지명이다.-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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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림동
    ● 동명의 유래 동림동(東林洞)은 본래 광주군 황계면의 지역인데, 1914년 동배리, 죽림리, 黃溪里 용산리의 각 일부와 군분면의 쌍촌리 일부, 덕산면의 동작리 일부, 석제면의 외촌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동배와 죽림의 이름을 따서 된 이름이다.『호구총수』자료에 ‘黃溪里, 東背谷, 竹林村, 大內洞, 射亭, 新村, 大自里, 蛇山村, 栗谷里’라는 마을이 있다. 이 중 1914년 ‘黃界里’의 이름을 따서 이곳은 ‘黃界面’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東林洞’은 ‘東背’와 ‘竹林’이란 마을이 합하여 된 이름이므로 이 洞名이 형성된 유래를 알기 위해서는 ‘東背’와 ‘竹林’ 마을의 유래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東背谷’ 그 유래가 무엇일까?『호구총수』를 보면 “竹林村, 大內洞, 射亭, 新村, 大自里, 蛇山村” 등의 지명들이 있다. 이 중 ‘大自里’라는 지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옛말에 城을 ‘잣’이라 하였다. 城은 일정한 공간을 확보하고 그 자리에 둥글게 흙이나 나무나 돌로 담을 치듯이 둘러서 막고 타인의 침범이나 危害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한 설치물이다. 이 城을 ‘잣’이라 하는데 이를 ‘자리’와 상통한다. ‘자리’는 “어떤 물체가 있거나 그것을 둘 수 있는 곳”이다. 즉 어떤 장소를 개인이나 집단이 점령이거나 확보하고 자기의 영역을 뜻한다. 그러므로 ‘자리’는 ‘잣’과 상통하며 ‘잣’은 ‘자ㆍ잔ㆍ장’ 등으로 발음되며 지명에 나타나는데 ‘자’는 ‘自ㆍ尺’로, ‘잔’은 ‘杯ㆍ盃’으로, ‘장’은 ‘壯’으로 차차 표기된다.따라서 위의 ‘東背谷’의 ‘背’는 이곳에 城이 있었기에 城을 뜻하는 ‘잣’이 ‘자’로 나타나 ‘自’자로 표기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자’가 ‘잔’으로 발음됨에 따라 ‘잔’을 훈으로 한 ‘杯ㆍ盃’로 차차 표기되었다가 ‘杯ㆍ盃’와 훈이 같은 ‘背’로 바꾸어 표기하지 않았을까 한다.아울러 위『호구총수』의 ‘射亭’은 이곳에서 활을 쏘았던 정자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이름이다. 그것은 ‘射亭’은 城과 가까운 곳에서 군사들에게 활쏘기를 연습시킬 목적으로 설치되는 구조물이기 때문이다. 또한『호구총수』에는 ‘竹林’이라는 지명이 있다. ‘竹林’은 옛날 ‘대나무’가 여러모로 다양한 용도로 쓰였는데 특히 전쟁을 위한 활을 만들거나 또는 높은 사다리를 만들기 위해서도 필요했을 것이며 ‘시누대’는 ‘화살’을 만드는 재료로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편 ‘東背谷’은 ‘동백실’의 변형인 ‘돔배실’로 발음되는 지명 예가 있다. 주로 제주도에서의 예인데 그곳은 기온이 따뜻하므로 동백나무가 잘 자라기 때문일 것이다. 동백은 ‘栢’으로 표기되므로 ‘동자’ 또는 ‘동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동백 [동박정]【마을】<전남-나주군-다시면-동당리>. 동백나무 정자가 있었음.‘동백’은 ‘冬柏ㆍ冬栢’이라 표기한다. ‘栢’은 훈이 ‘잣’이므로 ‘잣나무’와도 상통한다. 또한 지명에서 ‘柏’은 곧잘 ‘白’자 지명과 상통한다. 아래 경남 함양의 ‘東柏’도 ‘白’자와 터 쓰이고, 함양의 栢田面의 東柏, 西栢, 上白峴, 下白峴이란 지명도 ‘東柏’을 ‘동자밭’이라 부르는 것으로 보아 ‘동쪽 잣밭’이란 뜻의 지명일 것인데, ‘東柏’과 ‘西柏’은 ‘잣나무’와 관련된 지명이라 하고 上白峴, 下白峴의 ‘白峴’은 ‘白’자로 표기되며 ‘희재’라 불리고 있으니, 이들은 본래 같은 어원에서 파생한 지명일 것인데도 ‘柏’과 ‘白’으로 갈려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동백(東柏)【마을】<경남-함양군-백전면-양백리> → 동자밭.西柏洞【마을】<경남-함양군-백전면-양백리> → 서자밭.동백동(東柏洞)【마을】<경남 함양군-백전면-양백리> → 동자밭.희재[白峴]【마을】<경남-함양군-백전면-경백리>경북 고령에는 ‘자밭골’이 있다. 이를 ‘백전동’ 또는 ‘단산동’이라 부른다. 이곳에서도 ‘잣ㆍ자’와 ‘栢’, ‘丹’은 서로 읽혀 있다.