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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가 이주상李周庠<독립운동가>
    광주의 독립 만세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이주상李周庠”
     이주상(1867~1948)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광산. 이종욱李鍾郁의 아들로 광주 북구 일곡동 일동 마을 출신이다.1919년 3월 10일 광주만세운동에 그는 광주의 주도 인물들과는 아무런 관련 없이, 두 아들 윤호允鎬, 창호昌鎬를 선두에 세운 다음 수백 명의근처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서 대거 합세했다. 이들은 일곡과 생용 등지에사는 이씨와 범씨, 노씨들이었다. 이렇게 시위군중이 모여들자 숭일 수피아 학생들은 선언문과 태극기 등을 나누어 주었으며, 지도자들은 큰 태극기를 높이 들고 군중을 인도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니, 장꾼들이 모두 호응하여 온 시장은 만세 소리로 떠나갈 듯하였다.그는 광주 만세운동에 참가한 이유로 둘째 아들 창호와 1년 징역형을선고받고 대구감옥에서 복역 중 집행유예를 받고 먼저 출감하였다.그 후 음력 6월, 평양의 국민회 회원인 장공섭張公燮으로부터 국민회취지서와 규약서를 전달받고 그 취지에 찬동하여 전라남도 각 지역에 국민회를 조직하고자 결의하였다. 이어 자신의 집에 모인 허원삼許元三, 최종렬崔鍾烈, 김양숙金良淑 등 8명에게 국민회 취지서와 규약서를 설명하고 그 취지에 찬동하는 사람을 국민회에 입회시키고 다시 새로운 회원을가입시키고 입회비를 모금하도록 권유하여 승락을 받았다.그리고 윤 7월 그의 집에서 이동섭李東燮 외 7명에 대하여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기 위해 국민회가 조직되었으니 이에 가입하고 각자 1원의 입회비를 납부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할 것을 설득하였다. 이와같이독립운동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1920년 6월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1919. 3. 1. 독립활동으로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시사, 대구복심원판결문, 국가보훈처 공훈록.-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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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가 양순희梁順喜<독립운동가>
    광주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한 수피아 여학생 “독립운동가 양순희梁順喜”
     양순희(1901~미상)는 대한 독립운동가. 본관은 제주. 광주 북구 중흥동출신이다.그는 수피아 여학교 학생으로 1919년 3월 10일 광주 부동교 아래에서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광주 만세운동은 3월 1일 서울에서 거족적인 만세운동의 물결이 일어난뒤 닷새 뒤인 3월 6일 광주 양림동의 남궁혁 목사 집에서는 김철 박애순교사 외에 12명의 애국지사가 모여 광주의 독립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준비하는데 박애순 교사는 수피아 여학교 학생 동원을 맡아 양순희 등 여학생 60명을 데리고 만세운동에 동참하게 되어 3월 10일 광주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의 불길에 참여하였다.이날의 시위는 광주지역 학생들과 기독교인, 그리고 군민들이 함께 조직적으로 전개하였다. 수피아 여학교 학생의 참여는 교사 박애순 진신애 등이 인솔 아래 양순희, 박영자, 최경애 등 20여 명의 학생과 함께 양림동 쪽에서 광주천을 따라 시위행진을 하였다. 오후 2시부터 5시경까지 시위를이어가던 일경에 체포되었다.일본 경찰의 가진 고문과 심문 끝에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 같은 해 8월 11일출옥하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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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병장 양동골梁東骨<독립운동가>
    형인 양진여와 함께 의병투쟁을 한 “의병장 양동골梁東骨”
