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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렬공 정지(景烈公 鄭地 : 1347 ~1391년)
    정지장군은 36세 때 해군사령관이 되어 왜구토벌의 총지휘를 맡았으며, 재상의 자리에 올라 여러 도에 전함을 만들자고 조정에 건의했고, 양광 · 전라 · 경상 · 강릉의 육군총지휘관까지 겸하여 9전 8승하여 왜구의 소탕에 공을 세웠다. 그리고 대마도정벌을 자청하였으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후 고려왕조가 몰락하고 그 세력이 이성계에서 몰리자 우왕의 복위를 꾀하고 사직을 지키려다 경주와 청주에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고려왕조가 몰락한 후 광주로 돌아와 충의를 지켰다. 이성계는 조선왕조 설립 후에 장군의 능력을 인정하여 수도의 책임자(판개성부사)로 임명되었으나, 장군은 병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다가 한을 품은 채 45세 때 병사했다. 나라에서는 경렬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후손들은 북구 청옥동의 묘지 밑에 경렬사를 지어 장군을 추모하고 있다. 시에서는 농성동 농촌진흥원에서 광주역 사이의 도로를 경열로라고 이름을 지어 정지장군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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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애 범세동(伏厓 范世凍 : 연대미상)
    범세동은 고려말 사람으로 정몽주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간쟁의 책임자인 간의대부가 되었다. 선생은 도덕과 의리가 뛰어났는데,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의 신진사대부들이 이성계를 추대하여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이에 맞서 충절을 지켰다.선생은 고려왕조가 멸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절개를 지켰는데, 이성계가 이곳에 불을 지르자 고향 땅인 광산군 본량면 복만동에 내려와 은거하였다. 태종은 선생을 대사성(국립대총장)으로 임명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저술 활동에 힘썼다.원천석과 함께 화해사전(華海師全)을 저술하여 동방성리학의 근원을 살폈으며,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를 저술하여 동방의 인물들을 소개하였고,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자손들이라는 허왕된 주장을 반박하기도 했다. 선생의 충절은 조선시대의 사육신이나 퇴계 이황 그리고 상촌 신흠의 칭송을 받으며 선비정신의 지주가 되었고, 유림의 추천을 받아 광주 생룡동 복룡사(伏龍祠)에 모셔 매년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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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상(朴祥) : 1474 ~ 1530
    박상은 전라도도사(전라도부지사) · 홍문관의 요직을 거쳤으나 노부모 봉양을 위해 향리인 담양의 부사를 자청하여 봉직했다. 그러나 연산군의 척족을 탄핵하여 해직되자 선비가 나아갈 때가 아니라하여 고향에 은거하였다. 박상은 중종반정 후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 이 중종비 신씨(愼氏)를 몰아내고 국정을 좌지우지하자 순창군수 김정과 함께 중종왕후의 복위를 건위하다가 혁명세력의 보복으로 남평에 유배당했다. 그 후 복직되어 충주목사가 되었고 기묘사화를 맞아 많은 선비들이 살해되고 유배 또는 은거하게 되었는데, 박상은 직접 연루되지 않았으나 그들과 뜻이 맞아 김안국이나 김세필 등의 기묘명현 등을 보살피는데 최선을 다했다. 선생은 나주목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저술을 남기고 제자들을 길렀는데, 그의 동국사략(東國史略)은 강직한 선비정신과 정의감을 모아서 저술한 역사서이고, 그가 가르치거나 교류한 후학들로는 하서 김인후, 면앙정 송순, 소쇄원 양산보, 제봉 고경명, 석천 임억령 등이 대표적이다. 후손들은 서창면 절골과 송정리의 솔모리(素村) 송호영당 주변에 살고 있으며, 월봉서원에 배향하여 매년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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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경명(高敬命) : 1533 ~ 1592
    고경명(高敬命)은 광주 남구 대촌 출신으로 문과에 장원하여 요직을 거친 후 향리에 은거하였다. 왜란이 일어나 팔도가 유린당하자 의병을 일으켜 전주 외곽인 금산을 탈환하기 위해 800여 의병으로 공격하다가 아들 고인후, 종상관 유팽로 등과 함께 순국했다. 선조께서 제봉의 구국정신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임금님이 직접 내린 사당 포충사가 광산구 원산동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분을 주인공으로 모시고 있다. 시에서는 제봉 고경명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남광주역 사거리에서 장동로타리와 대인광장을 지나 광주역에 이르는 도로를 제봉로로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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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신, 의병> 무등산의 익호장군 충용군 조선 의병의 총수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
