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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천竹川 범기생范起生<충신,의병>
    진주성 싸움에서 마지막까지 고군분투한 의병장 “죽천竹川 범기생范起生”
      범기생(1553~1593)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자는 원보元甫. 호는 죽천竹川. 본관은 금성. 고려 말의 충신이자 학자인 문충공文忠公 복애伏崖 범세동范世東의 9세손으로, 광주광역시 북구 생룡동에서 부친 범홍로范弘老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타고난 지혜와 용기가 매우 뛰어났으며, 절의를 지킨충신 집안에서 자란 덕분에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의로운 일에 앞장서는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자라서는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성리학을 배웠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탄 변사정의 편지를 받고 의병 참여를 결심한 그는 광주에서 수백 명의 의병을 규합해 나주에 의병청을 설치한 김천일을 찾아갔다. 여기서 의병의 기율을 세우고 훈련을 맡았다. 김천일 의병이 수원까지 진출하자 그는 단신으로 한양에 들어가 왜적의 진지를 염탐하고 5일 만에 돌아와 한양 공략이 어려울 것이라고 보고했다. 강화도로 진을 옮기자 그는 어선을 개조하고 왜적의 선박을 나포해단시간에 400여 척의 병선을 구축했다. 1592년 9월 9일 이를 이끌고 나가한강 양회진에서 대승을 거뒀다. 그 후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최경회崔慶會, 고종후高從厚 등의의병장들과 경상도‧전라도 등지에서 왜군을 물리치는 데 많은 공훈을웠다.  1593년 4월 18일 한양에서 철수하는 왜적을 쫓으며 배 위에서 “한산 달에 칼을 씻고 한수 바람에 배를 매니 장부로서 적을 쫓는 일이 마음에 가득하다.”는 시를 남겼다. 6월 14일 함안에 도달한 범기생은 진주성 입성을결심하며 “천리를 행군하여 진양(진주)으로 들어가니 성에 가득한 달빛에갑옷마저 차도다. 함께 온 장병들의 충의가 가득 차니 동남의 아무리 강한적인들 두려울 것 있으랴.”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1593년 6월에는 왜군이 대군을 거느리고 진주성을 공격하자, 조정에서는 도원사都元師 김명원金明元과 전라도순찰사 권율 등을 의령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왜군의 숫자와 기세에 눌려 더 이상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그리고 충청도병마절도사 황진黃進과 6만명진주 백성들은 힘을 합쳐 왜군을 물리치다 결국 역부족으로 패하고 말았다. 이때 그는동생 범기봉과 함께 임진왜란최대 격전지인 진주성 싸움에참가하여 치열하게 싸우다가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등의의병장들과 함께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5년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녹훈되었다.광주 북구 생룡동에 있는 복룡사伏龍祠에 동생 기봉과 함께 배향되었다. 복룡사는 그의 선조 범세동을 주벽으로 하고 범세동의 6세손 범가용范可容과 학생으로 이름난 범천배范天培가 배향되어 있던 곳이다.1868년(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됨에 따라 그 후손들이 복룡사伏龍祠 터에 용호재龍湖齋를 창건하고 복애 범세동의 사적을기록한 유허비를 세우게 되었다.그의 출생지인 광주광역시 생룡동에 사림들이 순의숭모비殉義崇慕碑를 세웠다.출전 호남절의록, 광주읍지, 광주시사, 조선명신록, 북구 역사인물, 광주의 문화유적,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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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조참판兵曹參判 노윤발盧潤發<충신,의병>
    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이기고 산화한 “병조참판兵曹參判 노윤발盧潤發”
