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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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드리의 유래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 때 광주는 ‘무진(武珍)’이라고 했고, ‘무진주’라고도 했으며 ‘노지(奴只)’라고도 했다”고 되어 있다. 학자들은 이 시대의 노지란 말이나 「무진」이란 글자는 습지를 뜻하는 ‘무들(물들)’이었을 것으로 본다. 같은 발음의 토박이 땅 이름으로 전해지는 동구 계림동과 북구 중흥동에 걸쳐 있던 경양방죽, 들 이름을 ‘무드리’라 했으며 무등산 북쪽 산기슭 마을인 충효동 석저촌 일대는 ‘무들 밑들’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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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드리의 역사 | 선사시대
    우리 고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고인돌을 비롯한 선사시대의 유적이나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어 선사시대부터 우리 고을에도 사람들이 살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무등산 주변에 있는 곡성 옥과와 화순 남면 명주리에서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고 있어 우리 고을에도 같은 시기에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 다음 시기인 신석기시대도 나주 다시면 가흥리에서 벼화분(꽃가루)이 발견되어 우리 고을을 흐르고 있는 극락강변에서도 이와 같은 유적이 조사될 가능성이 높다.우리 고을에서 발견된 선사시대 유적은 현재까지 청동기시대에 속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청동기시대의 주민이 생활했던 집 자리가 운암동 어린이대공원 내에서 갈돌, 숫돌, 가락바퀴, 민무늬토기, 쇠뿔모양 손잡이 등이 출토되어 청동기시대 집 자리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집 자리의 흔적은 우리 고을에서 청동기시대에 사람이 살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들은 죽은 다음에는 충효동이나 청옥동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는 고인돌을 무덤으로 사용하였다.역사적인 기록이 없던 시대인 선사시대의 우리 고을은 무등산을 이용한 수렵, 극락강변에서의 어로와 주변에 펼쳐진 비옥한 평야지내에서의 농경 등 예부터 우리 고을은 사람이 살기에 좋은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사인들에게는 적합한 활동무대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청동기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유적,유물만이 발견되고 있지만 앞으로 우리 고을에서도 구석기나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유적,유물들도 발견되리라고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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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드리의 역사 | 마한시대
    마한과 관련한 유적은 우리 고을과 인접한 광산구 신창동에서 어린이 매장용 독무덤이 발견되고 있으며, 이 유적은 초기 철기시대에 속하고 있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독무덤은 영산강 하류지역에서 유행한 대형 독무덤보다 앞선 시기이며, 신창동 독무덤에서 대형독무덤으로 발전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독무덤은 마한과 깊은 관련이 있는 유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우리 고을에서는 운암동(현 중앙여고 자리)에서 쇠뿔형손잡이와 민무늬토기가 발견된 바 있고, 우치동 용강마을 뒤편 구릉에서도 쇠뿔형손잡이가 나온 바 있어 우리 고을에도 마한시대에 사람들이 마을을 형성하여 살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들은 나지막한 구릉이나 그 경사면에 집을 짓고 살면서 죽은 후에는 독무덤이나 흑구덩무덤을 조성하였다.전남지방에 있던 마한의 소국들은 백제 근초고왕(369년)이 남해안에 있던 소국들을 정복하였다는 기록을 들어 4세기 중엽에 우리 고을도 백제에 복속되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이 정복기사는 마한의 중심지였던 충청과 전북지방에 대한 복속이었을 것이고, 전남지방의 경우 백제와 대립하면서 그 이후에도 영산강하류 마한의 일부 소국들은 존속하고 있었다.전남지방은 삼한 중 마한에 속하였으며, 마한에는 54개의 소국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중 전남지방에 13개 정도의 소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국명과 지역에 대하여 학자들에 따라 다양한 주장을 하고 있다. 몇몇 학자들이 주장한 위치비정도 발음의 유사성과 지명의 변천 등으로 추정하였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고을을 포함한 광주 또는 광주 인근지역에 어떤 소국이 있었는가도 구체적인 자료가 없다. 하지만 마한 소국들 중에는 장성 진원, 나주, 광산 그리고 극락강변 등이 있어 우리 고을도 마한의 한 소국에 속하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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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드리의 역사 | 백제시대