자밭골[栢田洞, 丹山洞]【마을】<경북-고령군-운수면-법동> 단산 밑이 됨.‘丹’은 ‘붉다ㆍ밝다’이고 이는 ‘東ㆍ白’과 상통하는 어사이다. 그러므로 ‘丹’은 ‘赤’과 상통하니 ‘붉다’와 ‘붉다’는 상통하며 ‘明’과 상통한다. 따라서 ‘白’은 ‘丹ㆍ赤’과 상통하며 ‘날이 새다’의 ‘새다’와 통하므로 ‘날이 새다’의 ‘새다’와 상통하므로 東과 통하는 것이다.▶ 마을의 연혁- 조선후기 광주군 황계면에 속함- 1914년 동배리, 죽림리, 용산리의 각 일부와 군분면의 쌍촌리 일부, 덕산면의 동작리 일부 그리고 석제면의 외촌리 일부를 병합하여 동림리라 해서 극락면에 편입- 1955년 7월 1일 광주시 유촌출장소 설치- 1957년 12월 2일 광주시 동운동- 1961년 3월 1일 광주시 서부촐장소- 1973년 7월 1일 광주시 서구 동운동- 1980년 4월 1일 광주시 북구 동림동- 1982년 9월 1일 동원1, 2동 분동- 1986년 11월 1일 광주광역시 북구 동운1동- 1993년 12월 1일 동운 1, 3동 분동- 1995년 1월 1일 광주광역시 북구 동운3동- 1997년 3월 1일 광주광역시 북구 동림동 신설▶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죽림(竹林) : 대나무 숲이 울창하여 예로부터 불리어진 마을이름- 동배(東背)마을 : 동쪽으로 등을 지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지어진 마을이름. 일제시대에는 동족으로 궁성제배를 드리라는 뜻으로 (背 - 拜) 왜곡되어 불려지기도 했다- 불공(佛供)마을 : 조선시대에 불공사란 절이 있다하여 지어진 마을이름- 배매산 : 수백년전에 죽림마을 앞에는 큰강이 흘렀다고 하는데, 그 강을 왕래하는 배들이 이 마을 어귀에 들어왔을 때, 그 배들을 이 마을 어귀에 들어왔을 때, 그 배들을 메어놓은 바위들이 많았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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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의동
    ● 동명의 유래 ‘德義洞’의 ‘덕의’라는 마을은 어떤 유연성으로 명명된 지명일까? 항상 의문이 아닐 수 없다. ‘德’은 그 음과 훈이 ‘큰덕’과 ‘어딜덕’으로 되어있다. 때문에 德자가 들어간 지명을 듣게되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인정 많고 따뜻한 마음을 갖은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호감이 든다.그러나 옛 지명의 쓰임을 살펴보면 ‘德’자가 쓰인 지명도 물줄기로 인하여 명명된 지명이라 생각된다. 이곳은 무등산에 있는 제4수원지 아랫마을인 청풍동과 광주호 사이에 ‘德峰山’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광주호가 조성되기 이전에는 이곳 덕봉산 주변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本村마을 방향의 물과 開仙洞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德義洞에서 합수되고 있다. 때문에 물줄기가 합류되는 곳에는 合을 뜻하는 고대 국어인 ‘얼’이라는 단어가 쓰였을 것인데 이 ‘얼’이 ‘어리’나 ‘여리’ 등으로 발음되면서 고대 지명에서 ‘열’(十)과 대응되는 ‘德’자를 빌리고 ‘여리’가 ‘열의’로 발음되면서 ‘義’자를 빌어 ‘德義洞’으로 표기된 지명이다.-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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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암동
    ● 동명의 유래 斗岩洞은 동강대학 정문에서 담양 쪽에 있는 사거리 길을 ‘말바우사거리’라 부른다. 이 지명은 이곳 두암시장 입구에 ‘말(큰)바우’가 있었기에 ‘말바우시장’, ‘두암동(斗岩洞)’등으로 불리는 지명이다.그러나 지금은 말바위의 흔적이 전혀 없다. 즉 이곳에 있었던 곳에 집을 짓고 길을 내면서 바위를 쪼개 없앴기 때문이다. ‘말+바우’의 ‘말’은 ‘말(馬)’과는 무관하다. 고인돌 등 ‘큰바위’에서 유래한 지명이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을 보면 ‘말’은 “일부 동ㆍ식물의 이름 앞에 붙어서 ‘큰’의 뜻을 나타냄”이라 풀이하고 있다. 이처럼 ‘말’은 ‘크다(大)’는 뜻이다. 예를 들면 ‘말똥’은 ‘말이 싼 똥’이 아니라 ‘큰 똥’의 뜻이고, ‘말벌’은 ‘큰벌’을 ‘말매미’는 ‘큰 매미’를 뜻하는 말이다. 