      노윤발(?~1598)은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시화是華. 본관은 광주. 선전관 대방大邦의 아들로 고흥 출신인데 광주 북구 일곡동 절효사에 배향되어 북구 인물로 선정하였다.1585년 무과에 올라 1592년 임진왜란 때 주부로서 이순신 장군 막하에들어가 군관軍官으로 1592년 당포해전에 참여 적의 병선 21척을 모조리불태우는 전과를 올렸다.1594년 2월 1일 그는 이경복李景福, 윤백년尹百年 등과 함께 도망군을싣고 뭍으로 옮겨가는 배 여덟 척을 진영으로 붙잡아 왔다.1594년 7월 2일 그는 흥양(고흥) 군관 이심李深 및 병선색리兵船色吏,괄군색리括軍色吏 등을 붙잡아 오도록 군령을 받고 흥양에 가서 이들을잡아 1594년 7월 26일 흥양의 색리와 감관監官을 붙잡아서 본영으로 들어왔다.1595년 4월 29일 그는 군사의 식용으로 미역 99동을 따가지고 진영으로 돌아왔다.1595년 7월 4일 진영의 군관들은 내기로 환각궁을 쏘았는데 그가 으뜸이었다.1596년 2월 30일 저녁에 송희립宋希立, 노윤발盧潤發, 이원룡李元龍등이 술을 가지고 들어 왔다. 이순신은 몸이 몹시 불편하여 밤새도록 식은땀을 흘렸다.  이상은 충무공의 난중일기에 기록된 자료이다. 1598년 노량해전은 임진왜란최후의 대규모 해전으로 이순신이 전사한 마지막 싸움이었다.1597년 명량해전에서 크게 패배한 일본은 11월 왜장 고니시 등이이끄는 500여 척의 왜선이 노량수로와 외교 등지에서 공격해 왔다. 200여 척의 배밖에 보유하지못했던 이 전투에서 200여 척의일본 수군이 격파되고 패잔선 50여 척만이 관음포 방면으로 달아났다. 이순신은 도주하는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을 격파하여 포위되었던 명의 장수인 진린을 구하고 적을 추격하다가 왜적의 흉탄에 맞고 전사하였다. 그는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전투에서 크게 이기고 전사하였다. 1605년 선무 원종공신 3등에 기록되고,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뒤에 광주의 절효사에 배향되었다.출전 호남절의록, 광주읍지, 절효사지, 북구 문화유적, 난중일기, 충무공 전서.-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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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재晦齋 노희서盧希瑞<충신,의병>
    임진왜란때 금산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한 의병 회재晦齋 노희서盧希瑞
     노희서(1558~1592)는 임진왜란 때 의병 무관. 자는 명옥鳴玉. 호는 회재晦齋. 초명은 성필成弼. 본관은 광주. 절효공 노준공의 후손으로 참봉흔동欣東의 아들로 광주 일곡동 출신이다. 일찍이 학문을 성취하고 궁마에 뛰어나 무과에 급제하고 병절교위을 역임한 후 낙향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 의병군의 일원으로 금산전투에 참여 칼을 휘두르며 돌격전을 수행하여 수 십 명의 적을 참살하니 적은 조금 후퇴 하였다. 얼마 있다가 또다시 많은 적이 벌때처럼 다가와서 그를 여러 겹으로 포위하니 총칼로 싸우는 그 속에 단도 만을 지닌 그는 마침내 군중에서 고경명 부자와 함께 장렬히 순절하였다. 때는 1592년7월 10일 그의 나이 35세였다. 시신을 수습할 수 없어 초혼장으로 안장했다. 그의 충견이 금산까지 따라가 주인의 담배쌈지를 입에 물고 돌아왔다는 일화가 있다. 난이 끝나고 1605년에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뒤에 금산 칠백의총 종용사와 일곡동 절효사에 배향되었다. 회재공파 후손들은 1972년 일곡동에 감모재感慕齋를 건립하였다. 재실의 규모는 3층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맨 위층을 재실로 이용하고 있다.재실 경내에는 증가선대부병조참판회재광산노공순충비가 세워져 있다.贈嘉善大夫兵曹參判嗨齊光山盧公殉忠碑盧氏東方巨閥也其上祖諱蔓位高麗政丞封光山君一世而尙書二世而平章七世連登槐撰三毘李同占桂榜而文科政堂文學諱門錫文科進賢館大提學間鳥堂詢諱有幹密眞司事諱士淸節孝公諱後恭,文科司成式齊諱光利黼黻王庭柯則士林郡守諱珪縣今諱仲崙判尹諱漢經文科都事諱秀菊克承祖武流芳百祀參判晦齊諱希瑞 宣廟龍蛇之亂與高忠烈公同殉錦山文烈公健齊金先生啓聞于上贈兵曹參判墓在光州日谷文燈子坐諱大龍墓俱在草場洞子坐原各配位墓或合窆或雙瑩連世墳墓龜頭烏石之表比比有之焉今辛亥小春門議齊發將謨壁碑於參判公感慕齋附近地豈可無膽望追遠之思乎噫樵收之所當戌犯而遠近人士之行過是道者一見知其爲吾盧氏之先塋也栽后孫佑變奉其門中長老之命徵余文焉歲重光大淵獻黃鍾月上澣 參判公後孫 文永謹書辛亥(1971). 11.출전 호남절의록, 광주읍지, 절효사지, 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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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충신,의병>
    무등산의 익호장군 충용군 조선 의병의 총수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
