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총 14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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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마을지도자 황영규黃永圭<현대인물>
- 마을 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새마을지도자 황영규黃永圭”
- 황영규(1929-2004)는 대한민국 경찰. 새마을지도자. 본관은 인동. 황형길의 장자로 광주 북구 용강동 신평(새터)에서 출생하였다.1951년 장흥경찰서 유치지서 근무. 1970년대 신평 새마을지도자 및 마을 이장을 하면서 마을 골목길 넓히기사업, 담장 및 지붕개량사업 등을 유치하여 마을 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데 기여하였다.민주공화당 등 정당 활동을 하면서 지산지역 위원장을 십 수 년간 역임하고 지역의 현안 문제를 해결하는데 앞장섰다.지산농협 이사로 십여년 이상 활동하였으며 오랫동안 광주서부경찰서지산파출소 명예파출소장을 지내면서 지역민의 민원과 애로사항을 해결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주었다.새마을 지도자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지산관내에서 지역 유지로서명성이 있었다.-자미(紫薇)골 역사인물 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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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산仁山 정환영鄭煥永<현대인물>
- 대한신경외과학회 학술상’을 만든 신경외과 의원 “인산仁山 정환영鄭煥永”
- 정환영(1927~2017)은 대한민국의 신경외과의사.호는 인산仁山. 본관은 하동. 생부 정윤식鄭潤植의장남이고, 양부는 정만식鄭萬植이다. 광주 북구 양산동 양지 마을 출신이다.1949년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6·25전쟁 직후 1951년 입대해 1965년까지군 복무 중 1959년 일반외과 전문의(277호), 1963년 신경외과 전문의(3호), 자격을 취득했다. 1965~1966년까지 고려의대 신경외과학 교실 조교수로 있을 때 의학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1966~1972년 연세대 의대 교수, 1978~1979년 대한신경외과학회 회장,1984~1985년 대한 미세수술학회 회장, 1984~1990년 범태평양 외과학회본부 부총재 및 한국지구 총재 등을 역임했다.1972~1992년 한양의대 교수, 1986~1987년 한양대병원장, 1992년 한양의대 명예교수를 하였다.1991년 대한 척추신경외과 학회 명예회장, 1997년 대한 최소 절개 척추외과 학회 명예회장, 1998년 대한신경외과학회 명예회장, 2002~2005년국제 최소 절개 척추외과 학회 회장 등 학술적으로도 국내외에서 활발한활동을 펼친 바 있다.정년퇴임 후에는 근로복지공단 중앙병원장(1992~1993년)·가천의대 길병원 척추신경치료연구소장 겸 제1신경외과장(1993~1998년)으로 활동하다가 2000년부터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서 ‘혜화신경외과의원’을 개원하였다.정천기 서울의대 교수(서울대병원 신경외과)가 아들이고, 딸 정효숙 씨도 혜화신경외과의원에서 아버지와 함께 환자를 진료하던 신경외과 전문의다. 아버지와 아들·딸 등 한 가족의 3명이 모두 신경외과 전문의인 보기드문 집안이다.2004년 혜화신경외과의원 원장인 그가 대한 신경외과학회에 1억원을기탁해 학술상을 설립했다.출전 지산 향토지리지, 의협신문.--자미(紫薇)골 역사인물 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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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산月山 정의식鄭義植<현대인물>
- 대한민국 경찰공무원, 정치가 “경찰공무원 월산月山 정의식鄭義植”