또한 ‘말바우’를 ‘斗岩’으로 표기하는 이유는 ‘斗’의 훈(뜻)이 ‘말’(곡식이나 액체의 분량을 되는 그릇)이고 ‘岩’은 ‘바위’이기 때문이지만 ‘말바우’의 ‘말’은 ‘斗’를 뜻하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명은 우리말을 음과 훈에 따라 한자한편 ‘말바우’는 ‘馬岩’으로 불리기도 하고 ‘말(馬)’을 사투리로 ‘몰’이라 하므로 ‘몰바우’(신안 안좌 마진), 또는 경상도에서는 ‘바위’를 ‘바구’라 하므로 ‘말바구’라 부르고 있다.▶ 마을의 유래말바우를 한자지명으로 두암이라 칭하였으며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장원봉에서 달려온 용이 군왕봉에 이르러 좌우로 쳐 좌청룡 우백호가 되고 우산동의 소산, 범덕 등이 북서쪽 벌판에서 부는 찬기를 막아주는 안산이 된다.- 월동마을 : 산의 모양이 달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마을이 산 바로 밑에 있어 달을 가장 먼저 본다고 하여 월동마을이라 하였다.- 삼정마을 : 묘자리가 세 정승이 날 자리라 하여 삼정마을이라 하였다.- 밤실마을 : 밤나무가 많아서 밤실마을이라 하였다.▶ 마을연혁- 구한말 두방면 두암리(아랫동내)와 월동리(윗동네)가 있었음- 1914. 4. 1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두방면 월동리, 두암리, 각화리, 일부는 합해져 서방면 두암리가 됨- 1935. 10. 1 광산군 서방면 두암리가 됨.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돼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1955. 7. 1 광주시 풍향출장소 관할 두암동이 됨- 1957. 12. 2 본청직할의 문화동이 됨. 122개 洞을 51개 운영洞으로 축소함에 따라 斗岩(두암), 各化(각화), 文興洞(문흥동)은 文興(문흥), 各化(각화)에서 이름을 만든 文興洞(문흥동) 관할 법정동이 됨- 1961. 3. 10 북부출장소 관할이 됨. 中部(중부), 東部(동부), 西部(서부), 南部(남부), 北部(북부), 芝山(지산), 大村(대촌), 西倉(서창) 8개 충장소제 실시- 1973. 7. 1 구제(區制)실시에 따라 문흥동은 동구관할이 됨. 이때 중부, 동부, 북부출장소를 통합하여 동구, 남부, 서부 지산출장소를 통합하여 서구를 둠- 1980. 4. 1 동구관할의 문화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1985. 11. 1 문화동에서 분리되어 두암동이 됨- 1985. 5. 15 두암 1,2동으로 분동됨- 1995. 3. 1 두암1동에서 두암3동으로 분동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음 ▶ 마을의 옛지명- 가마구둠벙[둠벙] : 두암 북쪽에 있는 둥병- 감낭징이 [들] : 두암 북쪽에 있는 들. 감나무 정자가 있음- 거처울(거처평)[들] : 두암 남쪽에 있는 들- 경렬사[사당] : 두암 앞에 있는 사당- 구왓들[들] : 구홧들 삼정등 남쪽에 있는 들- 군왕봉[산] : 두암 동쪽에 있는 산- 다보평[들] : 새다릿걸- 대포리봉(죽치봉)[산] : 두암 동남쪽에 있는 산. 대나무가 많았음 우물 두암 동북쪽에 있는 샘. 독(돌)틈에서 물이 새어 나옴- 두리봉(둥근봉, 중군봉)[산] : 군옹봉 서쪽에 있는 산- 두암[바위] : 두암동- 둥근봉[산] : 두리봉- 만바우[마을] : 두암동- 말바우[바위] : 두암 서쪽 길가에 있는 큰 바위. 길을 넓히느라고 깨어 일부만 남았음.- 무냉깃재[고개] : 두암 남쪽에서 효죽동으로 가는 고개. 물이 넘어갔다 함.- 밤실[골] : 대포리봉 남쪽에 있는 골짜기- 변덕고개[고개] : 두암 서쪽에 있는 골짜기- 범덕고개[고개] : 두암 서쪽에서 중흥동으로 가는 고개- 삼정골[골] : 삼정등 밑에 있는 골짜기- 삼정등[등] : 두암 남쪽에 있는 등성이- 새다릿걸[다보평][들] : 두암 서쪽에 있는 들. 사다리처럼 층 층으로 생겼음- 솔시암[송천][우물] : 두암 복판에 있는 우물. 소나무가 있음- 송천[우물] : 솔시암- 아홉마짓걸[들] : 두암 동쪽에 있는 들. 아홉 마지기의 논이 있음- 오리재[고개] : 올재- 올재[오리재][고개] : 두암 동남쪽에서 화암동 제4수원지로 가는 고개- 조봉산[산] : 좁은골산- 좁은골[골] : 두리봉 남쪽에 있는 골짜기- 좁은골산[조봉산][산] : 좁은골에 있는 산- 주마곡[골] : 쥐몰- 죽치봉[산] : 두리봉- 중군봉[산] : 두리봉- 쥐말[골] : 쥐몰 두암과 각화동에 걸쳐있는 골짜기- 진보[보] : 두암 서쪽에 있는 긴보- 참관[등] : 참팽이- 참팽이[참판][등] : 두암 동북쪽에 있는 등성이- 충장사[사당] : 두암 뒤쪽에 있는 사당- 큰구왓들[들] : 구왓들의 큰 들-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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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월동
