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충민공忠愍公 전상의全尙毅<충신,의병>
정묘호란때 안주성에서 장렬히 싸우다 순절한 “충민공忠愍公 전상의全尙毅”

 


   상의(1575~1627)는 조선 중기의무신. 자는 희원希元 또는 환중桓仲.

호는 구성龜城. 본관은 천안天安. 전용全蓉의 아들로 광주 서구 구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력이 남달리 뛰어났으며 화재 서당에서 박붕

朴鵬에게서 수학하였다. 말타기와 활 쏘는 솜씨가 뛰어나 그의 나이 29세 때

인 1603년에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주부를 거쳐 함경도 갑산도호부 운총

만호, 평북 강계도호부의 고산리첨사, 경기도 통진 현의 덕포첨사, 내금위

예차預差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 7월에 오윤겸과 함께 회답사回答使로 일본에 건너가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150여 명을 송환해 오는데 큰 공을 세우고 돌

아왔다. 1618년(광해군 10) 8월에 대궐의 경비를 맡아 보는 어모장군, 행

중무위겸사복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개천군

수로 좌천되었다가 1625년(인조 5) 구성도호부사 겸 좌영장이 되어 반란

으로 폐허가 된 관아를 정비하고 군사를 점검하는 등 변방의 방어에 최선

을 다했다.

  1627년 1월 14일 후금(청) 태종이 3만 대군을 몰고 의주까지 진출하여

파죽지세로 남하한다는 소식을 듣고 평안도 병마절도사 남이흥南以興

과 안주목사 김준金浚, 구성 도호부사 전상의 등이 안주성에 모여 청천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방어 전략을 수립하고, 남이홍과 김준은 중영中營

을 지키고 전상의 장군은 남영南營인 백상루百祥樓에 진을 치고 지키게

되었다.

1월 18일 백상루 위에서 적진을 바라보니 적병이 점점 가까이 옴에 따라

일시에 적을 공격하니 포성은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날 적병은 크게 패하

여 일시 후퇴하였다가 전열을 가다듬어 대군으로 다시 침범함에 장병들

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으나 중영이 적에게 함락되어 남이흥과 김준이

순절하였다. 더욱이 군량이 고갈되고 원병이 오지 않자 전 장병과 함께 죽

기를 결의하고 누상에 올라 적을 맞아 5일 동안 싸우다가 그 또한 장렬히

순직하고 말았다.

 1627년(인조 5) 2월 7일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으며,

시신은 안주로부터 출생지인 광주로 옮기어 동년 7월 26일 무등산 북쪽 능선인 평두

산에 예장禮葬하였다. 1684년(숙종 10) 안주의 충민

사忠愍祠에 배향되고, 1849년(헌종 15) 광주 경열사景烈祠에 배향되었는

데, 1868년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977년에는 광주 지

역민들의 뜻을 모아 장군의 묘소를 지방문화재 기념물로 지정하고, 1985

년 그의 묘소로 가는 곳에 충민사를 건립하여 배향하고 있다.

충민사에는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을 비롯하여 수의문, 정려

각, 장군의 유물을 전시한 유물관 등이 있다. 또한 광주고등학교에서 사구

동에 이르는 거리를 <구성로>로 명명하여 그 이름을 기리고 있다.



출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북구 역사인물, 구성공 전상의장군 실기, 인조실록,

매산집, 북구 문화유적, 광주읍지.


-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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