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144
게시물 검색 폼
  • 읍취挹翠 이방필李邦弼<충신,의병>
    김천일 막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읍취挹翠 이방필李邦弼
      이방필(?~1593)은 조선 중기의 문신 의병장. 자는 공보公輔. 호는 읍취挹翠. 본관은 함평. 광주광역시 북구 오치동 출신이다.그는 지조志操와 행실行實이 고결高潔하여 일찍이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선생의 문인이며, 스승과 더불어 정의情意가 매우 두터워 서로 종유從遊 했으며, 마을의 서편 작은 산에 일산처럼 생긴 소나무가 있어 이름을 읍취挹翠라 짓고 그 소나무 아래에 정자를 지어 현인들을 초청하여 봄, 가을에 강회소講會所로 삼았다. 그로 인하여 호를 읍취라 하였다. 그는 충의忠義가 순수하고 독실하여 임진왜란에 건재健齋 김천일 장군 막하幕下에 의병으로 참여하여 누차 적침을 막았으며 강화도에서는 적선敵船을 사로잡아 많은 전공을 세우고, 진주성 싸움에서 흉탄에맞아 순절하여 초혼招魂으로 장사를 지냈다.  그의 전공을 세운 기록인 철권鐵卷이 있고 삼강록에 기록되어 있다.1605년 선무 원종공신 3등에 록선되고, 1998년 11월에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호국사에 봉안奉安하고 제사는 매년 음력 4월 13일에 지낸다.읍취정은 명종조(1546~1567)에 건립되어 1691년 중창을 거쳐 1873년에낡은 집을 중수重修하고 노사盧沙 기정진奇正鎭 선생이 중수기를 지었다. 정자 내에는 판서 조경호의 편액과 노사 기정진의 중수기, 기우만奇宇萬을 비롯해 이장헌李章憲, 이재순李載純, 김택수金宅洙, 송병제宋秉濟,황연수黃演秀 등의 시문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었다. 1980년 크게 보수하였으나 1996년에 철거하고 1997년 옛 정자를 모방해 지하 1층 위에 앞면3칸 옆면 2칸의 골기와 팔작지붕 건물로 신축하여 함평이씨 문중 사무실로 사용한다.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호남절의록, 호남 정자기행, 북구 문화유적.-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더보기
  • 죽오竹塢 이몽린李夢麟<충신,의병>
    이순신 막하에서 노량 싸움에 참여하여 산화한 “죽오竹塢 이몽린李夢麟”
      이몽린(?~1598)은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경시慶時. 호는 죽오竹塢. 본관은 함평. 결結의 아들로 광주 북구 오룡동 미산 마을 출신이다.그는 당시 뛰어난 선비로 모든 벼슬을 마다하고 오로지 자연경관을 즐기고 학문연구에 몰두한 인물이었다. 오룡동 미산 마을 뒷산 정마봉停馬峰 아래 영산강이 바라보이는 곳에 임진왜란 이전에 그가 지어 유유자적했던 남강정南江亭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그는 생원과 음사로 주부를 역임했는데, 임진왜란 때에 형 몽구夢龜가의병을 인솔하고 충무공 막하에 있다가 충무공의 천거를 받아 본영 우후虞候가 되었다. 뒤에 경상도로 다시 가서 좌별장左別將으로서 전선 23척을 인솔하고 정운鄭雲, 김완金浣 등과 함께 노량해전에서 적선 12척을 격파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에 영등포에서 적선 30여 척을 불사르고 왜장 금단선金團扇을 분취奮取하여 조정에 진상進上하는 등 전공을 세우고 전사하였다.전사한 형의 비보를 듣고 순절에 원통하고 분하여, 형이 죽고 아우가 살아서 구차히 생활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라 생각하고, 백여 명의 의사義士를 모아 가동을 거느리고 군량軍糧 백여 석을 사들이어 이충무공막하에 들어가 적과 격투한 끝에 적 수십급數十級을 참수하고 왜선 100여 척을 격파시켰다.1598년 수사水使 정여린鄭如麟, 김해룡金海龍과 더불어 적을 침공하다가 노량 싸움에서 적의 탄환을 맞고 전사하였다.1605년 선무 원종훈 3등에 기록하고 순조 때 포충褒忠을 했다.출전 광주읍지, 호남절의록, 호남 정자기행, 북구 문화유적.-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더보기
  • 의병장 이백춘李百春<충신,의병>
    의병장으로 왜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굴복하지 않고 순절한 “의병장 이백춘李百春”