    ● 동명의 유래 망월동(望月洞)은 본래 광주군 상대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분토리와 하대곡면의 복정리 일부와 창평군 서면의 죽곡, 죽월산리 일부를 편입하여 옥토망월형의 명당이 있다 하여 망월리라 해서 석곡면에 편입되었는데, 1955년 광주시에 편입되고, 1957년 동제 실시에 따라 청옥동외의 관할이 되었다가 후에 동이 됨.그러나 대개 명당 이름은 옛 지명에 따라 지어지는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으니 옥토망월형의 망월은 주로 ‘望’에 그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望’은 훈이 ‘바라다’이므로 ‘발’을 훈차하여 부르는 지명일 가능성이 높다. 이곳은 청옥동이나 충효동 주변에 옛 성이 있었으므로 이 성의 영향으로 이곳 마을에까지 성을 유연성으로 한 지명이 방사되어 불리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옛날 성은 주로 토성을 쌓는 것이 원칙이지만 목책을 세워서 적을 방어하기도 했다. 본성이 아니고 주변에 본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방책을 세웠는데 이럴 경우 우리가 흔히 발을 엮어 둘러친 것과 같다하여 발이라 하듯이 성도 발이라 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야동마을▶ 마을의 유래대야마을은 원래는 '들'이었을 것이다. 그 근거도 예전에 이곳을 춘들바 ·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들'에 생겨난 마을이라고 하여 대야(大野)라고 불렀을 것이라고 추측해 보나 정확한 근거는 없다. 이 마을은 1915년 윗마을 분토마을에서 살면서 주사벼슬을 하던 은건 송씨, 송재철가 처음 이곳에 터를 잡은 것으로 전해져온다. 송재철씨는 이곳에 서당을 세우고 훈장을 직접 맡아 후생교육에 힘썼으며 그 외에도 마을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한다. 이후 전주 이씨, 김씨 등이 들어와 살았다.▶ 마을의 연혁- 청동기 시대 망월동 분토마을에 8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촌, 등촌리 각 일부는 청풍리가 각각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했음.-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석곡면 청풍, 망월, 화암리가 됨.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될 때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1955년 7월 1일 광주군 망월 출장소 관할 청풍, 망월, 화암동이 됨. 광주 지역 확장에 따라 광산군 석곡면이 광주시로 편입되면서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망월출장소를 설치함- 1957년 12월 2일 광주시 석곡출장소 관할 청옥동이 됨. 122동을 51개 동으로 축소하고 석곡, 지산, 서창, 대촌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함에 따라 화암, 망월, 청풍동은 석곡출장소 청옥동 관할 법정동이 됨- 1961년 3월 10일 북부 출장소 관할이 됨. 4개 출장소를 폐지하고 중부, 동부, 남부, 지산, 대촌, 서창의 8개 출장소제 실시-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청옥동은 동구 관할이 됨. 이때 중부, 동부, 북부출장소를 통합하여 동부, 남부, 서부 지산출장소를 통합하여 서구를 둠-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청옥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이 때 석곡, 지산출장소를 없앰-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청옥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장운동, 충효동, 청옥동이 통합하여 석곡동이 됨.