- 정의식(1920~1999)은 대한민국의 경찰공무원.호는 월선月山. 본관은 하동. 정해붕鄭海鵬의 4남으로 광주 북구 양산동 양지 마을 출신이다.1951년 전남 경찰국 공보실장, 영광경찰서장(1952. 01. 06~1952. 08. 23), 영암경찰서장(1953.02. 28~1953. 03. 24)을 역임하고, 그 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광주 제5선거구에서 자유당으로 출마 당선되어 제2대 전라남도 의원(1956~1960)으로 전남도의회 2대 의장을 하였다. 호남비료 감사로 재직하였다.1986년 LA 한국노인회장, 1989년 아리랑 노인 아파트재단 이사장, 평통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출전 지산 향토지리지, 전라남도 의회사.-자미(紫薇)골 역사인물 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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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락포樂圃 정인식鄭仁植<현대인물>
- 제2대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 6·25때 납북당한 “국회의원 락포樂圃 정인식鄭仁植”
- 자미골 역사인물 읽어보 정인식(1911~1951 납북) 대한민국의 제2대 국회의원. 호는 락포樂圃. 본관은 하동. 정해붕鄭海鵬의3남으로 광주 북구 양산동 양지 마을 출신이다.경신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산군 지산면장, 광산군농민회장, 국민회 광산군지부 부위원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서 활동했다.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광산을, 국민당)에 당선되어 6·25가 터지기 직전인 1950년 6월19일 2대 국회가 개원하여 공식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지 1주일 만에 전쟁을 맞이했다. 2대 국회는 6·25 남침 사실을 듣고이튿날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출석시켜 긴급 상황을 청취한 다음 6월27일 국방부 장관과 참모총장을 불러 긴박한 전선 상황을 듣는다.이때 두 국방의 주역은 “북한 괴뢰군이 남침을 감행했지만 용감한 국군의 반격으로 퇴각중이며 우리 군대 사기는 드높아 38선은 물론 평양까지도 마음만 먹으면 진격할 수 있다.”고 코미디 같은 답변을 했다.이에 고무된 국회는 유엔과 미국에 메시지를 보내기로 하고 <수도 사수결의안>을 채택한다. 아무 정보도 갖고 있지 못한 국회가 국방부 장관과참모총장의 말만 믿었는데, 이미 포천을 지나 동두천을 점령한 인민군의대포 소리는 의정부를 육박하고 있을 때여서 수도 사수 결의는 우스갯거리가 되고 말았다.그런데 정부는 6월 28일 대전으로 이전한다. 이런 경우 최우선적으로정부와 함께 떠나야 하는 기구가 국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단 한마디 전화통보도 없이 자신들의 짐만 챙겨 도망갔고 6월 28일 한강다리를폭파시키고 만다.2대 국회의원 210명 중 148명은 눈치 빠르게 피난길에 올랐지만 62명은넋을 놓은 채 서울에 남아있다가 세 의원은 피살되고, 그리고 27명의 국회의원은 북한으로 납치되거나 행방불명으로 분류되는데 그 중 24명은납북자로 확인되나 3명은 지금까지 행방을 모른다. 서울에서 체포되지 않고 숨어 있다가 수복 후에 다시 복귀한 이는 32명인데 피난길에 원인불명으로 사망한 사람도 5명이나 된다.한국 전쟁 때 24명의 국회의원이 북한으로 납치되었다. 이후 그의 행방은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을 맡았다가 1958년 12월 평북 의주 농목장으로 이주하였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북조선에서는 정인식이 한국 전쟁 중인 1951년 이미 사망하였고, 평양 룡성구역의특설묘지에 묻혀 있다고 밝혔다.출전 지산 향토지리지, 납북인사 북한생활기, 아오지의 한.-자미(紫薇)골 역사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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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석松石 정윤식鄭潤植<현대인물>
- ‘전라남도 국민회’ 추진 위원 송석松石 정윤식鄭潤植