       이백춘(1537~1592)은 조선 중기의 의병장. 자는 영경榮卿. 본관은 함평.병사 종우從愚의 증손으로 광산구 등임동 방해 마을에서 태어나 1558년광주 북구 용봉동 중봉 마을(저불)로 이사했다.천성이 강직하고 문학 절행이 뛰어난 그는 용봉동으로 옮긴 그해 사마시에 급제한 뒤, 마을에 읍취정挹翠亭을 짓고 세심천洗心泉을 만들어 후학을 양성하고 봄과 가을 향약을 강학하였다.1590년(선조 23)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로 임명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때 중앙 관리로부터 지방 아전에 이르기까지 모두 도망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임금을 호종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직분을지켜 죽으리라.”하고 끝까지 항거하다가 왜군의 포로가 되었다.그리고 조금도 얼굴빛을 변하지 아니하고 적을 꾸짖으며 굴복하지않다가 그해 9월 23일 순절하였다. 1605년 선무원종공신 2등에 록선되어 1997년 보령 호국사에 위패를 봉안하였다.그의 묘는 1980년 어린이대공원이 조성하면서 일곡동 호항동虎項洞으로 옮겼다.출전 북구 역사인물, 조선왕조실록, 광주읍지, 북구 문화유적, 호남절의록.-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더보기
  • 우봉牛峯 이근李根<충신,의병>
    24세에 의병장으로 참전한 우국지사 우봉牛峯 이근李根
     이근(1569~1656)은 조선 중기의 임진왜란 의병장. 자는 양원陽元. 호는우봉牛峯. 본관은 전주. 증군자감정贈軍資監正 호승豪升의 아들로 함평(식지리)에서 태어나 영광군 묘량면 운당리 영당 마을에서 살다 광주 우치면 학동 마을(현. 북구 효령동 학동 마을)로 임진왜란 직후에 이거를 하였다.14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성인처럼 장례를 모시니, 향리 사람들이 공의효행에 크게 감탄하였다고 한다.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김경수, 윤진 등이 장성 남문에 의병청을 설치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솔 및 군기를 모아 의병에 참여하였다. 나이 24세였다. 의병장 김제민과 함께 전략을 세우는데도 이바지하였다. 1593년 김극후, 고종후 등과 함께 진주성에 합류하였으며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법성포로 이동하는 동안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공은 의병들과 함께 순절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였다. 그 후 광주 북구 효령동으로 이거하여 은둔생활을 하며 경학에 주력하였다. 자기의 호를 우봉牛峯이라 칭하였다.공의 위패는 장성 오산 창의사에 봉안되어 있다.효령동 종방 마을 내에 위치한 삼산정사三山精舍는 우봉 이근의 정사인데 지금은 전주이씨 재실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은 콘크리트 기단 위에 4개의 신발돌과 다듬어진 주초를 놓고 그 위에 평주를 세워 정면 4칸, 측면1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내부에는 삼산정사 상량문, 삼산정사기 원운, 차운 등 모두 11개의 제액이 걸려 있다.주련으로 삼산정사 팔경을 써 놓았는데 2경은 유실되어 보이지 않는다.湧珍落照 용진산 저녁노을 佛臺飛瀑 불대산 비룡폭포龍江漁笛 용강의 어부 피리소리 尼峯霽月 이봉의 갠 하늘의 달瑞石歸雲 서석산 돌아가는 구름 竹翠暮雨 죽취봉의 저녁 빗소리등이 남아있다.三山精舍記瑞石爲南紀鎭山而秀山尙磅碑若有異馬旣死馳逶邐一脉萃然復起者曰三角山山之下牛峙坊有遺址無沒行過咨嗟老郞故牛峰李公諱根講道所也子姓中贊未遑肯構迺以癸卯春等精舍於其址扁曰三山裔孫歲時相緊講衛先綴族之方便門彦相業相南觀燮索余以疏其楈者余謂李氏之於慕先旣誠勤如此又何須人言抑有後焉襄度公諱天祐贊 太祖空社官大匡輔國崇錄大夫判司評府事完山府院君配享 太宗廟牛峯公克承統緖篤習忠孝通經學養武畧年州四値龍巳亂姓身贊義斬獲甚甚得 大將李諟敬歎賞事聞 朝庭資公以司果 英廟丁丑蒙追 贈之典後又配享累賢鰲山諸祠長興人士至今頌墓之不哀也則宜夫崇奉先烈垣人通情况一氯之貫注百世之追系者乎雖然慕之之道亦曰誠而己矣惟祖先有至行童年廬墓啜粥我則放之思所以無忝祖先有大卽築檀揷竹拜北我則則之思所以趾夷千義于墻惟精舍是依歸則奚止ト李門之益大以昌亦是以狀世道淑人心而斯舍之名將與瑞石並存於無窮矣鳴呼可不誠乎癸卯閏月下浣瑞興 金奎泰記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호남절의록, 삼산정사기, 북구 문화유적, 남문창의록.-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더보기