* 월산마을▶ 마을의 유래이 마을은 예전에는 마을이 없었던 곳에 새로운 마을이 생겨났다고 하여서 샛터라고도 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의 형성시기는 1910년에 광주시내에 살던 박화성씨와 박찬귀씨가 이곳으로 이주해서 처음으로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에는 김씨가 살았으며 현재 박씨는 살고 있지 않는다고 한다.▶ 마을의 연혁- 청동기 시대 망월동 분토마을에 8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이 지역은 광주군 상대곡(윗대실)속했다. 당시 이곳에 분토동, 신촌, 등촌, 화암촌이 있었음.-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촌, 등촌리 각 일부는 청풍리가 각각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했음.-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석곡면 청풍, 망월, 화암리가 됨.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될 때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1955년 7월 1일 광주군 망월 출장소 관할 청풍, 망월, 화암동이 됨. 광주 지역 확장에 따라 광산군 석곡면이 광주시로 편입되면서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망월출장소를 설치함- 1957년 12월 2일 광주시 석곡 출장소 관할 청옥동이 됨. 122동을 51개 동으로 축소하고 석곡, 지산, 서창, 대촌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함에 따라 화암, 망월, 청풍동은 석곡출장소 청옥동 관할 법정동이 됨.- 1961년 3월 10일 북부 출장소 관할이 됨. 4개 출장소를 폐지하고 중부, 동부, 남부, 지산, 대촌, 서창의 8개 출장소제 실시-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청옥동은 동구 관할이 됨. 이때 중부, 동부, 북부출장소를 통합하여 동부, 남부, 서부, 지산출장소를 통합하여 서구를 둠-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청옥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이 때 석곡, 지산출장소를 없앰-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청옥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장운동, 충효동, 청옥동이 통합하여 석곡동이 됨.▶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동낭치 배미 : 동낭치가 이 논에서 굶어죽었다고 하여 동낭치 배미라고 불리워 졌다.- 장애골 : 말을 타고 군사훈련을 했다하여 장애골이라 불리워졌다.- 평룡골 : 용이 집뒤를 온순하게 내려왔다고 해서 평룡골이라 했다한다.- 원터 : 예전에 이곳이 원님이 살았던 곳이라 해서 원터로 불리워졌다 한다.-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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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흥동
    ● 동명의 유래 문흥동(文興洞)은 본래 광주군 오치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송정리와 문산리, 용주리의 각 일부와 서양면의 신흥리 일부와 두방면의 각화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문산과 신흥의 이름을 따서 문흥리라 하여 서방면에 편입되었다가, 1955년 광주시에 편입되어 생긴 동이다.▶ 문산, 송정, 수용소, 여술마을의 유래- 문산(文山)마을 : 문산마을은 원래 밀매(민매)라 하였는데 마을이름을 한자로 바꾸면서 민매는 민둥산이기 때문에 독산(禿山)이라 하였다가 한말경에 문산(文山)이라 하였다. 또 문산을 대문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을 부락을 이루고 있던 마을 중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마을이었기 때문에 주민들이 그러게 불렸다고 한다.