- 정윤식(1903~1986)은 대한민국의 유학자. 본관은 하동. 호는 송석松石.해붕海鵬의 차남으로 광주 북구 양산동 양지 마을 출신이다.송사 기우만 문인으로, 대한민국의 민주 독립국가 발전에 획기적 국민운동을 전개하고자 지난달 31일까지에 각 부·군·읍·면 지부 결성을 완료한, 본도 국민회國民會 추진위원회에서 1949년 4월 3일 오전 10시 중앙국민교 대강당에서 각급 지부·분회 대표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도본부 결성 대회를 개최하였다. 임시집행부를 선출하고 규약을 통과시킨 다음 도본부 위원장 1명, 부위원장 2명의 선출에 이어 도위원회를 열어 도상임위원 33명을 선출하고 하오 3시경 원만히 끝마쳤다. 피선된 임원은 위원장에 최종삽崔鍾涉 부위원장에 고광표高光表 김용환金容煥이 그는 33인의 도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전대기성회 이사 및 감사를 역임하고, 전남향교재단 감사 및 이사를 거쳐, 광주향교 모성회장, 1968년부터 1976년까지 광주 유도회장을 하면서 광주 유도회안儒道會案을 창간하였고, 광주향교 전교 및 도유사를지냈다.저서로 『송석집松石集』, 『송석시집松石詩集』이 있다.출전 지산 향토지리지, 광주 향교지, 광주유도회안.-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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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양수산부장관 장승우張丞玗<현대인물>
- ‘여수세계박람회’ 기본계획을 수립한 “해양수산부장관 장승우張丞玗”
- 장승우(1947~2010) 대한민국 공무원. 본관은 인동. 전 광주시장 장형태張炯泰의 아들로 광주 북구신평 마을 출신이다.1966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0년 서울대학교 상학과 졸업했다. 1985년 미국예일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1970년 행정고시(7회)에 합격하고, 경제기획원 종합기획과장 공보관을거치며 그는 평소 정이 많아 부하직원들의 신망을 받고 있으며 논리가 정연한 경제기획통으로 기획원에서 잔뼈가 굵어 정책기획에 일가견이 있다.특히 잘못된 것은 솔직하게 인정하고 비판하는 강직한 성격이어서 큰일을할 것이라는 평을 받아왔다.그는 1977년 대통령비서실 경제비서관, 경제기획원 공정거래심사관, 정책조정국장, 경제기획국장, 재정경제원 제1차관보, 인도네시아 대사관 등을 두루 거치면서 인정을 받아, 1994년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문위원이 되었다.1996년 통계청장 1997년 해양수산부 차관, 2002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2003년 기획예산처장관, 2004년 해양수산부장관 등 국무위원을 거쳤다.그리고 2005년 동원금융지주 상임고문, 2005년 한국 투자금융 그룹 지주회사 의장 겸 회장을 역임하고, 2005년 순천대 석좌교수로 봉직하였다.그는 여수세계박람회 유치가 국가계획으로 확정될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내면서 여수세계박람회 기본계획과 유치 로드맵을 총괄한 경험이있어, 국토해양부는 이에 따라 해양수산분야의 전문성을 갖춘 인물을 물색해 왔으며 장 전 장관이 적임자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2008년 3월 2012 여수세계박람회 조직위원장으로 임명되어 2009년 4월 건강이 악화해 사표를 낸 뒤 조직위 고문으로 활동해 오다. 2010년 1월 타계하였다.재직 기간인 1994년에 홍조근정훈장을 받았고, 정부에서는 그간의 공훈을 기려 2012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하였다.출전 나무위키, 지산 지리지, 광주시사, 전라남도지.-자미(紫薇)골 역사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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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양中洋 장형태張炯泰 <현대인물>
- 광주시장 때 금남로 확장공사를 한 대한민국의 공무원·회장 “중양中洋 장형태張炯泰”
- 장형태(1929~2013)는 대한민국의 공무원·사장. 호는 중양中洋. 본관은 인동. 광주 북구 용전동 신평마을 출신이다.광주사범학교(현 광주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1948년 광주 지산공립국민학교 교사로 공직생활을시작하였다. 이후 면서기로 근무하면서 공부를 하여 1958년 고등고시 행정과(10회)합격하였다.여러 부서의 관직을 두루 거쳐 1968년 5월 1일부터 1969년 5월 6일까지광주시장으로 재직할 때 금남로 확장 공사를 계획 확장함으로써 광주시도시계획에 큰 성과를 거두는 치적治績을 남겼다.1971년 8월 7일부터 72년 7월 12일까지 부산시 부시장을 역임하고,1972년 7월 16일부터 1973년 7월 8일까지 전라남도 부지사를, 1978년 9월 21일부터 1979년 1월 10일까지 내무부 지방행정연수원장을 지냈다.1979년 1월 11일부터 1980년 5월 27일까지 전라남도지사로 재임할 때1980년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 25일 오후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이 비행기 편으로 광주에 도착, 전교사를 방문하고, 광주시민에게 할 방송을녹음한 뒤 서울로 올라갔다.