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운계雲溪 안종락安鍾洛<효자,열부>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에게 몸 바쳐 효도한 “운계雲溪 안종락安鍾洛”


 안종락(1889~1963)는 일제강점기의 효자. 호는 운계雲溪. 본관은 죽산

竹山. 아버지 안규홍과 어머니 서산류씨의 아들로 광주 북구 생룡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평소에도 남다른 효성을 보였으며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

지자 명의와 명약을 구하여 치료에 힘쓰는 한편,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아버지의 추한 옷을 남이 알지 못하도록 새벽을 틈타 직접 세탁하고 변 맛

을 보아, 병세를 살피는등 오년 동안이나 온갖 궂은 일을 하면서도 싫어

하지 않았다.

친상에는 상례를 따라 정성을 다하고, 3년 거상을 성실히 거행하였다.

향당에서 천거하여 성균관의 표창을 받았다.

1998년 3월에 죽산 안씨 오치 대종중에서 운계거사죽산안공기효비雲

溪居士竹山安公紀孝碑를 광주광역시 북구 생룡동 산 100번지에 건립하

였다. 비의 크기는 높이 210c㎝, 폭 61cm, 두께 31cm이다.

                                                        碑文

盡人之職을 謂之孝也而其道有二하니 一曰常行耳니 曾關之孝가 是也

요 一曰奇行耳니 雪笋泳鯉之孝가 是也라 然이나 常行은 可勸可勉而致

也오 奇行은 不可勸勉而致也니 國朝之褒奇行而貶常行이 固所不可而孝

子도 역不可而常奇行而忽常行也니라 謹按컨대 公의 諱鍾洛이며 字應夫

요 號雲溪라 竹山安氏는 高麗竹城君諱元衡의 后라 曾祖의 諱仁壽요 號

梧隱이니 壽職通政이요 祖의 諱錫煥이오 考의 諱圭洪이며 號春圃요 妣

는 瑞山柳氏로 萬根의 女니 高宗乙丑九月二十八日生公而公이 自幼로

異凡하니 與群兒遊戱에 輒先歸曰恐父母待也라하고 及讀小學에 定省寒

燠과 便軆順志를 必欲遵書中所言古人之美行하여 甘毳之具를 必躬檢

而進之하며 拱手立床頭하여 待食下然後에 退食하고 日夕으로 備述見聞

之細鎻하여 以供悅聽하며 其父偶以風症으로 委席에 有以名醫名藥으로

指之者면 不愕遠路而必訪之하여 不顧重價而必求之하고 且以衾之汚穢

로 欲不視于人目하여 晨必滌之에 雖子女請代나 不許하고 凡如是者五六

星霜而始終如一하며 及其劇에 嘗糞하여 以驗勢之緩急하고 遭艱則攀

號擗踊을 幾至于滅性하며 稀粥苦塩而三年을 不口菜果하고 墨面蓬首

而三年을 不爲櫛沐하며 敞衣破機而三年을 不着綿絮하고 寢處를 不離

苦廬而暫不卸經帶하며 신혼선묘하여 獰風甚雨에 未嘗廢하고 每當忌辰

에 哭泣을 如袒括時하며 懼水火之犯軆魄하여 求吉壙改葬하고 因親癠

而多識妙方하여 有求者면 往往投藥見效로데 未嘗受其報하니 莫非孝

之推也니라 光復後甲辰正月八日卒하니 子男은 東淳相淳이요 孫男은 秉

植秉鎭秉昌秉萬秉錄秉南秉龍秉學이라 日에 東淳이 與鄕老泥隱高云錫

으로 抱公善狀과 及四掌管成均館答通而來하여 懇懇求文하여 曰王章

久熄에 無地可旌이라 然이나 惟不泯者는 士論在也니 與之治一貞珉하여

紀其實行하여 竪于宅里 하여 以之羹墻于來後而矜式乎行路면 無乃爲不

可乎아 不安得辭之口哉리오 顧今西潮淊天하고 三綱이墜地하여 虞庭五

敎와 周家三物을 茫不知何代美譚하니 于此之時에 立此之碑는 非惟使

爲婦女者로 有所勸戒也라 將以愧夫世之冠冕鬚髥之忘本背親而自命爲

丈夫人者也로다.

                        丁丑 四月 初旬坡平 尹丁鍑 撰1998. 3.

                                          長興 高光烈 書

                                    竹山安氏梧峙大宗中 謹竪



출전 지산 향토지리지, 광주의 문화유적, 북구 문화유적조사, 광주 향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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