  • 서암瑞菴 이완근李完根<충신,의병>
    권율 장군이 한나라의 마이와 같다고 칭찬한 용감무쌍한 의병장 “서암瑞菴 이완근李完根”
      이완근(1545~1615)은 조선 중기의 의병장. 자는 백인伯仁. 호는 서암瑞菴. 본관은 광산. 아버지 춘년春年과 고성채씨의 아들로 광주 북구 운암동 대내 마을 출신이다.어릴 때부터 힘과 재주가 탁월하고 특히 비력臂力이 과인過人이더니 의기지사義氣之士인 김충용金忠勇, 이충립李忠立과 상허相許하였다. 주위의 칭송을 받았으며 재종형 세환世環과 뜻이 맞아 매사에 의기투합했다.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 목사인 권율이 널리 의기지사義氣之士를 모집하여 막하 장수가 되어 주부에 제수되었다. 이후 이치전투에 전투 부대장이 되어 참전하였다.1593년(선조 26) 2월에 명군明軍에게 패하여 서울에 집결한 왜군이 전세를 역전하려고 30,000 대병으로 행주산성을 포위하여 3진으로 교체하며 연속 9번을 공격하였으나 권율 장군과 민관이 일치단결하여 사력을 다해 항전하며 왜적을 물리치니 왜군은 막심한 장병의 손실로 이제는 견디지 못하고 퇴각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용전勇戰하는 그를 보고 권율은 “한漢의 마이馮異와 같다.”고 격찬하였다고 전한다. 행주대첩 전투에서 전과를 올려 지세포 만호에 제수되어 수군통제사 이순신 막하에서 경상도 남해안에 성을 쌓고 웅거해 있는 왜적을 물리치도록 하였다.정유재란 때는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과 전라북도 남원시 동면 경계인소백산맥에 있는 팔량치에서 재종형 이세환과 함께 적과 분투하여 적장의 목을 베고 대승하였다.1602년에 세운 행주대첩비에 새겨진 막하유사 8명 중 한 사람이며,1605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세환과는 재종간으로 일신의 크고 작은 희생을 감수하고 과감히 참전하여 국난극복에 큰 공을 세운 선무원종공신으로 한 집안에서 두 명의임란 공신이 되었다.뒤에 금산 금곡사金谷祠에 배향되었다. 금곡사는 일제강점기에 헐리고지금은 진산면 묵산리 충장사에 배향되었다.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호남절의록, 북구 문화유적, 충의사록.-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더보기
  • 추암秋巖 이세환李世環<충신,의병>
    이치전투와 행주전투에서 공을 세운 조선중기 무신 “추암秋巖 이세환李世環”
      이세환(1541~1603)은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백헌伯憲. 호는 추암秋巖. 본관은 광산. 아버지는 몽린夢麟과 어머니 김해 김씨의 아들로 광주북구 운암동 대내 마을 출신이다.  충의가 있고 지혜와 용기가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1590년 무과武科에 등제하여 훈련원정訓鍊院正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 목사인 권율의 막하 장수가 되었다. 권율 막하 광주 8장사 중 한사람으로 이후 이치전투와 행주전투에 전투 부대장이 되어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또한 전라북도 운봉에서 많은 적을 물리친 것으로 전해지고있다. 정유재란 때에는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과 전라북도 남원시 동면경계인 소백산맥에 있는 팔랑치에서 재종제 완근完根과 함께 적과 싸워적장의 목을 베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탈취한 왜검이 가보로 전해 오고있다.이때 당시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팔랑치 싸움에서 이세환 장군이위급한 상황에 부닥치자 갑자기 황새 한 마리가 나타나 적장의 머리를 할퀴고 지나갔다. 적장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틈을 타 꾀를 낸 이세환 장군은 지원군이 오는 것처럼 속여서 왜구가 우왕좌왕할 때 적장의 머리를 베었다. 