이 자리에서 소준열蘇俊烈 사령관은 최 대통령에게 “아무래도 작전을해야겠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최 대통령은 “그러면 시민들이 많이 다칠텐데…”하고 걱정했다고 한다. 최 대통령이 장형태 전남도지사의 의견을묻자 장 지사는 군의 재진입에 반대하는 뜻의 이야기를 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장 지사의 견해를 심하게 비판했다고 한다.그는 시민군과 계엄군 간 협상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자 도지사직을 사임하였다.1982년 ㈜해양도시가스 회장, ‘84년 4월 17일부터 87년 2월 23일까지(사)한국도시가스협회장, ㈜BIT 회장을 지냈다.1988년 2월 4일 문교부는 조선대 정상화를 위해 장형태張炯泰 전 전남지사, 안용섭安龍燮 전 전대법대 학장, 고재기高在騏 서강전문대 학장, 박태상朴泰相 60년대 해직교수, 이덕수李德水 변호사, 신용호申龍浩 언론인 등 7인으로 초대 임시이사를 선임함으로써 첫 회의를 열고 장형태를이사장으로, 안용섭을 행정담당 상임이사로 박태상을 재정담당 상임이사로 선출하여 체제를 갖추고 학교 정상화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그는 2010년 1월 타계한 아들 장승우 전 기획예산처 장관을 대신해2011년 1월 순천대에 인재 양성과 교수연구비 지원에 써달라며 발전기금1억 원을 기탁했다.저서로 『지방재정법해설』, 『내무행정 질의응답집』, 『명량해협의 해전과 통제사 이순신-논문』 등이 있다.출전 나무위키, 지산 지리지, 광주시사, 전라남도지.-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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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강渡江 이기수李基壽<현대인물>
- 지산면 각 학교에 성금을 쾌척한 대한민국 사업가 “도강渡江 이기수李基壽”
- 이기수(?~?)는 대한민국 사업가. 호는 도강渡江. 본관은 전주全州. 경섭炅燮의 아들로 광주 북구 본촌동 출신이다.어려서부터 채모體貌가 준수하고, 기량이 마음속 깊이 생각하고, 의견이 다른 사람보다 출중하여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먼저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구와 사이가 도탑고 서로 화목하였다.23세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공업에 종사하여 수년간의 고생은 다말할 수 없고 사업이 융성하고 번창하여 전력을 다하여 각종 기업을 경영하여 크게 성공을 하게 되었다.평소 예로부터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우리 지방의 지산면 각 학교에 성금을 모두 지급하였고, 또 1974년 지산출장소 청사 신축 기금 일부인 삼백만원을 희사하여 모든 공사가 이른 시일 안으로 완성을 보게 하였다. 그야말로 뜻이 있으면 마침내 일은 이루어진다고 하였으니 어찌 장하지 않으며 어찌 위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아 옛적부터 경륜經綸을 가진 호걸들이 만금萬金의 자산資産에 인색하지 않고 후세에 전할 덕업德業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해 보게 되었고, 가까이는 향리에서 본받게 하고, 멀리는 나라와 백성에 혜택을 미칠 수 있으니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가 바라건대 그런 사람에 해당할 것이아니겠는가. 이로써 삼가 비석을 세우고 선행을 기록하여 영원한 세대까지 없어지지 않게 협조하여 그 일을 공사추진위원들이 주관하였다.명하기를서석산에 맑은 구름 위대한 이름과 짝을 하니,극락강 물 근원이 풍부해 남은 물이 흘러가네.천신이 도와 뒤에 반드시 복이 있으리니,진실을 알고자 하다면 이 돌에 세긴 비문을 보라.노문영盧文永 짓고 쓰다도강 이기수시혜비渡江李基壽施惠碑는 1974년전주 이씨 문중에서 광주광역시 북구 본촌동 349-1번지(본촌동 종합건설 본부 내)에 건립하였다.비 의 크 기 는 높 이150cm, 폭 55cm, 두께23cm로 되어 있다.출전 북구 문화유적, 광주의 문화유적.-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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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호瑞湖 이명룡李明龍<현대인물>
