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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계牛溪 문동길文東吉<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 조달의 밀지를 받은 "우계牛溪 문동길文東吉"
     문동길(1901~2000)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자는 동길東吉. 호는우계牛溪. 본관은 남평. 부친 매헌 문재국과 어머니 수원백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광주 북구 청풍동 신촌 마을에서 태어났다.그는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재질이 탁월하였다. 15세 때 4서 3경에 정통하고 국가의 동량으로 촉망을 받았다. 당시의 정치 상황은 민비시해사건과 을사늑약, 한일합방을 거쳐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시기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곡성 일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로서 19세 되던 해에 3·1운동에 동참하였으며군자금 모금 지도를 비롯하여 동지인 김성현金聖炫, 김재중金濟中과 같이 단체명 미상의 소속원 신덕채申德采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조달의 밀지를 받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1920년 음력 2월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박운아朴雲娥의 집에서 회합 협의하였다.그는 여섯 번에 걸쳐 곡성·담양 등지의 유력가로부터 임시정부 군자금조달원임을 밝히고, 군자금 명목으로 현금 및 갹출 증서, 물품, 거액의 군자금 등을 거두어들이는 활동을 폈다. 1921년 광주군 석곡면 김두길金斗吉의 밀고로 일제에 의해 발각되어 전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며 1921년 11월 12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6년간 옥고를 치렀다.그는 출소 후에도 본명을 수창으로 개명하여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국가에서는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추서되었다.1988년에 그의 애국 활동을 기리기 위해 애국지사문공동길공훈비愛国志士文公東吉功勳碑를 그의 고향인 북구 청풍동860-3 번지에 건립하였다.출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광주읍지,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광주지방법원판결문, 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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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명是鳴 노석정盧錫正<독립운동가>
    사재를 털어 독립운동 자금을 보낸 시명是鳴 노석정盧錫正
    노석정(1892~1967)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자는 기준基準. 호는 시명是鳴. 이명異名은기준基俊 基準. 본관은 광주. 노문규盧汶奎의둘째아들로 광주 북구 일곡동 출신이다.그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상하이로 망명했다가, 1920년 국내로 잠입하여 동지인 전아협全雅莢, 조병철曺秉喆, 김정련金正連, 윤영기尹永淇, 양인묵梁仁默, 노형규盧衡奎, 조병렬曺秉烈, 신유선辛有善 등과함께 서울에 있는 신덕영 및 최양옥 등과 연락하며 광주, 화순, 곡성, 담양, 보성 등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다.그는 광주군에 거주하는 이윤호李允鎬의 집에서 대한민국 군제특파원軍制特派員 한준호韓俊鎬, 박문용朴文容, 이재환李在煥, 정용택鄭容澤등과 회합하여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할 것을 논의했다.3·1운동 직후에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에 가입하면서 부터다.