     김덕령(1568. 선조 원년~1596. 선조 29)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자는 경수景樹.시호는 충장공忠壯公. 본관은 광산. 아버지 김붕변金鵬變과 어머니 남평반씨의 3남 3여 중의 둘째 아들로 광주 충효동石底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종조인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로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17세에 향해鄕解(초시)에 합격하고, 18세 때 담양에 사는 흥양이씨 부인과 혼인하였다.20세에 형 김덕홍金德弘과 함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월 형 덕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의 막하에 참여하여 전주에 이르렀을 때 형이 너는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권고에 따라 고향에 돌아와 무등산에서 무예를 닦고 주검동鑄劒洞에서 무기를 만들어 전쟁터로 보급하는 등 후방에서 지원활동을 하였다.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대패함에 따라 조정에서호남에서 유능한 장수를 뽑아 경상도로 보내기로 하여, 어머니 상중에 있는 김덕령을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과 장성현감 이귀李貴가 추천하고,전라도순찰사 이정암(李廷馣 1541~1600)의 조정에 천거가 있은 뒤, 12월27일 분조인 전주 무과 시험장에서 수많은 수험생들 앞에서 무예 시범을보임으로써 국가와 백성들이 인정하는 장수가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곧바로 세자(광해군)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군호를 받고 왕(선조)으로부터 충용군忠勇軍이란 호칭을 받게 된다. 1594년 1월 22일 담양을 출발하여 남원에 도착하여 남원사람 최담령崔聃齡을 별장으로 삼고, 군사훈련을 시킨 다음, 함양, 산청을 거쳐 4월 초진주 대곡면 대곡리에 도착하여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이때 조정에서는 작전상의 통솔과 군량 조달 문제로 각처의 의병을 혁파하여 충용군에 통합함에 따라 조선의병의 총수가 된다. 이로써 의병장이 되어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영남 서부 지역의 방어 임무를 맡았다. 왜적의 전라도 침입을 막기 위해 진해, 고성 사이에 주둔하며 적과 대치했으나, 이때 강화 회담이 진행 중이어서 별다른 전투 상황도 없고 군량도부족해 예하 3,000여 명 가운데 호남 출신 500여 명만 남기고 모두 귀농시켰다. 그해 10월 거제도의 왜적을 수륙 양면으로 공격할 때 선봉장으로활약해 적을 크게 무찔렀다.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왜적을 기습, 격퇴하였다.그 뒤 진주에 둔전을 설치하는 등 장기전에 대비해 출전의 채비를 갖추었지만, 강화의 추진으로 출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울화가생겨 과음하고 군법을 엄하게 해 막료, 군졸 간에 불평의 소리가 높았고,조정에서도 실망한 나머지 그에 대한 논의가 빈번히 제기되었다.1595년 12월, 김덕령은 엄격한 군율 적용하여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복을 장살한 살인죄로 체포 구금되지만, 영남 유생들의 상소와 정탁鄭琢의 변호로 무고가 드러나 왕의 특명으로 이듬해 2월 말 석방된다.1596년 7월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원수 권율의 명을 받아 진주에서 운봉까지 진군했다가, 이미 난이 평정되었다는소식을 듣고 광주로 돌아가려 했으나 허락받지 못해 진주로 돌아왔다.이때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체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과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무고로 최담년, 곽재우, 고언백高彦伯, 홍계남洪季男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에 정탁, 김응남金應南 등이 무고를 힘써 변명했으나 20일 동안에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1596년 8월 2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당시 장군의 나이는 겨우 29세였다.  장군이 죽기 직전 옥중 생활의 심정을 한탄하면서 ‘춘산모퉁이’를 노래했는데 현대어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춘산에 불이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의 내 없는 불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이 시조는 억울한 누명을 내(연기) 없는 불에 비유해 산불은 끌 수 있으나 자기의 몸속에 붙어 타오르고 있는 억울한 마음의 불은 끌 수 없음을비유하여 한탄하는 의기가라 하겠다. 