- 대한민국 교육자, ‘서호장학재단’을 설립한 장학재단 이사장 “서호瑞湖 이명룡李明龍”
- 이명룡(1903-1990)은 호는 서호瑞湖. 본관은함평. 세종 때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지낸 긍兢의후예로 광주 북구 오치동 출신이다.그는 1928년 광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낙안공립보통학교 훈도(교사)를 시작으로 1941년 광주 지산국민학교 교사, 1943년 지산동 국민학교 교사와 효동국민학교 교사를 거쳐, 1946년 다도국민학교 교장에서 청풍국민학교 교장으로 전보되어 1949년 고달국민학교 교장으로 퇴임하였다.사회활동으로 1963년 민주당 광주 을구당 부위원장, 1968년 신민당 전라남도당 인권위원장을 1970년 광주 유도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1977년민주통일당 전라남도 1지구당 대표위원을 역임하였다.그는 가난으로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인재 양성이 지역발전의 근본이라는 믿음으로 실력 있는 학생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하고, 1981년 본인의 호를 딴 서호장학재단과 서호 유치원을 설립하고, 교육사업에 전념하였다.1990년 서호 선생이 타계하자 아들 이재신(1927-2013) 선생이 이 사업을 물려받아 운영하였다. 장학재단의 운영 기간에 수혜 인원 103명에 총지급액 8,386만원이 지원되었다.2013년 남편이 작고하자 그의 부인 박경신 여사가, 장학 재단은 2014년서호장학재단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삶의 터전이었던 오치동 957-19번지일대의 소유 부동산을 광주교육대학교에 기부함으로써 지역사회 인재 양성이라는 서호장학재단의 설립 목적을 광주교육대학교 장학재단의 주관으로 그 뜻을 이어가게 되었다.기부된 재산은 건물 16개 동 연면적 2.431㎡, 부지면적 3.334㎡이고, 감정평가금액 30억6천4백만원 상당이다. 이 재산은 2014년 6월 26일에 광주교육대학교 발전기금재단으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한편 시아버지와 남편의 유지를 길이 받들고자 그의 교육 관련 유품을 함께기증함으로 광주교육대학교에서는 감사하는 마음을 표함과 동시에 서호 기념관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학교 내 박물관에 두분의 숭고한 뜻과 정신을기리고자 기념관을 조성하여 유품을 전시하였다.출전 광주교육대학교 박물관도록-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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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암尼庵 송한수宋漢守<현대인물>
- 사재를 털어 공익사업에 헌신한 “이암尼庵 송한수宋漢守
- 송한수 (1925~?)는 대한민국의 농민. 자는 한수漢守. 호는 이암尼庵. 본이름은 재욱在旭. 본관은 은진恩津. 후청後淸 진헌辰憲의 아들로 광주북구 태령동 학림촌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독실하고 효우孝友가 지극하였으며 지기志氣가 강직剛直하고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다.그는 농업에 종사하면서 1965년 담양군 봉산면 와 우리 평야 하단 농지 20여만평을 한해에 방지하기 위해 당시 누구도 감히 개혁하지 못한 저수시설을동지들과 함께 추진 완성하여 몽리민들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1979년에도 태령지구 농지의 수리세 인하와 도로의 포장에 많은 공로를 인정받아 동민들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근년에는 향리의 지방도로를 신설하여 동민들의 교통을 편리케 하고 이지방 농토의 침수를 방지하기 위하여 기존의 협소한 배수로를 확장하는데 심력을 다하였다. 이와 같은 공익사업을 추진하면서 가사를 되돌아보지 않고 개인 재산을 출연, 중앙정부와 지방 관서를 출입하여 청원하는 등 적극적인 노력을하였고, 또한 동민들을 계도하고 향풍을 북돋우는 데도 많은 공로가 있어바르게살기운동 광주광역시 북구협의회로부터 공로패를 받기도 하였다.그의 공적비는 1992년 7월에 광주광역시 북구 태령동 48-11번지에 건립하였으며 비의 규모는 높이 253cm, 폭 55cm, 두께 25,5cm 크기이다.출전 지산 향토지리지, 북구 문화유적, 광주의 문화유적, 이암송공한수기적비문.-자미골역사인물-읽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