이세환 장군은 일찍이 황새의 깃에 뱀이 달려드는 것을 보고 그 뱀을 죽여 황새 새끼를 살려준 일이 있어서 그 황새가 은혜를 갚았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임진왜란이 끝나자 오랑캐의 세력이 크게 떨쳐 북방이 위태롭게 됨에따라 조정은 그를 삼진三鎭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삼았다.1605년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고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금산 금곡사金谷祠에 배향되었다.광주시는 첨단산업단지 어린이교통공원에서부터 월출동 삼소로까지의 도로명 ‘추암로秋巖路’는 그의 호를 따 명명한 것이다.출전 북구 역사인물, 이세환장군 실기, 광주읍지, 호남절의록, 북구 문화유적, 충의사록.-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더보기
  • 화암花菴 송타宋柁<충신,의병>
    정유재란 때 왜적을 죽이고 돌아오다 순절한 “화암花菴 송타宋柁”
      송타(1567~1597)는 자는 시정時正. 호는 화암花菴. 본관은 홍주. 송제민의 네 아들 중 첫째로 운암동에서 태어나 광주 북구 화암동에서 살았다.제봉 고경명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평소에 기질이 조용하면서도품위가 있었으며, 몸은 깡마르고 허약하여 걸친 옷도 무거워 보이는 곧 하나의 서생書生이었다.1597년 정유재란 때 수군으로 참전했는데 영산강 무안 경계인 사포나루터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사로잡혀 포로로 끌려가는데 왜군에 사로잡혀경상도 한산 해안에 이르렀을 무렵, 배 안에 왜인보다 우리나라 포로가 많고, 배가 고립되어 인근에서 구원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여, 배에 탄 포로와 함께 왜장의 칼을 빼앗아 배 안에 있던 왜적을 모조리 베어 죽이고,노를 저어 돌아오던 중, 칼에 맞아 바다로 떨어진 왜병이 헤엄쳐 달아나고변하여 인근 왜선이 바다를 덮어 추격하자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그는 죽음에 임하여 “나는 광주에 사는 송제민의 아들인데 불행히 적에게 붙들렸고 지금 또 불행히 죽게 되었다. 후일 여러분이 다행히 귀국하게되면 부모님께 내 소식을 전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바다에 뛰어들어 순절했다. 그때 송타의 나이는 31세였다.이러한 사실은 함께 붙잡혀 가던 창평의 진사 이신李愼이 수은睡隱 강항姜沆(1567~1618)에게 전하여 알려지게 되었는데, 4년이 지나 1600년(선조 33) 강항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와 이 사실을 자세히 말하였다.석주石洲 권필權韠이 이를 명행기名行記에 기록하고 “아! 그는 어려움에 부닥치어 틈을 노려 꾀를 내어 칼을 휘둘러 적을 무찌르고 마침내는분명히 밝히고서 죽었으니, 열장부烈丈夫가 아니면 이럴 수 있겠는가?”하였다.1788년(정조 12)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증직되고, 운암서원에 배향되었다.출전 북구 역사인물, 상체찰사 이공 항복서, 광주읍지, 해광집, 홍주송씨 대동보, 수은집,화암수록, 명행기.-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더보기
  • 해광海狂 송제민宋齊民<충신,의병>
    영광 앞바다에 제방을 쌓아 해일의 피해를 막은 실시구시의 실학자, 의병장 “해광海狂 송제민宋齊民”
     송제민(1549. 명종 4~1601. 선조 34)은 조선 중기의 학자·의병장. 초명은제민濟民. 자는 사역士役 또는 이인以仁. 호는 해광海狂. 본관은 홍주洪州. 정자 정황庭篁의 아들로 담양 금성면 대곡리에서 출생하였으나 어려서부터 광주 북구 운암동(황계)에서 살았다. 이름은 뒷날 백성을 구제하지 못함을 탓하여 제濟를 제齊로 바꾸었다.선생은 재주가 남보다 많이 뛰어나 책을 몇 번만 읽어도 외워 버렸고, 문장을 쓰는데도 종이와 붓을 잡으면 그대로 써 내려가는 머리를 가졌다. 성장하자 옛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어 성리학에 마음을 쏟아 미묘한 그것까지도 탐구하느라 밤낮을 게을리하지 않고 침식을 잊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글을 읽고 연구를 하는 것은 장차 써먹기 위함이다. 