대동단은 1919년 3·1운동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는 시기에 전협全協, 최익환崔益煥 등이 결성한 비밀 독립단체였다. 이 단체는 국내에서 제2의3·1운동을 조직하려고 했고 그해 9월에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을 상해임시정부로 망명시키려고 했다가 중도에 발각되는 바람에 불발에 그친 적도 있다.대동단 가입 후에 그는 광주 전남지역을 돌며 군자금 모금활동을 했다.먼저 그 자신의 집안 자산을 팔아 상해임시정부에 송금했다.(광주시사 제2권 477쪽) 아울러 광주 전남지역을 돌며 부호들에게서 군자금을 모금했다. 그러던 중 체포돼 1921년 광주지방법원에서 그는 징역 7년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동아일보 1931년 6월 4일자)이후에도 독립운동과 사회활동을 지속해 1920년대에는 광주 고등보통학교 학부모회 활동에 관여했고, 동아일보 광주지국 기자와 지국장으로활동했으며, 노문영盧文永과 함께 빈농들의 자제들을 가르치는 ‘일곡청년야학원’을 설립했다.(동아일보 1929년 1월 7일자) 1930년대에는 동아일보여수지국장을 지냈고, 해방 후에는 광주에서 발행되던 호남신문 부사장과한독당 전남대표를 맡았다.1949년 03월 12일 국민회 전라남도본부 결성 추진위원회 추진위원으로선정되고, 3월 31일 광주시지부를 광주극장에서 지부결성식을 거행한 결과 선출된 임원은 위원장 장병준張柄俊, 부위원장 김영대金永大, 김용환金容煥, 사무국장 강익수姜益秀, 그는 선전부장에 선출되었다.정부는 노석정의 독립운동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을, 1990년 건국훈장을 추서했다.1991년 그의 유해를 국립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출전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 독립운동사, 광주지방법원판결문.-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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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곡明谷 노석중盧錫中<독립운동가>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던 대동단의 회원인 명곡明谷 노석중盧錫中
     노석중(1875~1954)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자는 순익巡益. 호는 명곡明谷. 보명譜名은 석우錫宇. 초명初名이 석중錫中. 본관은 광주. 절충장군折衝將軍 돈규敦奎의  아들로 광주 북구 일곡동 출신이다.3·1운동 직후 독립운동에 투신해 서울에서 신덕영, 노형규와 만나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했다.(동아일보 1921년 5월 1일자) 대동단은 3·1독립운동 직후 민족적 대동단결과 실력양성을 표방하고 민족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담당할 것을목적으로 전협全協, 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하여 결성된 비밀결사 단체였다.1920년 7월부터 광주 전남지역에서 군자금 모금을 중심으로 활동을 본격화했다. 그 시기에 대동단과 광주 전남 지역의 단원들 사이를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였다. 이후 그는 광주 전남 지역에서 자산가들을 대상으로하는 신덕영申德永 등과 함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그 수단으로서울에서 대동단 총재 김가진金嘉鎭의 명의로 포고문을 만들어 전라남도광주군 본촌면 일곡리 노종룡盧鍾龍 등 광주의 부호들에게 각각 우송하여 출금을 요구했다. 이때 그의 아들인 노상영도 참여했다.또한 동지 포섭에도 힘을 쏟아 조직을 확대하여 가며 대한민국임시정부와도 연락하며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1921년 5월 31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대구 복심법원에 상고하였으나 1921년 12월 13일 역시 징역 5년 형을 선고하여 옥고를 치렀다.(동아일보 1921년 6월 4일자) 이후 광주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54년에 사망했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1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제1묘역 303호에 안장하여 추모하고 있다.출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 독립운동사자료집,대구복심법원판결문.-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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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해蘇海 노종룡盧鍾龍<독립운동가>