그는 체구가 작지만 날래고 민첩하며 신용神勇이 있어, 용력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다. 1661년(현종 2)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숙종 4)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681년(숙종 7)에 다시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1710년에 봉사손인 김수신金守信도 녹용 되었다. 1785년(정조 9) 충장忠壯이란시호諡號가 내려지고, 3년 뒤인 1788년(정조 12) 의정부 좌참찬에 추증되고 ‘정려와 충효리 표리비’를 하사하고, 부조특명不祧特命: 국가에 공훈이 있는 인물의 신주를 영구히 사당에 제사 지내게 하던 특전이 내려졌다.1789년(정조 13) 또다시 종1품 관직인 좌찬성左贊成에 가증되었다.1678년(숙종 4) 광주의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 되었으며, 1680년에의열사義烈祠로 사액 되었다. 이 사우는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975년 2월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1023(광주광역시 북구 송강로 13)에 충장사로 복원하여 건립하였다. 경내에는 김덕령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사우 충장사, 동재와 서재, 은륜비각과 해설비, 유물관, 충용문, 익호문등이 세워져 있다. 유물관에는 중요민속자료 제111호로 지정된 <김덕령장군> 의복과 장군의 묘에서 출토된 관곽, 친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사당뒤쪽 언덕에는 김덕령의 묘와 묘비가 있으며 가족묘도 조성되어 있다.출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북구 역사인물, 조선왕조실록, 광주읍지, 충장공 유사.-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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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암省菴 김덕홍金德弘<충신,의병>
    김덕령 장군의 형으로 의병에 참전하여 순절한 “성암省菴 김덕홍金德弘”
      김덕홍(1558~1592)은 조선 중기의 의병장. 호는 성암省菴. 본관은 광산.붕변鵬變의 아들로 광주 북구 충효동 성안 마을 출신이다.아우 덕령德齡과 매형 김응회와 함께 우계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덕령과 덕보德普 두 동생과 함께 어머니를 모셨는데 형제간에 우애가 지극하였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의의 뜻을 가지고 어머니께 고하고 덕령과 함께의병을 불러 모아 전주에 이르렀을 때 적세가 매우 성함을 보고 금산으로 진격하기 전 덕령에게 말하기를 “노모가 집에 계시는데 아우만이 혼자 있으니 우리 형제가 모두 나선다면 어머님을 보호할 사람이 없게 되니, 나는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이니 너는 돌아가서 어머님을 봉양하여라.”라고 당부하였다.동생을 돌려보내고 초토사 고경명의 군인으로 돌아가 그해 7월 10일 제1차 금산성 전투에서 곽영의 관군과 합세,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기로 하고 800여 명의 정예부대로 선제공격을 했다. 그는 와은평臥隱坪 일대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왜군과 싸우던 중 고경명은말에서 떨어졌다. 바로 안녕과 유팽로가 말에서 내려와 그를 부축했지만뒤쫓아 온 일본군의 칼에 베어 모두 죽었다. 그도 역시 의병들과 함께 싸우다 전사하였다.  1785년(정조 9) 지평持平으로 증직하고 광주 의열사에 배향하였다.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제봉집.-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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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암義菴 김기명金基命<충신,의병>
    평양성 탈환에 큰 공을 세운 임란 의병장 “의암義菴 김기명金基命”