선비가 만약 때를 만나서 조정에 나아가임금을 섬기게 되면 요순堯舜과 같은 임금과 백성을 만드는 것이 나의 책임이지만 만약 뜻을 얻지 못한다면 자신의 삶을 만족할 뿐이지 어찌 영리에 급급하겠는가, 오늘날 세상에서 과거로 출세하려는 것은 옥을 싸서 벼슬 팔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 임금을 섬기고자 하여 먼저 부정한 방법으로 벼슬을 구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였다.1578년 선생의 나이 30세에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글재주가 뛰어났다. 호방한 성격에 구속을 싫어하여 벼슬을 하지 않았다.그는 양명학에 심취하였고, 빈민구휼과 애민사상 고취에 선구적 역할을하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영광 앞바다에 제방을 쌓아 해일의 피해를 막는공사였다. 당시 해일로 인해 영광군 일대의 농토가 큰 피해를 당하였는데그는 함평, 무안현 일대의 소나무를 베어 제방 공사를 총감독한 것이다.「미암일기」 등 당시의 기록은 해광의 행동이 그르다는 평을 하고 있으나 조선 사대부 가문의 덕망있는 유학자로서 경전 연구에만 몰두하지 않고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행하고자 했던 그의 경세 사상은 해양 사업을 크게 일구었던 무역 선단의 대 선주였기 때문이다.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생은 먼저 금성출신 양산용梁山龍 양산숙梁山璹 등과 의병을 모아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 의병과 합류하였다.모두가 김공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선생은 스스로 종사관이 되어 군사를거느리고 북상하다가 수원에 이르러 조헌趙憲과 고경명을 만나 금산 전투에서 연패하자 고향에 돌아왔다.그는 스승인 곤재 정개청의 권유로 상선 29척을 이순신 장군에게 주어이를 병선으로 개조하여 강화도 연해와 남해의 해전을 이끌 수 있게 지원하였다. 1593년 친상親喪을 당하여 집에 있던 충용장 김덕령金德齡을 권하여의병을 모집하고, 친히 제주에 건너가 준마를 구하여 주었다. 다시 김덕령의 의병군에 가담하여 경상도 지역을 방어하다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었다 하여 김덕령이 옥사하자 선생은 종일토록 통곡하고 『와신기사臥薪記事』를 저술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에 왜적을 막을 계책을 건의키 위하여 남원에 주둔하고 있는 명장明將 양원楊元을 찾아가 이곳은 지형이 불리하니 속히 다른곳으로 진을 옮기도록 권하였으나 양원이 선생의 말을 믿지 않고 있다가적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때 명장이 화친을 도모함을 보고, 척왜만언소斥倭萬言疏를 지어 화의和議의 부당함과 왜적을 물리칠 여러 방안을 피력하였으나 이것이 관찰사의 미움을 사게 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이름을 제민齊民이라 고쳤다. 이는 ‘경국제민經國濟民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서민과 다를 것이 없다.’라는 뜻으로 나라의 원수를갚지 못해 죄인으로 간주하였다. 이후 무등산에 은거하면서 세상을 잊고살았다.  1789년(정조 13)에 지평에 추증되었고, 광주의 북구 운암동에 운암서원雲巖書院에 제향 되었으나, 서원 훼철령에 의해 헐리고, 지금은 화암동에운암서원을 다시 지었다.저서로는 『해광집海狂集』이 있다.출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호남절의록, 운암사지.-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더보기
  • 양성재養性齋 범진후范振厚<충신,의병>
    병자호란때 광교산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의병장 “양성재養性齋 범진후范振厚”