    을사늑약 후 항일 운동에 매진한 “소해蘇海 노종룡盧鍾龍”
     노종룡(盧鍾龍, 1856~1940)은 유학자. 독립운동가. 자는 치운致雲. 호는 소해蘇海. 면수勉修. 농아聾啞. 본관은 광산. 돈녕부 도정 농암聾巖 노재규盧在奎의 아들로 광주 일곡동 출신이다.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고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과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7의 문하에 들어가 부지런히 학문과 덕행을 수학하였다.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의 통치권을 일본에 빼앗기고 식민지가 된 국치國恥를 당하자 통곡하고 수차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해 북구 일곡동에 소해정蘇海亭을 짓고 은둔하면서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 난와難窩 오계수吳繼洙,녹천鹿川 고광순高光珣, 신암愼庵 노응규盧應奎, 제현과 도의의 교제를맺어 학문을 논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스승인송병선이 자결한데 뒤이어 스승인 최익현이 일군日軍에 잡혀 대마도에서순절함에 그는 통곡으로 장례을 마친 뒤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척사위정斥邪衛正의 대의大義로써 누차 상소를 올려 오적五賊을 물리치고 나라를 보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 농아聾啞라 호를 고치세상 일과 인연을 끊고 광주 일곡동 농암정聾岩亭 아래에 소해정蘇海亭을 짓고 제현들과 학문을 논하였다.  1905년 11월 12일에는 기우만에게 편지를 보내 나라를 보전하는 방책을 논의하고, 1916년 송사 선생 상례 때 당위掌位로 참석하였으며, 1924년 담대헌을 중건할 때 220냥을 성금으로 내었다.그는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려면 먼저 후진육성이 시급한 일이라 생각하여 전국 노씨삼능단대종회, 삼일계, 보본계 등을 조직하여 항일정신 고취와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한편 항일 투쟁을 하다가 옥에 갇혔으나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15년에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쟁하고 1919년에 사림 수천명을 동원하여 순종황제의 복위를 위해 노력하였다. 삼대독자인 아들 또한 항일투쟁으로 일본 관헌으로부터 갖은 고문을 당하고 있어 통분 속에서 아들의 출옥을 보지 못하고, 1940년 5월 23일 타계하였다.그의 문인과 향내鄕內 유림이 그와 그의 스승 송병선의 유풍을 추모하여 1944년 일곡동에 만주사晩州祠를 세워 배향하였다.소해유고蘇海遺稿는 그의 아들 진영軫永이 1941년에 고광열高光烈의서와 1948년에 종생宗生 노철수(盧澈秀 1871~1951)의 발을 받아 출간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못해 다시 여기에다 1959년 고윤주高允主의 후서後序, 1960년 송재성宋在晟의 묘표墓表를 받아 1960년에 발간하였다.만주사晩洲祠는 일곡동 514번지(소해로 11)에 위치하며 1959년 광주노씨 문중에서 건립하였다. 건물의 형태는 3단의 화강석 기단을 쌓고 정평주초를 놓아 원주의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현판은 윤희상尹喜祥이 썼다.창호는 들어열개의 4분합문이며 내부의 천정은 단청이 잘되어 있고 굴도리를 올린 2고주 3량가 집이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지붕은 골기와 맞배지붕이다. 창호중앙에는 태극 청판을 부착했고 좌우측에 소슬대문이 나있으며 흙석 혼합의 담장이 둘러져 있다.경내에 소해정은 만주사 강당으로 경의재景義齋라고 개칭하여 오늘날만주사 경의재로 사용하고 있다. 만주사묘정비晩洲祠廟庭碑는 1984년10월 광주노씨 문중에서 건립하였으며 규모는 높이 275c㎝, 폭 57cm, 두께 27cm이다. 이 밖에 농암정이 사당 옆에 있다.일곡동 내 ‘소해로’라는 도로 이름은 그의 호를 도로명으로 지정한 것이다.출전 소해유고, 광주읍지, 북구 역사인물, 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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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해松海 노문규盧汶奎<독립운동가>