        김기명(1540~1593)은 조선 중기의 무신·의병장. 자는 응여應汝. 호는 의암義菴. 본관은 광산. 광주 북구 본촌동 옛 부동釜洞에서 참봉 김광헌金光憲과 광산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 함경도 희천군수로 재임하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임금이 도성을 떠나 의주로 피란하던 때, 희천에서 의병 천여명을모집하여 평양성으로 진격하여 왜적을 공격하여 평양성 탈환에 전공을세웠다.1593년 2월 권율도원수를 도와 행주대첩 전투에 참전해 큰 공을 세웠다. 1593년 6월경 진주성이 위태롭다는 소식을 듣고 김천일 장군의 막하로 성 안으로 들어가 부대장으로 적과 싸웠으나 우세한 왜군의 군세에 밀려 패전이 불가피했다. 이때 최경회, 고종후, 황진 등과 끝까지 싸우다가함락 직전에 성 아래의 남강에 투신해 순직했다. 그의 나이 54세 때였다.1605년 조정에서는 그를 선무원종공신 3등에 녹선 되고, 1623년에는오위도총부경력五衛都摠府經歷을 추증했다. 현재는 진주성내 창열사와충남 보령 호국사에 각각 그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이곳의 충의비는 임진왜란 때 국난을 극복한 희천군수 김기명의 숭고한 충절을 높이 기리기 위하여 1961년 광산김씨 문중에 의해 광주광역시 북구 본촌동 378-1번지(건국동사무소)에 세워졌다. 비의 규모는 높이180cm, 폭 66cm 두께 33cm이다.2004년 10월 아름다운 마을 만들기 사업으로 그의 후손과 건국동 주민자치위원회가 주관이 되어 장군의 의기와 충절을 만대에 전하고자 낡은담장을 허물고 새롭게 주변을 단장하게 되었다. 당시 명문장가인 춘광 노문영 선생은 장군의 충절을 “만약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백성을배반한 자가 이 비를 쳐다본다면 두려움에 떨려 등에 식은땀이 흐를 것이다.”라고비문에 표현하여 극찬한 바있다.출전 김기명실기,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북구 문화유적, 호남절의록-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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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은棄隱 기의헌奇義獻<충신,의병>
    정의 정신의 표상 “기은棄隱 기의헌奇義獻”
     기의헌(1587~1653)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의병. 자는 사직士直. 호는 기은棄隱. 본관은 행주幸州. 아버지는 부사과로 이조참의에 추증된 효분孝芬과 어머니 함평이씨咸平李氏의 아들로 광주 소고룡면 고룡리(현. 임곡면 고룡동)에서 태어났다.그는 태어날 때부터 복재 기준의 절의정신과 고봉의 학문적 유훈을 안고 성장하여 경서經書에 조예가 깊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숙부叔父인곡성현감 기효전奇孝筌의 댁에서 자랐다. 25세 되던 1612년에 광주 조씨廣州趙氏 조지기趙之麒 세 딸 중 장녀와 혼인을 하고 처가 동네인 광주우치면 우점리(현. 광주 북구 효령동 종방 마을)로 장모인 의령 남씨의 재산 관리를 위해 이주하였다.1627년(인조 5) 강홍립姜弘立 한윤韓潤이 청나라 군사를 인도하여 침입해 오자 거의도유사擧義都有司가 되어 군사를 모집하고 군량미를 조달하여 밤을 새워 달려갔으나 강화講和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왕세자를 전송하여 여산礪山까지 갔다가 돌아왔다.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또 거의도유사로 군사를 이끌고 청주까지갔다가 강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군을 해산하고 돌아왔다.그는 호서·호남 의병을 지휘하던 사계 김장생의 부탁을 받아 광주지역거의도유사로 활동을 했다. 이처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호남지방 의병도유사를 마다하지 않은 것도 선현들이 가졌던 절의정신에 그 연원을두었다고 할 수 있다.그는 나라를 올바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집안을 바로 하여야 한다는 사실과 국가의 경영 또한 올바른 제가齊家를 통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특히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예의와 범절, 가정에서의 효孝, 제弟,자慈의 정신을 강조했다.병자호란 후에는 은거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거처하는 집을 육오당六吾堂이라 부르며 다음과 같이 삼언시를 지어 자기 뜻을 나타냈다.육오당속제六吾堂俗諦 삼언시 6수를 보면食吾食 나의 음식을 먹고, 飮吾泉 나의 샘물을 먹으며,衣吾衣 나의 옷을 입고, 樂吾天 나의 천성을 지키며,守吾命 나의 운명을 지키다가, 終吾年 나의 생애를 마치리라.