    김덕령(1568. 선조 원년~1596. 선조 29) 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자는 경수景樹. 시호는 충장공忠壯公. 본관은 광산. 아버 지 김붕변金鵬變과 어머니 남평반씨의 3 남 3여 중의 둘째 아들로 광주 충효동石 底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종조인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 로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17세에 향해鄕 解(초시)에 합격하고, 18세 때 담양에 사는 흥양이씨 부인과 혼인하였다.20세에 형 김덕홍金德弘과 함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월 형 덕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의 막하에 참여하여 전주에 이르렀을 때 형이 너는 돌아 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권고에 따라 고향에 돌아와 무등산에서 무예 를 닦고 주검동鑄劒洞에서 무기를 만들어 전쟁터로 보급하는 등 후방에 서 지원활동을 하였다.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대패함에 따라 조정에서 호남에서 유능한 장수를 뽑아 경상도로 보내기로 하여, 어머니 상중에 있는 김덕령을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과 장성현감 이귀李貴가 추천하고, 전라도순찰사 이정암(李廷馣 1541~1600)의 조정에 천거가 있은 뒤, 12월 27일 분조인 전주 무과 시험장에서 수많은 수험생들 앞에서 무예 시범을 보임으로써 국가와 백성들이 인정하는 장수가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곧 바로 세자(광해군)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군호를 받고 왕(선조)으로 부터 충용군忠勇軍이란 호칭을 받게 된다. 1594년 1월 22일 담양을 출발하여 남원에 도착하여 남원사람 최담령崔 聃齡을 별장으로 삼고, 군사훈련을 시킨 다음, 함양, 산청을 거쳐 4월 초 진주 대곡면 대곡리에 도착하여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이때 조정에서는 작전상의 통솔과 군량 조달 문제로 각처의 의병을 혁 파하여 충용군에 통합함에 따라 조선의병의 총수가 된다. 이로써 의병장 이 되어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영남 서부 지역의 방 어 임무를 맡았다.왜적의 전라도 침입을 막기 위해 진해, 고성 사이에 주둔하며 적과 대치 했으나, 이때 강화 회담이 진행 중이어서 별다른 전투 상황도 없고 군량도 부족해 예하 3,000여 명 가운데 호남 출신 500여 명만 남기고 모두 귀농 시켰다. 그해 10월 거제도의 왜적을 수륙 양면으로 공격할 때 선봉장으로 활약해 적을 크게 무찔렀다.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왜적을 기습, 격퇴하였다.그 뒤 진주에 둔전을 설치하는 등 장기전에 대비해 출전의 채비를 갖추 었지만, 강화의 추진으로 출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울화가 생겨 과음하고 군법을 엄하게 해 막료, 군졸 간에 불평의 소리가 높았고, 조정에서도 실망한 나머지 그에 대한 논의가 빈번히 제기되었다. 1595년 12월, 김덕령은 엄격한 군율 적용하여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 의 노복을 장살한 살인죄로 체포 구금되지만, 영남 유생들의 상소와 정탁 鄭琢의 변호로 무고가 드러나 왕의 특명으로 이듬해 2월 말 석방된다.1596년 7월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원수 권 율의 명을 받아 진주에서 운봉까지 진군했다가, 이미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돌아가려 했으나 허락받지 못해 진주로 돌아왔다. 이때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체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과 모속 관募粟官 한현韓絢의 무고로 최담년, 곽재우, 고언백高彦伯, 홍계남洪季 男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에 정탁, 김응남金應南 등이 무고를 힘써 변 명했으나 20일 동안에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1596년 8월 2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당시 장군의 나이는 겨우 29세였다. 장군이 죽기 직전 옥중 생활의 심정을 한탄하면서 ‘춘산모퉁이’를 노래 했는데 현대어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춘산에 불이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의 내 없는 불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이 시조는 억울한 누명을 내(연기) 없는 불에 비유해 산불은 끌 수 있으 나 자기의 몸속에 붙어 타오르고 있는 억울한 마음의 불은 끌 수 없음을 비유하여 한탄하는 의기가라 하겠다. 그는 체구가 작지만 날래고 민첩하며 신용神勇이 있어, 용력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다. 1661년(현종 2)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숙종 4)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1681년(숙종 7)에 다시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1710년에 봉사손인 김수신金守信도 녹용 되었다. 1785년(정조 9) 충장忠壯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지고, 3년 뒤인 1788년(정조 12) 의정부 좌참찬에 추증 되고 ‘정려와 충효리 표리비’를 하사하고, 부조특명不祧特命: 국가에 공훈 이 있는 인물의 신주를 영구히 사당에 제사 지내게 하던 특전이 내려졌다. 1789년(정조 13) 또다시 종1품 관직인 좌찬성左贊成에 가증되었다. 1678년(숙종 4) 광주의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 되었으며, 1680년에 의열사義烈祠로 사액 되었다. 이 사우는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1975년 2월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1023(광주광역시 북구 송강로 13) 에 충장사로 복원하여 건립하였다. 경내에는 김덕령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사우 충장사, 동재와 서재, 은륜비각과 해설비, 유물관, 충용문, 익호문 등이 세워져 있다. 유물관에는 중요민속자료 제111호로 지정된 <김덕령 장군> 의복과 장군의 묘에서 출토된 관곽, 친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사당 뒤쪽 언덕에는 김덕령의 묘와 묘비가 있으며 가족묘도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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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충신(鄭忠信) : 1576 ~ 1646