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임진왜란 이전에 백(白)씨가 터를 잡아 살았다고 전하며, 濟州梁氏인 양재현(梁載賢)이 임진왜란 직전에 이곳에 들어와 터를 잡고 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과 함께 금산에서 순절하였는데 이 후손들이 자작일촌을 이루며 살아왔다.- 송정(松亭)마을 : 송정마을은 문산마을과 같이 임진왜란 이전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온 성씨는 경주 김씨인 김갱경(金坑慶)이 터를 잡고 살았으며 이 후손들이 자작일촌을 이루며 살아왔다. 이 마을 이름을 송정이라 한 것은 마을 앞에 장정 3 ~ 4명이 안아야 소이 닿을만큼 큰 솔정자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 나무는 가지가 ㄱ字모양으로 땅쪽으로 굽어 마치 날개가 달린 듯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해방바람에 쓰러지고 말았다고 한다.- 수용소(收容所) : 수용소는 일명 정착촌이라고도 하며 1950년대 6.25동란 때에 포로병으로 잡혀있던 포로들을 일시에 석방함에 따라 이곳에 수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여술(狐洞) : 여술마을은 마을 뒷산에 여우가 깃들었던 도굴이 있어 여우가 출몰하였다하여 여술이라 했는데 한자어로 고치면서 호동(狐洞)으로 바뀌었다.▶ 마을의 옛 지명- 갈림보(보) : 갈림보들에 물을 대는 보. 두곳으로 갈라져 흐름.- 깟밭태(들) : 욋등 남동 쪽에 있는 들. 지금 광주교도서 앞에 있는 들.- 대문산(마을) : 문산 큰 마을. 밀매=민메- 독산(마을) : 문산=밀메=민메- 드렁골(골) : 문산 북쪽에 있는 들. = 덜렁골- 마대산(산) : 요롱골 남쪽에 있는 산. 문흥동 제일 끝에 있는 산. = 마지까끔 = 마디산.- 모개시암(우물) : 원지시암 윗쪽에 있는 우물. 광주교도소와 문산사이에 위치. 모기가 많아 모기시암이라고도 함.- 모래걸(논) : 모개시암 아래쪽에 있는 논. 비가 오면 갈림보에서 물이 넘쳐 넘어와 모래가 많았음.- 문산(마을) : 문흥동에서 으뜸되는 마을. 밀매=민메=대문산.- 바느실(들) : 포사막굴 아래쪽에 있는 들- 부남실(들) : 송정북쪽에 있는 들. 지금 금호아파트 뒤편- 석시낭골(골) : 독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중국 진나라 석숭과 견줄만한 부자가 날 명당이 있다함.- 송정(마을) : 문산 서쪽에 있는 마을. 소나무 정자가 있었음.- 수용소(마을) : 물고래들 서쪽에 있는 마을. 1.4후퇴시 피난민 수용소가 있었음. =정착촌- 송구래(들) : 평교 남쪽에 있는 들. 지금 대주아파트 자리.- 여술(마을) : 호동. 여우가 많았다고 함- 욋등(등) : 문산 동북쪽 길가에 있는 등성이. 기와를 구었다 함. =와야등. 밑에 고속도로가 있음.- 요롱골(골) : 드렁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송영골.- 원지시임(우물) : 모래걸 밑에 있는 우물- 호동(마을) : 문산 남서쪽에 있는 마을. 뒷산에 여우가 깃들었다 함.-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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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촌동
    ● 동명의 유래 本村洞은 예전에는 갑마보면의 소재지로 이곳의 마을명이 본촌이었으므로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본촌리라 했다.대개 ‘本村’이란 지명은 마을이 그 지역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일 때 붙여지는 이름이다. 근방에 새로운 마을이 생기면 ‘新村’ 또는 ‘새마을’이라 불리게 된다. 이곳은 예전의 甲馬保面의 소재지였다. 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甲馬保’는 이곳 산이 ‘가마솥’처럼 생겼기에 ‘가마솥보’라고 불렀다 한다. ‘가마솥’은 줄여서 ‘가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곳에 보(洑)가 생기자 ‘가마보’라 할 것을 ‘ㅁ’받침을 윗말의 받침으로 붙여 읽어 ‘감마보’로 읽고 다시 ‘ㅁ’음을 두 번째 음절의 첫소리로도 읽으면서 ‘갑마보’가 되었고 이를 ‘甲馬保’라 표기하면서 ‘甲馬保’라는 표기가 생겼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어서 이곳이 面의 소재지가 되자 ‘甲馬保面’이라 부르게 되었다 생각한다.