    전남지방이 백제에 속한 시기는 백제가 마한을 정복하였다고 하는 근초고왕 24년인 369년부터 볼 수 있지만, 이 시기는 영산강 하류를 중심으로 대형 독무덤을 축조한 토착세력인 마한집단이 잔존하고 있어 백제가 완전히 정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우리 고을에서 백제와 관련된 직접적인 기록은 나타나지 않으나, 「삼국사기」기록에 동성왕이 직접 무진주까지 내려온 기사가 있다. 이때 탐라국이 백제에 항복했던 기사로 보면 이 지역이 백제 동성왕 때 완전히 예속되었음을 의미하며, 무등산을 중심으로 한 이곳이 군사적․경제적인 요충지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백제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백제 때 무등산에 성을 쌓고 백성들이 즐거워서 “무등산곡”이라는 속악을 불렀다고 전하나 그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려사』나 『세종실록지리지』에 현의 북쪽 5리에 토성이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백제의 행정구역과 관련된 토성지가 운림동 일원에 남아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해양현은 본래 백제의 무진주인데, 신라가 백제를 취하여 도독을 두었다는 것이다. 이 도독은 통일신라 때 설치한 것이나 백제와 관련된 곳에 파견된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백제시대의 토성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 토성 이외에도 백제시대 때 우리 고을 우두머리의 무덤으로 보이는 돌방무덤이 있는데, 이러한 돌방무덤은 각화동과 운림동에서 발견되었으며 운림동에서는 집단 돌방무덤이 조성되었다.현재 파괴되어 없어졌지만 각화동 돌방무덤에서는 유리제 소옥 8점과 관못 다수, 철촉 1점, 여러 종류의 토기 등이 발견되었고, 운림동 돌방무덤에서는 철편수점과 토기편 등이 발견되고 있는 점으로 보면 백제시대에 우리 고을에도 지배계층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백제시대의 우리 고을은 무등산에 토성을 쌓고 그 안에서 지배층이 거주하였으며, 백제 멸망 후에도 부흥운동이 실패하여 신라의 영향 하에 들어가면서 통일신라시대에 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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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드리의 역사 | 통일신라시대
    우리의 북구 지역을 포함한 광주는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의 실패로 인하여 신라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된다. 당의 소정방은 5도독부를 설치하였다가 백제 부흥운동이 실패하자 1부 7주로 개편하였다. 문무왕 18년인 678년에 아찬 천훈이 무진주 도독으로 파견되었다. 도독이 파견된 것은 이 지역의 지방 세력을 흡수 또는 견제하기 위한 의도로서, 이 지역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음을 의미한다.5도호부가 웅진도독부로 되면서 7주 52현을 두었는데, 이때 전남지방으로 비정된 사반주(혜호이성, 장성 또는 영광), 대방주(죽군성, 나주회진), 분차주(파지성) 등 3주가 있다.이중 분차주를 승주 낙안지역으로 보고 있지만 그 속현들이 모두 장성진원, 담양창평 등 광주의 인근지역임을 들어 낙안보다는 오히려 그전부터 중요지역으로 여겨오던 무진주인 광주지역일 가능성이 많다고 하겠다.『삼국유사』의 문무왕조 기록 중 무진주 안길의 기사는 무진주의 토호(지방 세력가)인 중앙세력과 연결되어 그에 협조하는 세력으로 흡수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7세기 후반 경 광주지방에는 세력가들이 건재하고 있었고, 중앙세력이 이들을 흡수하려고 한 것으로 해석된다. 신문왕 5년에 9주가 처음 갖추어지고, 6년에 주, 군을 정비하면서 무진주군에 주가 설치된다. 경덕왕 16년(757년)에 9주 5소경으로 지방제도가 완비되고 117군 239현으로 정비된다. 이때 무진주는 무주로 개편되고 15군 43현이 이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무진주와 무주가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다.경덕왕 5년(813년)에 무진주 도독으로 있었던 이찬 김헌창이 822년에 웅천주 도독으로 있을 때 난을 일으켜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이라 하였는데, 이 난에 무진주도 협조한 사실이 있다. 