    항일 독립투쟁의 우국지사 송해松海 노문규盧汶奎
     노문규(1850~1935)는 조선 말기 일제강점기의 유학자. 자는 응삼應三.호는 송해松海. 본관은 광주. 노계열盧啓悅의 아들로 광주 북구 일곡동출신이다.간제艮齋 전우田愚와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등과 교유한 그는 젊은시절 『사서오경』과 『사기』에 능통하여 향시에는 여러번 합격하였으나,과거시험에 급제하려고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그러나 아버지의 효행을 세상에 알려 정려를 받고 증직을 받는 데는 성공했다. 1892년에 부친의 효행 사실이 조정으로부터 ‘조봉대부동몽교관’으로 증직 정려를 받아 일곡동 361번지에 정려각을 건립하였다. 정려각은년구퇴락年久退落되어 훼철毁撤하고, 1963년 그곳에 유허비遺墟碑를 건립하였다.그는 향교에서 유사를 맡은 여러 해 동안에 읍강을 진흥하고, 향약을만들어서 54세 때인 1903년 전남 관찰부 광주부 주사(7급)에 임명되어1905년 전남 관찰부 광주부에서 승훈랑承訓郞(六品)으로 승진했다. 그는시사時事가 날로 좋지 않음을 보고 진취하는데 뜻을 두지 않고 사직하려하니 도백이 만류하였고, 영암군수를 맡기려 하자 기어이 사직하였다.1905~1910년 사이에 전개된 애국계몽단체인 대한협회 광주지회 회원54명 중 교육부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경술국치를 슬퍼하여 항일 독립 투쟁을 전개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7년 옥고를 치른 당시의 우국지사였다.그가 당시 어지러운 세태를 비관하여 자신의 종적을 숨기기 위해 농가로 돌아와 지냈던 휴양처인 송해당松海堂이 북구 일곡로41번길 26에 자리 잡고 있다. ‘송해’라는 의미는 그의 뜻이 솔처럼 곧고 그의 마음이 바다처럼 넓다는 뜻으로 붙인 것이다. 송해당은 현재 민가로 사용되고 있으며주초 위에 사각기둥을 세운 정면 4칸, 측면 2칸의 평기와 지붕으로 되어있다. 건물 정면에는 송해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기둥마다 판각 주련柱聯이 부착되어 있으며 당내에는 40여 개에 달하는 당시 유림들의 찬미 시문이 편액 되어있다.또한 일곡동의 도로이름 가운데 ‘송해로’가 있는데 이는 그의 호를 딴 것이다. 송해는 그가 살던 집인 ‘송해당’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는데 일곡동 361번지의 2가 송해당 자리이다. 이 집은 1906년 그의 나이 56세 때중건한 것이다.1924년 장성 고산서원의 담대헌 중건 때 20냥을 성금으로 내놓았었다.1935년 5월 6일 풍질風疾로 병사한 후에 담양 수북 삼각산에 장사했다.저서로『송해유집』 4권 1책이 석인본으로 되어있다. 1960년 국역으로간행되었으며, 서문은 고연주高淵柱, 행장은 1938년 이범석李範錫, 묘표는 이병관李炳觀이 썼다. 1권에는 시 70여 수, 「복록수부福祿壽賦」,「승평성세부昇平聖世賦」, 「성학군덕부聖學君德賦」와 「공부자찬孔夫子贊」이 있으며, 2권에는 잡저雜著로 마지막에 「금융상황金融狀況」을 기록하였으며, 3권은 제문祭文, 행장, 4권은 부록, 부편附編이 들어있다.2022년 12월 9일 이 유적의 사진을 촬영차 현지를 방문하여 확인한 바이 부지에 새로운 건축물을 짓고 있었다. 기존의 건물과 노계열의 정려 유허비도 없었다. 현장 사진을 뒷면에 남긴다.출전 송해유집, 승정원일기, 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 북구 역사인물.-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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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가 김덕순金德順<독립운동가>
    광주의 3·1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 김덕순金德順