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가마솥’은 ‘鼎’(솥 정)자를 써서 표기하기도 하고 ‘釜’(가마 부)자를 써서 표기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전남 담양군 금성면 금성리에 ‘가마실’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를 한자로는 ‘釜谷’이라 표기한다. 이와 같이 ‘가마’는 쇠로 만드는 물건이기 때문에 ‘釜’자가 쓰이지만 ‘金’자와도 상통하게 된다.* 본촌(本村)마을▶ 마을의 유래조선시대 때의 갑마보면의 소재지가 있었던 곳이라고 해서 본촌이라고 했으며 본촌동은 영산강 상류동쪽 용두마을 지산촌에서 씨튼수녀원 뒷산으로 올라 사망당재 처맷봉을 지나서 큰 골에서 양지마을을 내려와 본촌공단을 건너 서편으로 넓게 펼쳐진 꽃밭둑 일대를 본촌동이라하며 이 본촌동은 원래는 갑마보면이었는데 본촌마을의 뒷산이 가마솥 모양을 닮아서 가마보라고 불려졌으며 이 후 본촌동으로 바뀌었다.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홍씨였다고 전해지지만 정확한 근거는 없다. 이 후 밀양 박씨와 광산 김씨, 이천 서씨가 유입되어 살아왔었고 광산 김씨가 300여년 전 크게 번성하였을 때 홍씨는 동복, 지금의 화순으로 이주하여 쇠락하고 거의 지금은 살지 않고 있으며 밀양 박씨 또한 지금은 살지 않고 있지만 밀양 박씨의 선산이 이 마을에 있어 과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광산 김씨의 번창으로 자작일촌이었지만 현재는 여러 성씨가 유입되어서 점차 산성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연혁-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 때 거상리, 거하리, 신기리의 각 일부가 삼소지면의 하대리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용두리라 해서 본촌동에 편입하였음-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용두동 관할이 됨- 1957년 11월 6일 광주시에 편입되어 용두동 관할이 됨- 1957년 12월 1일 121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할 때 지산출장소 본촌동 관할이 됨-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서구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관할의 본촌동은 신설된 북구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북구관할 본촌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본촌, 삼소, 우치동이 통합되어 건국동이 됨.▶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갑마보면터 : 본촌에 있는 갑마보면의 터로써 본촌마을의 뒷산이 가마솥 모양을 닮은 데에서 조선시대에는 가마보면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부산 : 마을 뒷산의 이름(가마보산을 한자로 표기한 산)- 가마보산 : 가마솥을 닮은 산- 개둠범 : 개가 자주 목욕을 했다는 둠벙- 무젯등 : 무제를 지냈다는 곳- 방애들 : 물방아가 있었던 곳- 본촌제 : 본촌 마을에 있는 연못- 사망당재 : 본촌동 남쪽에서 일곡동으로 가는 고개를 말하며 서낭당(사망당)이 있었던 곳- 서당재 : 서장이 있었던 곳- 시암 배미 : 시암이 있었던 곳- 배나무 배미 : 돌배나무가 있었던 곳- 여시 모랭이 : 산모퉁이 옆으로 여시가 많이 나타났다는 곳- 짚은 배미 : 바닥이 깊었던 곳- 치맷봉 : 마을 뒷산에 있는 봉우리- 행개 배미 : 향교에 딸린 토지였으며 본촌마을 앞에 있는 논- 죽 배미 : 팥죽과 바꿨다는 논- 된장 사리  :이 곳에서 재배된 것으로 된장을 담았다고 한다.- 감주 배미 : 감주와 바꾼 논- 평질메 : 산주위의 평평한 논- 자라봉 : 자라모양의 봉우리 : 기타 장오지, 안골, 뒤골, 밴둠거리, 범안골등이 있다. * 신용두(新龍頭)마을▶ 마을의 유래1972년 무등경기장 건설로 그 일대를 철거민들이 이 곳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용두마을 옆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마을이름을 신용두라고 하였으며 마을이 새로 생겼다고해서 현재까지 새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을이 있기 전에는 이 곳을 양계랑이라고 하였다는데 그 이유는 이 곳에 규모가 큰 버섯공장과 양계장이 있었던 곳이어서 그렇게 불렀으며 주위에 공동묘지도 있었다고 한다. 