그는 자제들과 조카들을 모아 교육하면서 이렇게 당부했다. “내가 너희들에게 소망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입신양명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과거에 장원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맛있는 음식으로 나를 봉양해 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부지런히 학문을 닦고 어버이로서 자식을 사랑하며 동생으로서 형을 공경하고 형은 동생들과 우애하며 부부는 서로 존경하며 공경하고, 임금에충성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그 올바름을 행하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는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이 면학설을 지어 자제들과 조카들에게 보여주다면학설시자질勉學說示子姪이고, 가훈家訓이며 또한 사람다운 삶을 이루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저서로 『기은유고棄隱遺稿』가 있다.문집은 1905년 후손인 동로東老가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최익현崔益鉉과 그의 방손인 우만宇萬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그의 후손인 관현觀鉉, 학현鶴鉉, 경섭景燮 등의 발문이 있다. 4권 1책의 목활자본으로 권1에 시 14수, 권 2에 서書 1편, 권3에 설 2편, 서序 1편, 발 1편, 제문 2편,도圖 1편, 권 4는 부록으로 가장, 행장, 비음기碑陰記, 묘표, 서술敍述, 묘갈명 각 1편이 수록되어 있다.출전 기은유고, 호남절의록, 광주읍지, 북구 역사인물, 북구 문화유적.-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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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계石溪 정대현鄭大鉉<처사,선비>
    단발령에 항거한 석계정 처사 “석계石溪 정대현鄭大鉉”
      정대현(1873~1946)은 대한제국기의 유학자. 자는 익삼益三. 호는 석계石溪. 본관은 하동. 도정都正 정덕필鄭德弼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정지초鄭志楚 어머니는 강화최씨江華崔氏의 아들로 광주 북구 오치동 상오치마을에서 출생하였다.그는 천성이 온후하고 행동거지가 단정하였으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날마다 책을 읽었으며 과거 시험공부를 했으나 부질없음을 깨닫고 구한말 의병장 송사 기우만奇宇萬에게 수학 후 학문을 강구하고 석계정石溪亭을 짓고 유유자적하며 처사적 삶을 살았던그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 존경받고 공사 시비를 구별하는 것이 칼로 자른듯 분명했다. 그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친구들을 초청해 글과 고금의 역사를 논하였다. 일제가 강점기에 시행한 단발령과 변복에 따르지 않고 죽을 때까지 상투를 틀고 한복을 입었다.그는 시문에 능해 차용진정사속수계운次湧珍精舍續修稧韻, 근차봉산정사원운謹次鳳山精舍原韻, 근차용진정사원운謹次湧珍精舍原韻, 근차고현와엄이재운謹次高弦窩掩耳齋韻, 표충사미국계운褒忠祠薇菊契韻,근차오후석장용진정사운謹次吳後石丈湧珍精舍原韻, 초은정시회樵隱亭詩會, 근차쌍석정원운謹次雙石亭原韻, 무등산登瑞石, 장연사봉안문충선공영정長淵祠奉安文忠宣公影幀, 차양수묵정양재운次梁守默靜養齋韻,차요요재운次蓼蓼齋韻, 차박노선오헌운次朴魯宣梧軒韻, 차강윤원농은정운次姜允源農隱亭韻, 차송암운次松菴韻, 송광사松廣寺, 차이상호초은정운次李相皓樵隱亭韻, 경현사운景賢祠韻, 삼익계三益契 등을 참여하고 많은 시문을 남겼다.말년에 최기모崔基模(1869~1925), 윤석홍尹錫泓, 박노술朴魯述(185I~1917), 박노춘朴魯春, 김진현金珍鉉(1878~1966), 김도병金道炳,유창수柳昌秀, 여방섭呂邦燮, 제갈하백諸葛夏帛, 최영조崔永祚, 최영와崔永窩, 오계수吳繼洙(1843~1939), 오준선吳駿善, 박노면朴魯冕, 안병택安秉宅, 유창수柳昌秀 등이 그를 흠모하며 시를 남겼다.저서로 『석계시고石溪詩稿』가 있다. 서문은 외당畏堂고한주高漢柱 (1871~1959)가발문은 정해영鄭海英이 썼다.1975년 간행되었다. 이 시고의 번역본을 증손 병열炳悅이 2010년 6월 도서출판 에코피아에서 발행하였다.출전 북구 역사인물, 석계시고, 광주시사, 남도 정자기행.-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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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산梧山 이용헌李龍憲<처사,선비>