      김덕순(1901~1984)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광산. 광주 북구 본촌동 출신이다. 1919년 3월 10일 전남 광주군 광주면의 3·1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6일 김복현金福鉉, 김강金剛, 서정희徐廷禧 등은 숭일학교 교사 최병준崔丙浚, 수피아여학교 교사 박애순朴愛順등과 3월 10일 광주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결행하기로 계획하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등 사전 준비를 하였다.3월 10일 오후 3시경 광주교 아래 강둑 소牛 시장에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불렀다. 양림동 방면에서는 기독교인,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광주천을 따라 내려왔고 서문 거리로 많은 시민이 몰려오고 농업학교 학생들과 군중은 북문 방면에서 모여들었다. 또 지산면 쪽에서는 수백 명의 농민이 달려왔다. 이렇게 모여드는군중을 상대로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고,시위군중은 태극기를 휘날리고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장을 출발하였다. 이들은 서문통西門通을 지나 우체국을 돌아 본정통本町通을 행진하는 등 광주 시내의 중요한 거리를 누비며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시위에 참여하였던 수피아여학교 학생 김덕순은 체포되어 1919년 4월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독립선언서 등 독립의 취지를 기재한 격문, 독립가獨立歌 등 태극기 한 가마를 광주 생도들에게 배포하고 수천의 군중과 함께 광주천변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르면서 시내를 행진하였다는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현충 시설로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256(광주 수피아여자중·고등학교내)에 1919. 3. 10. 광주 3·10만세운동에 앞장서서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경찰에 끌려가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른 2명의 교사와 21명의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의 애국정신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수피아 총동창회에서 모금액 2천만원과 광주광역시 지원금 4천만원을 들여 1995. 5. 10. 동상을 건립하였습니다. - 교사 -朴愛順, 陳信愛- 학생 -洪順南, 朴永子, 崔敬愛, 楊泰元, 金弼浩, 林眞實, 高連紅,朴聖淳, 河永子, 康華善, 李羅血, 崔秀香, 李泰玉, 金良順,梁順喜, 尹血女, 金德順, 曺玉嬉, 李奉錦, 金安淳, 洪承愛,출전 광주시사, 판결문, 한국독립운동사.-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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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병장 김동수金東洙<독립운동가>
    가을이슬처럼 위엄이 있었던 한말 전남 의병장 "의병장 김동수金東洙"
      김동수(1879~1910)는 한말 의병장. 본관은 김해. 광주목 경양면 병문동(현 북구 우산동 283)에서 태어났으며 처가댁인 중흥동 84-3번지에서 살기도 했다(후손 김홍두 증언).포목상과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는 한말의 망국과정을 지켜보면서 의분을 품고 살다가 1906년에 27세의 나이로 대한제국 군대에 입대하였다. 언변이 좋고 뜻이 강해 얼마 되지 않아 사관士官으로 승진했는데 따르는 사졸이 아주 많았다. 그런데 이듬해 1907년에 고종 황제가 강제퇴위하고 군대마저 해산되었다. 하늘을 쳐다보며 통곡하고 지내다가 고향으로 돌아와왜군을 물리치기로 마음을 먹었다.결국 의병을 주도한 전남의병이 도처에서 봉기하자 1907년 광주에서 조경환曺京煥, 양상기梁相基 등과 함께 거의하여 활동하고, 1908년 7월에는 이웃 마을 출신으로 의병을 일으킨 양진여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12월25일 5~6명의 부하들을 인솔하고 면장 집에 60원을 요구하였으나 돈이없다고 거절당하자 그를 구타하고 그로부터 짚신 50켤레를 가지고 왔다.