이주할 당시에 광주시에서 15년 상환을 조건으로 집을 지어주어서 이 곳으로 이주시켜주었으나 현재가지도 이곳 주민들의 어려운 생활환경은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 주민들의 대부분은 일용직 근로자들로 노동 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일부는 본촌공단에 다니기도 한다. 이주한 주민들이기에 다양한 지역의 출신과 다양한 성씨가 살고 있다. ▶ 마을의 연혁- 1972년 무등경기장 건설로 그 일대의 철거민들이 이주하여 이 마을을 형성하여 지산출장소 본촌동이 됨.- 1973년 7월 1일 구제실시에 따라 지산출장소 본촌동은 서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관할의 본촌동은 신설된 북구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될 때 광주직할시 북구 본촌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본촌동, 삼소동, 우치동이 건국동으로 통합되어 현재에 이름.▶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새마을 : 용두마을 옆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신용두마을을 새마을이라고도 한다.- 양계장 :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기 전 양계장이 있었던 곳이어서 양계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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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동
    ●동명의 유래 북구 북동(北洞)은 현재 롯데백화점 광주점 부근에서 북성중학교에 걸친 지역으로 이곳은 옛 광주 읍성(光州邑城)의 북문(北門) 바깥쪽이었으므로 “北門밖, 北門外, 北外, 붕밖”이라 불린 곳이다. 본래 광주읍성의 북문은 현재 충장로 파출소 부근에 있었으며, 북문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광주일고 부근에 ‘공북루(拱北樓)’가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의 금남로5가와 대인동의 일부 지역은 예로부터 “붕밖ㆍ북문밖ㆍ북문외”라 불린 지역이다.이렇게 각 지역에 북문이 있어 “붕밖ㆍ북문밖ㆍ북외”등의 지명이 공존하고 있는 곳은 구례군 구례읍 봉북리, 해남군 문내면 서상리, 순천시 매곡동, 경기도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등 전국에 많이 남아 있다.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은 본래 광주군 기례방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누항리 일부와 공수방면의 상촌 일부를 병합하여 누문리(樓門里)라 해 광주면(시)에 편입됐는데, 1927년 누문리를 갈라서 북정(北町), 누문정(樓門町)이라 하다가, 1948년 왜식 동명(洞名) 변경에 의해 ‘북동’과 ‘누문동’으로 고쳐 불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마을의 연혁- 조선후기 광주군 기례방면에 속함-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누항리 일부와 공수방면의 상촌 일부를 병합하여 누문리(樓門里)라 해 광주면(시)에 편입- 1927년 누문리를 갈라서 북정(北町), 누문정(樓門町)이라 함- 1948년 왜식 동명(洞名) 변경에 의해 북동과 누문동이라 부름- 1997년 3월 1일 소규모 동 통합방침에 의거 유동, 북동, 누문동이 통합되어 중앙동 관할▶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외암동(유안동, 유암동) : 북동의 으뜸마을.- 조봉(종흔동, 조봉리) : 유안동 서남쪽에 있었음.- 조시밋재 : 조봉 남쪽에서 효덕동으로 가는 고개. 조씨의 묘가 있었음.- 부체울(불도리) : 유안동 남서편에 있는 동네로 돌부처가 있었다 함.-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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