이는 중앙세력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던 지방 세력의 반항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반항은 그 후 청해진의 장보고나 892년 견훤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장보고가 청해진에서 모반하였을 때 무진인 염장에게 살해되고, 또 장보고의 부장인 이창진 등이 난을 일으켰을 때에도 무주의 별장인 염문에게 평정된 것은 무진주와 중앙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광주지역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중심지는 현의 북 5리에 있던 토성인 무진도독고성으로 보인다. 이 성은 아직 정확하게 확인되고 있지 않지만 북구 청풍동과 동구 산수동의 경계인 잣고개 부근에 있는 무진고성을 무진도독고성이나 그와 관련된 배후산성으로 보고 있다. 또 무등산 원효사에서도 통일신라시대 기와가 출토된 바 있으며, 두암동 불당골에도 통일신라시대에 속하는 가마가 있었다. 무진악(무등산)에서 소사를 올린 기록 등으로 보아 무등산이 중요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아울러 통일신라시대에 우리 고을의 중심지는 무진도독고성이었고, 견훤의 기병과 왕건의 나주 진출로 후삼국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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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드리의 역사 | 후백제시대
    신라 하대에는 각지에서 지방 세력가인 호족들이 중앙왕실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후삼국시대가 시작되는데, 그중 견훤이 892년 광주에서 기병하여 후백제라 하였다. 견훤은 상주가은 현인 또는 광주 북촌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출신지역은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신라 효공왕 4년(900년) 완산주로 옮길 때까지 그 본거지는 무진주(광주)였다. 이후에도 아들인 용검과 사위 지견에 의해 광주성은 계속 지켜졌다. 이 시기에는 무진주, 무주, 광주가 혼용되고 있으며, 이때 광주란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후백제의 멸망으로 그 전까지 중심지였던 광주가 나주로 옮겨진다. 이는 광주가 후백제의 본거지였을 뿐만이 아니라 나주에 고려를 세운 왕건의 지지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후백제와 관련된 확실한 유적은 없다. 하지만 「홍지도서」(1759년)에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하기 위해서 진을 친 왕조대(삼소동․왕소지로 추정), 주 북 15리에 있었다고 하는 견훤대(생용동 죽취봉 추정), 견훤이 견훤대 아래에 진을 치고 말을 기르던 방목평 등이 전하고 있으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대개 북구의 극락강 주변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견훤과 관련된 유적으로 생룡동의 토성터와 무진도독고성을 들고 있지만 앞으로 더욱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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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드리의 역사 | 고려시대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한 왕건이 고려를 창건한 것은 918년이다. 그러나 북구 등 광주지역의 후백제 잔여세력은 그 후 20여 년 동안 고려에 완전 복속되지 않고 저항하였던 것 같다. 고려가 지방 세력을 흡수.통합할 수 있었던 것은 문물제도가 정비되고 중앙집권적인 통치 질서가 확립된 이후이다.고려시대 지방제도가 정비되기 시작한 것은 성종 2년(983년)에 12목을 설치하면서부터이다. 이때 고려에 협력한 나주와 승주에 목이 설치되어 절도사가 파견되나 광주지역에는 강등되어 자사가 파견되었다. 이는 광주지역이 후백제와 연결되어 왕건에 저항하였던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목종 8년(1005년)에는 광주를 자사에서 또 강등하여 해양현령을 파견한다. 고려 10도중 하나인 해양도는 전남지방인데, 해양현은 광주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 현종 때에는 지방제도 개편작업을 하여 4도호 8목 56지주군사, 28진장 20현령으로 정비하는데, 전남지방은 나주목을 비롯하여 1지사부(장흥), 4지사군(영광, 영암, 보성, 승평), 4현령관(해양, 진도, 능성, 탐라)으로 편제된다. 이때 전주와 나주를 합쳐 전라도라 칭하게 되었다.무등산에서는 신라 때 소사에 이어 고려 때에는 국제가 행하여졌다.이는 무등산이 국가적으로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최씨무신정권이 장기화됨에 따라 민심이 불안해져서 각지에서 난이 일어났다. 그중 백제부흥운동의 일환으로 이연년 형제를 중심으로 한 농민운동은 담양 원율에서 난을 일으켜 해양, 암양을 석권하고 ‘백적도원수’라 칭하고 나주를 공략하였다.이 시기 우리 고을도 이에 합세하였던 것으로 보여 진다. 이는 무등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후 몽고군이나 왜구들이 지휘본부를 무등산에 설치한 것으로 보아 그러하다.고종 46년(1259년)에 광주는 해양현에서 지익주사로 승격되고, 뒤에 목으로 승격되지만, 충선왕 11년(1301년) 광주목에서 강등되어 화평부가 되었다. 13세기 중엽(1254~1387년)에는 왜구의 침입을 받아 그들의 활동무대가 되어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 왜구는 나주출신 정지장군에 의해 토벌되었다.우리 고을과 관련된 고려시대 유물과 유적은 원효사에서 금동 또는 청동불, 쌍용문거울, 기와 등이 출토되었고, 개원통보, 원우통보 등이 출토된 청풍동 석곽묘, 장운동 5층석탑(현 국립광주박물관 야외 전시장)과 석불좌상, 망월동에 있는 정지장군 예장석묘(지방기념물 제2호)와 정지장군 환삼(보물 336호, 현 광주시립민숙박물관 전시) 등이 있다. 청풍동에 있는 무진고성도 고려시대 초까지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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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드리의 역사 | 조선시대