      범진후(1609~1671)는 조선 중기의 의병장. 자는 군평君平. 호는 양성재養性齋. 본관은 금성. 범우익의 맏아들로 임진왜란 의병장 범기생의 손자다. 광주 북구 생용동 출신이다. 5살에 글공부를 시작했으며, 일찍부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했다. 총명하고 무예도 뛰어나 김수금, 정대명 등과 어울렸으며, 1623년인조반정 이후 성균관 생원에 응시해 합격했다. 이괄의 난 등 난세가 계속되자 대과 응시를 포기하고 고향인 생용동에서 지냈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복수를 다짐하며 주위 선비들과 병기, 군량을 모아 매달15일 함께 무예를 연마했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인조의 근왕교서가 내리자 4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전라 병사 김준용과 합세했다. 대장에는 김준용, 부장에김수권, 우선봉장에 정대명, 그는 좌선봉장에 임무를 맡아 진군해 청주,수원을 지나 용인 광교산光敎山에 진을 쳤다.전라도 근와병勤王兵은 남한산성에 인근에 도착했다는 전령을 중앙군에 보낸 뒤, 1637년 1월 29일부터 1월 31일까지 경기도 용인의 광교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로 전라병사 김준룡이 광교산에서 청나라 장수 양굴리楊古利가 이끄는 청군과 싸워 병자호란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로 혈전끝에 양굴리와 그 부장 등 3명을 사살하는 전공을 올린 전투였다. 그러나이 싸움은 전라병사 김준용을 비롯하여 강진의 김수만, 김수권, 광주 사람 허익복, 범진후, 충주 사람 김배, 정대명 등 후일 ‘육호장六虎將’이라 불리는 이들이 한뜻이 되어 이룬 전과였으나 이를 시기한 전라감사 이시방李時芳이 금전패禁戰牌를 보내 군량을 비롯한 군수물자를 고의로 끊어버려 광교산에서 퇴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인조의 항복 소식을 들은 뒤 광주로 돌아와 두문불출했으며, 조정에서 여러 번 출사를 요청했으나 사양했다. 향리에 은거하고 평생 청나라연호年號을 쓰지 않고, 1671년 7월 19일 61세로 사망했다.후일 정조는 그를 공조참판에 추증했다.출전 광주읍지, 남도 정자기행, 호남절의록.-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더보기
  • 성와省窩 범기봉范起鳳<충신,의병>
    형인 범기생과 함께 진주성 싸움에서 산화한 의병장 “성와省窩 범기봉范起鳳”
       범기봉(1557~1593)은 조선 중기의 의병장. 자는 원유元有. 호는 성와省窩. 본관은 금성. 범홍로范弘老의 둘째 아들로 북구 생용동에서 태어났다.  효성과 우애가 깊고 경서에 능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국세가어찌할 겨를이 없이 급박한 지금 어찌 관군이 사수하지 못한다고 하여 왜적을 토벌할 도리를 잊을 수 있으리오.”하고, 형인 죽천 범기생范起生과집안식구들과 함께 병기를 모아 김천일金千鎰 의병진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장사 몇 명을 인솔하고 금령金嶺의 적을 참살하고, 안산安山을 거쳐인천仁川에 이르니 기세가 위풍당당하였다. 강화도로 진을 옮겨 어선을개조하고 왜적의 선박을 나포해 400여 척의 병선을 구축했다. 1592년 9월9일 이를 이끌고 나가 한강 양회진에서 대승을 거뒀다. 그 후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최경회崔慶會, 고종후高從厚 등의 의병장들과 경상도‧전라도 등지에서 왜군을 물리치는 데 많은 공훈을 세웠다. 그리고 진주성이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 도장都將에게 말하기를 “호남은 국가의 근본이요, 진주晉州는 호남의 근본이니 진주를 수비치 못하면 어떻게 사직社稷을 보전하리오.”하고 바로 진주로 입성入城하여 성문을 사수하다가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성이 함락되자 그가 탄식하기를“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하고 장렬히 싸우다순절하였다.1605년 선무원종공신에 록선되고,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증직되었다. 1627년(인조 5) 좌승지에 추증되었다.그의 출생지인 복룡사에 제향 되었으나 1868년 훼철되고, 1914년 그 터에 유허비와 용호재를 건립하였다.1962년 1월에 증좌승지성와 범공순의비贈左承旨省窩范公殉義碑를 광주광역시 북구생용동 129-1번지(모산 마을)에 건립하였다. 비의 규모는높이 310㎝ 폭 61,5cm 두께31cm이다. 출전 호남절의록, 광주읍지, 광주시사, 조선명신록, 북구 역사인물, 광주의 문화유적,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더보기
top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