    빈민을 구제한 토주 “오산梧山 이용헌李龍憲”
      이용헌(1851~1895)은 구한말 유학자. 자는 운오雲五. 호는 오산梧山.본관은 함평. 취만翠晩 민형敏炯의 아들로 북구 오치동 하오치에서 태어났다.9세에 부친 취만에게 취학就學한 후 성질이 순수하고 경학에 깊은 마음을 두고, 약관弱冠에 노사 기정진奇正鎭에게 10년 정도를 배워 문장과학행에 조예가 더욱 깊었다. 그의 손자로 조선 말기의 학자 의병장이었던기우만奇宇萬과도 교유했다.  저서로 시문과 『십회잠十懷箴』, 『척사부정설斥邪扶正說』 등을 썼던 선비로 후학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그리고 조강하趙康夏, 조종필趙鍾弼,이만교李萬敎와 교유하여 그들로부터 남주고사南州高士의 대우를 받았던 선비일 뿐아니라 전래傳來의 넉넉한 가산家産을그대로 보전하여 많은 빈민을 구제한 당시의 토주土主이기도 하다.오치동 956-8(서하로 243)에 있는 오산정梧山亭은 그가 오치동의 안산정상에 작은 정자를 지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의병장최익현의 뜻을 받들어 구국운동을 펼쳤던 아들인 송천松泉 이계익李啓翼(1878~1946)이 1911년경 부친을 위해 그의 호를 따서 지었다.원래 이정자는 1911년 오치 안산案山에 있었으나 1971년 호남고속도로공사로 인하여 부득이 오치동 518번지 본가로 이건하였다가, 1987년 그위치를 바꾸어 현재의 장소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정자에 석촌石邨 윤용구尹用求는 서액書額을, 동강東江 김영한金寧漢은 정기亭記를, 춘담春潭 기동준奇東準은 상량문上樑文을 각각 썼다.그러나 의당 정내에 결려 있어야 할 주인 이계익의 원운原韻, 원기原記를비롯한 대서 현판 및 찬미 시문詩文 등 30여개의 판각版刻이 창고에 방치되어 있어 정자로서의 품위를 잃고 있다.  그는 1895년 3월 11일에 졸하였다. 그 후 1907년 효우孝友와 덕행德行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오산정 앞에 있었던 조선유민오산이공지비朝鮮遺民梧山李公之碑는 오산梧山 이용헌李龍 憲의 묘비로 현와 고광선高光善이 짓고, 종 2품 가선대부 전前 참판 이우명李愚明이 썼다.『오산유고梧山遺稿』를 남겼으며 이 문집은 오산팔경 등 시詩, 서書,잠箴 등 118편의 기문들이 실려 있다.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오산유고, 남도 정자기행, 북구 문화유적.-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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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극재克齋 이완상李玩相<처사,선비>
    극재유고의 작가 “극재克齋 이완상李玩相”
     이완상(1887~1953)은 일제강점기의 현대문인. 자는 장백長白. 호는 극재克齋. 본관은 광산光山. 부친 난곡蘭谷 이연관李淵觀과 모친 음성 박씨陰城朴氏의 아들로 광주 북구 황계리黃鷄里 지금의 운암동雲岩洞 대내 마을 출신이다.어려서부터 남다른 재능을 갖추고 있었으며, 늘 조용히 말하고 놀 때도포악스럽게 놀지 않았다. 자라서는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과 현와弦窩고광선高光善 두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주자朱子와 정자程子의책을 여러 차례 숙독하고, 힘써 행하고 실천하는데 주안점을 두어 학문을연마하였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으며 집안 어른들을 오로지 성심誠心으로 공경하였다. 또 자신의 분수를 지키며 편안히 살았다.유일한 즐거움은 책을 읽고 자손들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가 활동했던 광주의 시회詩會의 내용을 보면 황호재시회黃湖齋詩會, 운림당시회雲林堂詩會, 풍영정계회諷詠亭契會, 해양시단海陽詩壇 등에 참여하고, 광주 북구 일곡로 51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정자 모룡대慕龍臺, 송은정松隱亭, 원풍정願豊亭, 노암정聾巖亭, 소해정蘇海亭 등에 시가 남아있고, 또한 광주향교 직임에 천거되었음을 볼 때 그의 인품과 교우 관계를알 수 있겠다.그의 저서로 『극재유고克齋遺稿』는 1978년 아들 용선容璿, 용세容世가 힘을 합해 간행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홍석희洪錫憙의 서문과권 1에 시문詩文이 270편, 권 2에서書 34편, 기記 1편, 제문祭文 2편, 부록附錄 28편, 송재회宋在檜의 발문跋文으로 2권 1책으로 이루어졌다. 출전 극재유고, 남도 정자기행, 광주 향교지.-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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