의병장 김동수와 그 예하부대들의 활동을 일제 측 기록인 전남폭도사와의병항쟁 재판 기록에서 발췌하여 날짜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그는 1909년 화순에서 독립부대를 편성하여 광주, 담양, 장성 등지에서일제 군경과 친일파를 응징하였다. 그의 의병부대는 65명으로 편성되었고, 부관 이기섭李基燮은 서방면 모른거리毛弄里 출신이며, 선전병 선덕현宣德玄은 서방면 시네굴溪川里 출신이고, 도포사 임윤팔林允八, 임윤오林允五 형제는 오치면 외촌 출신이며, 도십장 김재민金在珉은 천곡면봉산리 출신이었고, 대원隊員 양동골梁東骨은 서방면 솟대거리孝竹里 출신이며, 백학선白學善은 모른거리 출신이고, 그리고 박포대朴砲大는 신나굴 출신이었다.1909년 1월 12일에 광주군의 이장집에 들어가 총기로 위협하면서 20원을 강요하였으나 돈이 없어 백목 2필을 가져왔고 2월 하순에는 광주 오치동의 동장집에 들어가 현금 20원과 백목 10필을 강요했으나 거절당하고백목 3필만 가져왔다. 2월 30일부터 15명과 함께 총기를 들고 5월까지 광주, 화순, 담양, 창평, 장성 등지를 횡행했다.1909년 3월 15일에 동장집에 들어가 백목 4필을 빼앗았으며, 20일에는장성군에 사는 최봉근 집에 2명과 함께 들어가 군도 1자루를 빼앗았다. 3월 23일에는 광주군 동장집에 들어가 현금 5원을 억지로 빼앗았으며 29일까지 광주를 무대로 계속 활동했다.또한 4월 1일부터 4월 29일까지 7차례에 걸쳐 현금과 백목을 억지로 빼앗고, 순사대와 교전으로 인해 3명의 전사자와 총 9정을 빼앗기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특히 5월 19일에 광주시 유덕동에서 광주분견소 고요오 상등병 일행이 그가 이끄는 약 50명의 의병을 공격하여 14명을 죽이고 화승총 10정을 빼앗아 갔고, 31일에 광주경찰서 순사부장 외 11명이 광주시 본촌동김영조 집을 포위하여 4명을 죽이고 의병장 김동수를 부상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6월에는 그의 부하 십 수명과 함께 선도면 동산동으로 이동했는데 이를안 일본 경찰은 5일에 공격하여 3명을 죽이고 말았다. 그는 상대곡면 분토동 석양오 집에 은신하고 있는데 15일에 경찰이 급습했으나 도주하여 갑마보면 동촌, 천곡면 봉산리 등지를 전전하며 잠입 생활에 들어갔다.7월에는 27일 경찰의 봉산리 수색으로 중군장 송자화宋子化와 도십장都十長 김봉래金鳳來(23세), 조경환曺京煥의 좌익장左翌將이었던 이원오李元午(33세), 동복군 외서면 영신동에 사는 하응방河應方(18세)이 체포당하고 말았다.8월 25일에는 그의 부장副將 김모金某 등 8명을 일본 경찰이 광주군 석제면에서 발견하여 30분간 교전한 결과 3명을 죽이고 2명을 부상 입히고군기를 노획해갔다. 이제 김동수 의병진은 괘멸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그러다가 9월에 장성 사창社倉 전투에서 그는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한국독립운동사자료』16권의 「10월중 폭도상황월보」를 보면 “이제 남은 것은 김영백金永伯, 양상기梁相基, 장인상張仁尙, 이덕삼李德三, 강승우姜勝宇, 김동수金東洙, 정대홍鄭大洪, 정대인鄭大仁 등 수인에 불과하나 답답히 소식이 없고 어디론가 잠복하였다.”고 하여 10월까지 김동수는 체포되지 않고 활동하고 있었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7권의 「1910년 1월분 폭도상황월보」를보면, “본월 7일 수괴 김동수는 충청북도에서 그곳 수비대로부터 파견한수색대에 체포되어 관내에 행동한 의병장은 한명도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1910년 1월 7일에 충청북도에서 그곳 수비대가 파견한 수색대에체포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가 광주를 떠나 멀리 충청도로 피신한 셈이다. 그래서 그는 공주지법 재판소 청주지청에서 통감부 판사 전중형田中亨에 의해 징역 15년 형을 받고 복역 중 옥중에서 죽어가면서도 왜놈을꾸짖었고, 꾸짖는 소리가 가을 이슬과 같았다고 한다. 그의 부하들도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 되었는데, 선전병 선덕현은 10년 형을 언도 받았고,도포사 임윤팔과 도집장 김재민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1910년 옥중에서장렬히 순직하였다.김태진 전남대 교수에 의해 『김동수 의병실록』이 1986년 간행되고, 1995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출전 김동수 의병실기, 북구 역사인물, 광주시사, 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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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월隱月 정재요鄭在堯<효자,열부>