    정충신은 비록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출중한 재주와 행동이 민첩하여 왜란 때는 광주목사 권율을 도와 공을 세웠다. 또한 중앙으로 올라간 후 이항복을 도와 외교문제 해결에도 큰 공을 세웠으며, 후일 권율의 사위가 되었다. 인주반정 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켜 서울이 함락되자 정충신은 이괄의 난을 평정하고 서울을 탈환하였다. 정묘호란이 발생하여 왕이 강화도로 피난하자 장군은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출전하여 사직을 지켰다. 국가로부터 장군은 금남군으로 봉해져 광주의 중심가를 그 칭호를 따서 금남로로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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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상의(全尙毅) : 1575 ~ 1627
    전상의(全尙毅)장군은 광주출신으로 정묘호란 때 귀성부사로 평안도의 군사 중심지 안주를 지켰다. 안주는 평안부사 남이홍 · 안주목사 김준이 중앙을 막고 장군은 남영인 백상루를 지키는데, 남공과 김공이 세가 불리하자 탄약고를 폭파시키고 죽자 장군은 백상루에서 최후까지 접전하였으나 죽음이 임박하자 자살하였다. 그 후 경렬사에 배향되었으나 지금 화암동에 충민사를 짓고 성역화 했다 .광주고등학교에서 사구동에 이르는 거리를 구성로로 이름을 지어 전상의장군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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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백련(許白鍊) : 1892 ~ 1977
    의제 허백련은 진도출신으로 한국 근 · 현대 회화사에서 전통적 형식의 남종화풍(南宗畵風)을 전승한 화가이며, 조선시대 말기 남종화풍을 토착화 시켰던 소치(小癡) 허련(許鍊)(1809~1892년)의 방손(傍孫)이다. 허련의 아들 허영(許瀯)(1850~1931년)에게서 기본적인 필법을 익히고 상경, 도일을 통하여 화업을 쌓았으며 전통 남종화의 화풍과 정신을 고수하는데 전력하였다. 1938년부터 광주에 정착하여 서화 전승의 진작과 후진양성을 목적으로 한 연진회(鍊眞會)를 발족시켰다. 그 후 국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을 역임하였으며, 농촌지도자의 육성에 뜻을 두고 삼애학원(三愛學院)을 설립하였다.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 확립하기 위하여 단군신전건립위원회를 발족하는 등 지역사회발전에도 공이 컸다. 무등산 증심사 밑 계곡 우측 산록에 위치한 춘설헌(春雪軒)(지방기념물 제5호)은 그의 작은 우주이자 화실이었다. 이곳은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잦은 문화의 산실로서 잘 활용되고 있으며, 현재에도 남화의 맥을 잇고자 하는 많은 한국 화가들이 드나들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시에서는 의재선생의 한국화발전에 끼친 공을 높이 평가하고 일반시민들이 쉽게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기 위하여, 시립박물관에 상설전시실인 ‘허백련기념관’을 1992년 개관하고 11점의 작품을 전시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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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용철(朴龍喆) : 1900 ~ 1938
    용아(龍兒) 박용철은 1900년 송정 솔머리에서 부농의 아들로 출생하여 광주서중, 배제고를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 청산학원, 동경외국어대 독문과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고교시절부터 지하신문 ‘목탁’을 발간하여 항일독립정신을 고취시켰고, 일본유학시절 김영랑과 교류하였으며 가정형편이 어려운 한국유학생들을 돌보기도 하였다. 자비로 월간문예, 시문학, 문학 등의 잡지를 간행하였다.1923년 귀국하여 시작(詩作)에 전념하고 1930년에는 서울에서 정지용과 함께 ‘시문학’이라는 잡지를 만들었으며, 1937년 ‘청색지’라는 순수문학잡지를 간행하였다. 또 일제하의 민족계몽에 온 정력을 쏟았으며 대표작품으로 ‘떠나가는 배’, ‘빛나는 자취’ 등의 명작이 있다. 우리나라 현대문학계를 대표하는 한사람으로 초기시단을 빛낸 용아를 기리기 위해 광산구 소촌동에 있는 그 생가일원이 지방기념물 제13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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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방울(林芳蔚) : 1904 ~ 1961
    판소리의 명창 임방울은 광산구 도산동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소망에 따라 14세 때 박재현 문하에서 춘향가와 홍보가를 배웠고 뒤에 유성준으로부터 수궁가, 적벽가를 배웠다. 선천적으로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성량이 매우 풍부하였다. 오랫동안 판소리를 수련한 그는 25세 때 상경하여 송만갑의 소개로 처녀무대에서 춘향가 가운데 ‘쑥대머리’를 불러 크게 인기를 얻었다. 이것을 계기로 쑥대머리를 비롯한 많은 음반을 내었는데, 특히 일본에서 취입한 쑥대머리는 우리나라, 일본, 만주 등지에서 100여만 장이나 팔렸다.일제 때에 그는 이화중선과 더불어 가장 인기 있는 명창이었으나 판소리의 사설에는 치밀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많은 음반 가운데 춘향가에서 ‘쑥대머리’, 수궁가에서 ‘토끼와 자라’ 대목은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또한 그의 소리는 박귀희(朴貴姬), 한애순(韓愛順), 신평일(申平日), 김용준(金龍準), 성우향(成又香) 등이 이어 전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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