    왜구의 침입 등으로 인하여 신흥무인집단으로 성장한 이성계는 위하도 회군을 계기로 사대부계층과 연합하여 1392년 조선왕조를 개창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지방제도를 답습하지만 태종 때에 개편작업에 들어가 성종 때에 『경국대전』의 완성과 더불어 중앙집권적인 제도가 완비된다.광주목에는 나주목과 함께 도의 지시를 소령의 군현에 전달하면서 그들 통활한 계수관이 두어진다. 광주목에 속한 군현은 3도호부(장흥, 순천, 담양), 2군(보성, 낙안), 2현령(능성, 창평), 4현감(화순, 옥과, 동복, 진원)이었다. 태조 7년(1397년)에는 전라도 군을 전담하는 병마절도사영이 광산구 고내상(舊 송정읍)에서 태종 7년(1379년)에는 도강현(강진 병영)으로 옮겨졌다. 현재에도 송정리 고내상 옹보촌 일대에는 고내상성지가 남아 있다.광주지역의 읍호는 여러 차례 강등과 승격을 반복하면서 변경되었는데, 문종 원년(1451년)에는 광주목인 것이, 성종 20년(1489년)에 광산현으로 강등된 것을 비롯하여 연산국 7년(1501년)에는 광주목으로, 인조 2년(1624년)에는 광산현으로, 인조 12년(1634년)에는 다시 광주목으로, 숙종 27년(1701년)에는 광산현으로, 영조 33년(1757년)에는 광주목으로, 순조 9년(1809년)에는 광산현으로 고종 8년(1871년)에는 광주목으로 변경되었다. 이러한 변경 속에서도 광주목은 어떤 사건을 계기로 광산현으로 강등되기도 하지만 조선 전 기간에 걸쳐 광주라는 이름은 유지되고 있다.조선시대의 중심지인 읍성은 지금의 시내 중심가에 있었으며, 주위가 8,253자(척), 높이가 9자이고 그 안에 우물이 100개가 있었다. 이 읍성의 4대문은 현재 황금동 일대에 있던 서원문(서문), 충장파출소 부근의 공북문(북문), 전남여고 부근의 광이문(동문), 도청 옆 부근의 전남문(남문)이다.우리 고을은 조선시대 후기에 와서야 좀더 자세한 것들이 기록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조선후기에 들면서 면, 리제가 정착되어 군현에 속한 면과 리명, 호구수 등이 『호구총수』(1789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이 기록에 의하면 광주목이 41면 375리를 관할 한 것으로 되어있고, 호수는 8,373호이다. 북구에 속한 것을 살펴보면, 상대곡면(청옥동 동부), 석보면(충효동), 황계면 (신용동), 마지면(본촌동), 천곡면(서산동), 기례방면(북동), 이십보면(문화동), 석제면(효죽동), 삼소지면(문화동, 장운동 일부), 우점면(우치동), 하대곡면(청옥동 북부), 경양면(효죽동, 풍향동) 등 12개 면이고, 호수는 2,461호이다.우리 고을에 남아있는 조선시대 유적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존속된 원효사를 비롯하여 충효동 도요지, 구 광주농고(임동) 십신사지 비와 석불, 금곡동 김덕령장군묘, 그리고 가사문화의 산실인 충효동 일대의 환벽당, 풍암정, 취가정과 그 인근의 식영정, 소쇄원 등이 있다.조선시대 8도의 지방제도는 갑오개혁으로 근대적인 행정제도로 개편되었다. 1895년 5월 1일에는 전국을 23부제로 개편하고, 광주는 나주부 아래의 광주군이 되었다.(1895년 5월 26일 반포, 칙령 제98호). 1896년 8월 4일에는 23부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실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 이때 광주군은 전라남도 1등군으로 관찰부가 설치되어 전라남도의 중심지가 나주에서 광주로 옮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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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드리의 역사 | 일제시대
    1910년에는 관찰부가 도청으로 바뀌고, 1914년 4월 1일에는 전국적으로 지방행정제도가 개편되었다. 이때 광주군은 15면 152리로 통․폐합되었다(1913년 12월 29일 반포, 조선총독부령 제111호). 이 개편으로 인하여 12개면이 있었던 북구지역은 석곡면, 우치면, 본촌면, 서방면과 극락면 일부 등 5개면으로 통․폐합되었다. 1931년 4월 1일에는 광주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35년 4월 1일에는 북구에 속한 서방면 3개리(장호, 동계, 풍향리)와 극락면 일부 리(신숙, 내방, 운암리)가 광주읍에 편입되었다(1935년 3월 1일 반포, 조선총독부령 제45호). 1935년 10월 1일에는 광주읍이 부로 승격되고 광주군은 광산군으로 개칭되었다. 이때 북구지역인 서방면, 풍향, 장호, 동계, 중흥, 신안리 등이 편입되었다(1935년 9월 28일 반포, 조선총독부령 제1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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