    부친상 3년의 시묘살이에 병을 얻어 순절한 은월隱月 정재요鄭在堯
     정재요(1838~1877)는 조선 말기의 효자. 호는 은월隱月. 본관은 하동.광주 북구 양산동 출신으로 정윤길鄭潤吉의 증손자이다.문예文藝가 뛰어나고 당대 명필로 꼽혔다. 특히 가풍을 이어받아 천품이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 섬기기를 잘하였다. 부친상을 당하여3년을 슬픔을 참지 못하고 3년간 지극 정성으로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로인하여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이에 밀양 박씨가 남편을 구하려 백방으로노력했으나 임종에 이르러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여 3일을 연명케한 후 부인도 같이 세상을 떴다고 한다. 이에 1895년 조정에서 정재요와 박씨에게정려를 명하며, 정재요에게는 증조봉대부동몽교관朝奉大夫童蒙敎官이라는 벼슬을, 박씨에게는 열여烈女라는 칭호를 내렸다. 아들 정병현鄭丙鉉이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에게 하동정씨이효일정려기河東鄭氏二孝一烈㫌閭記를 받아 1905년 정려를 건립하였다.저서로 기행문인 『설금록雪金錄』과 시문 300수가 담긴 『은월유고隱月遺稿』를 남겼다.양산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정려각 인접지가 높아져서 침수가 우려되어2005년 하동정씨 정려각을 양산동 137번지로 합해 복원키로 하고 증효자성균진사통훈대부사헌부지평정윤길지려贈孝子成均進士通訓大夫司憲府地平鄭潤吉之閭는 본래 1859년(철종 9) 명정命旌되어 그해 효자정려를 양산동 110번지에 세웠는데 당초 목조와가 소슬대문으로 삼호정과 만석재 대문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증효자조봉대부동몽교관지여贈孝子朝奉大夫童蒙敎官之閭와 열녀정재요처숙부인밀성박씨지려烈女鄭在堯妻淑夫人密城朴氏之閭을 합하여 하동정씨이효일열정려각河東鄭氏二孝一烈旌閭閣을 중건하였다.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북구 문화유적, 은월유고, 하동정씨 절효문 요람.-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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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월당松月堂 정윤길鄭潤吉<효자,열부>
    정조 때 76세의 나이로 ‘어고방’에 이름을 올린 “송월당松月堂 정윤길鄭潤吉”
      정윤길(1723~1804)은 조선 후기의 문신 효자. 자는 군경君慶. 호는 송월당松月堂. 본관은 하동. 광주 북구 오치동 출신인데 양산동으로 옮겨 살았다.1773년(영조 49)에 진사 시험에 합격했는데 그의 나이 51세가 되던 해였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뒤인 1797년(정조 21) 정조는 책 몇 권을 광주에 보내 전라도 선비들에게 교정을 보도록 하명했다. 정윤길도 이 교정에 참여했다. 이듬해 정조는 광주목사 서형수에게 지시해 광주에서 과거시험을 개최하도록 했다. 응시자는 1년 전 자신의 지시로 교열에 참여했다가 실력을 인정받은 선비들로 제한했다. 정윤길도 1년 전 교정에서 실력을인정받았던 터라 이 시험의 응시자격을 얻었다.시험은 당시 광주객사인 광산관 앞뜰에서 열렸다. 현재의 충장로 1가 일대다. 시험은 총 3일 동안 치렀고 과목은 다섯 종류였는데 첫날은 시詩, 둘째 날은 부賦·전箋·의義, 셋째 날은 책策이었다. 응시자는 그 가운데서 세과목을 골라 답안지를 작성하면 됐다. 이 시험에는 모두 53명이 합격했다.과거시험 합격자 명단을 과방科榜 또는 금방金榜 혹은 이들을 줄여서그냥 ‘방’이나 ‘방목’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시험의 합격자 명단은 정조 임금이 직접 검토하고 결재했다고 하여 어고방御考榜 또는 어고방목御考榜目이라고 했다. 이 방목은 총 53명의 합격자들의 간단한 인적사항, 과목별석차, 종합 석차를 일일이 열거해 쓴 탓에 길이가 무려 28미터에 이른다.방목에는 정윤길의 이름도 나온다. 그는 ‘부’과목에서 삼중三中, ‘책초策草-책 과목의 시험답안을 초서로 쓴 것’에서 삼하三下의 점수를 받았다. 그리고 합격의 특전으로 그는 ‘급분給分’을 받았다. 급분이란 시험에서 얻는점수로 이것이 누적되어 일정한 점수가 되면 통상적으로 과거시험의 1차관문인 초시를 건너뛰어 바로 2차 시험인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가졌다(2차 시험을 통과하더라도 최종 3차 시험인 전시를 통과해야만 대과에 최종급제했다).  그러나 이 시험에 합격할 당시 정윤길의 나이는 이미 76세였다(당시 합격자 중 최고령자는 78세였다), 이런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는 더 이상과거시험에 나서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이 시험과 관련정려된 기록과 정윤길의 유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그가 남긴 당시의과거시험지 등 유품은 1798년 광주에서 실시된 특별시험을 실증적으로보여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한편 1879년에 간행된 『광주읍지』재학才學 편에는 정윤길에 대해 문장이 아름답고 효행이 남달랐으며 임금의 은혜를 입어 증직으로 지평이란 벼슬을 받았다는 사실을 소개하고있다.  이와 관련해 양산동 양지 마을에는 정윤길의 정려가 전한다. 이 정려는1859년(철종 10) 사림들의 상소로 조정에서 사헌부 지평을 증직하고 정려하도록 명하여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유집으로 농서 1권, 송월당집 2권이 있다.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북구 문화유적, 효행열지, 하동정씨 절효문 요람.-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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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약포藥圃 정오도鄭吾道 <효자,열부>
    향리의 문화발전에 힘쓴 효자 약포 선생 “약포藥圃 정오도鄭吾道”
     정오도(1647—1736)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 자는 일관一貫. 호는 약포藥圃. 본관은 하동. 광주 오치동梧峙洞 집에서 아버지 증승정원좌승지贈承政院左承旨 석현碩賢과 어머니 문화 유씨의 아들로 태어났다.일찍부터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성리학性理學에 밝았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 김수항金壽恒 등이 유배되고 성혼成揮, 이이李珥 등이 추출됨을 보고 이에 대한 부당함을 상소하였고, 인현왕후의 복위를 상소하기도 하였다. 그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향리에 돌아와 동계洞契를 창설하고 향약鄕約을 제정하는 등 향리의 문화발전에 힘썼다.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과 시문으로 일상을 보냈으며, 특히 어버이 병환에 이상한 풀이 정원에 나서 의원에게 물어 궁귀탕芎歸湯에 속한 약초임을 알고 달여서 복용하니 치료가 되어 향리에서는 효성이 지극하여 하늘이 약초藥草를 나게 하였다고칭송하고, 스승인 우암께서 동리약포東里藥圃 4자를 써서 편액을 하니 약포 선생이라 칭하며 그의 호號가 되었다 한다.  그의 셋째 아들 대중岱重으로 인하여 1710년(숙종 36) 첨지중추부사에제수되고, 1712년(숙종 38) 오치 서편 동정산洞庭山(현. 광주 매곡동) 계곡에 파취정把翠亭을 짓고 그곳에서 시부詩賦를 노래하면서 여생을 보냈다.사후에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에 추증追贈되었다.1859년(철종 10) 광주의 지산사芝山祠에 제향되고, 1905년(고종 42)에화담사花潭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약포집藥圃集은 1804년(純祖4) 그의 현손인 정동진鄭東璡이수집 간행하였고, 중간본重刊本은 1905년 6대손인 정재순鄭在舜이 증보간행하였다. 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북구 문화유적, 약포집, 화담사지.-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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