      양동골(1885~1961)은 대한제국기 의병장. 이명異名은 서현瑞賢. 서영瑞永. 본관은 제주. 의병장 진여振汝의 동생으로 광주 북구 중흥동 출신이다. 1907년 이원오李元五, 조경환曺京煥, 양상기梁相基, 김현길金玄吉 등과 함께 광주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08년 2월 광주 출신으로 의병을 일으킨 양진여 의병대에 동료 의병 30여 명과 같이 합진하여 활약하였다. 1908년 2월 양진여 의병장의 지휘 아래 동료 의병 5~6명과 함께 전남 광주군 갑마보면甲馬保面의 친일 면장面長 집에 들어가군수품을 징발하였다.  1908년 7월 5일 양진여 의병진과 같이 총기로 무장하여 광주,담양 등지를 근거로 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며 활동하다가 일경에붙잡히어 동년 12월 25일 대구공소원에서 유형 3년을 선고받고,1909년 1월 13일 대심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고향에 은거해 지내다1961년 6월 20일에 사망했다. 2016년 11월 14일 오늘의 독립운동가로 지정 출생일을 기념하 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기 위해,1986년 대통령 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묘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2 묘역 216호에 안장하여 추모하고있다. 그 묘비문에는책장마다 血痕으로 얼룩진 우리의 민족사는 고난과 투쟁의 기록이다.풍운의 한말 국가존망이 百尺干頭에 처했을 때 구국의 旗幟를 들고 민족 흔을 남김 없이 발휘했던 의병군 東家食 西家宿 風餐露宿 三年여놈들의 쇠사슬에 囹圄의 몸 고통의 나날 님의 憂國衷情은조국광복에 촛불 되어 이 江山 밝혔으니 그 혼 靑史에 빛나리 고이 잠드소서출전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 433면, 대구공소원 판결문.-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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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죽雪竹 양상기梁相基<독립운동가>
    부친과 함께 의병투쟁을 하다가 교수형 당한 “설죽雪竹 양상기梁相基”
     양상기(1883~1910)는 한말 의병장. 보명譜名은병기秉奇. 호는 설죽雪竹. 본관은 제주. 1883년 10월 10일 광주군서양면 이동(현. 광주시 북구 중흥동)에서 의병장 양진여梁振汝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1891년 8세에 장성 하청산 정이암 수학도에게 학문을 배우다가 국운이기울여지자 학업을 중단하고 부친이 세운 담양군 대전면 삼인산 뒤편에풍정암風征菴에서 22세까지 병서와 무예를 연마하였다.1905년 우리나라 군대인 진위대에 입대하여 병사로 활동하였다.1907년 정미 7조약이 체결되어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어 진위대를 나와고향으로 돌아왔다. 부친과 의병을 모집, 왜적을 도모할 계획을 세우면서화승총 1천정과 대완구 15문을 구할 것을 약속하고, 위장하여 광주경찰서 순사가 되었다. 왜경이 되어 약속한 무기를 구해 보내며 기밀을 탐지하다가 정체가 발각되어 파면 체포령이 내릴 기밀을 알고 탈출하였다.1908년 4월 부친의 의병에 가담, 정훈과 교육을 담당하는 훈련대장직을 맡았다. 그 후 5월에 광주, 창평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 독립부대를 창설하고 의병장이 되어 참모장에 유병기劉秉淇, 도총장 안판구安判九, 후군장 이문거李文擧, 포군장 안영숙安永淑, 도선봉장 조사윤曺士允이 임명되었다.동복 화순 곡성 담양 등지에서 친일역도를 처단하고 일본군과 싸웠다.11월에 부친의 원병요청을 받고 200여명의 의병을 인솔, 담양 대치에 도착하여 전해산 부대와 합류, 900여 의병군을 모아 야간훈련을 실시하였다.1909년 3월 화순군 서유촌(현, 화순군 북면 서유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크게 무찔렀다. 다음 5월 17일 담양 덕실(현, 담양군 무정면 덕곡리)에 도착했을 때 같은 마을에 거주하는 정황두丁黃斗 밀정이 담양 수비대에 제보하여 담양, 옥과, 창평 등지의 일군, 헌병, 경찰의 공격으로 교전 1시간여에 겨우 탈출했으나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었고, 참모장 유병기는팔에 부상을 당하였다. 그 후 동복, 창평, 옥과 분견소와 담양 수비대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는 등 많은 보복전을 전개하였다.1909년 8월 남한대토벌작전으로 부친이 체포된 4개월 후인 12월 24일밤에 전북 남원군 통한면 도통리 민가에서 토벌대와 교전 끝에 체포되었다. 남원경찰서에 구속되었다가 광주감옥으로 이송되었다.1910년 대구감옥으로 다시 이송되어 5월 17일 대구공소원에서 귀순할의사가 없느냐는 물음을 받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귀순할 뜻은 추호도 없으며 죽음이 있을 뿐이다. 만일 살아날 수 있다면 다시 의병을 일으켜 침략자와 싸우겠다.”하였다. 교수형의 선고를 받고, 6월 16일 대구복심원에서 교수형이 확정되었다.이에 8월 1일 향년 27세로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유해는 매제인정병모에 의해 인수되어 현재 광주광역시 서구 매월동 151-9번지에 안장되었다.1977년 12월 13일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건국포장을 받고, 1990년 12월 26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2011년 광주광역시 북구에서는 도로명 주소를 부여하 면서 그의 의병활동을 기리기위해서 임동 신안교에서 일곡동 동아아파트 뒤편 일곡교차로까지의 도로명을 ‘설죽로’라고 명명하였다.그밖에 양진여, 양상기 부자의 의병활동의 내용은 전남폭도사, 판결문, 의병열전,한국독립운동사, 매천야록,한국인물대사전 등에서 볼수 있다.출전 양진여·양상기 의병장 실기, 전남폭도사, 판결문, 의병열전, 한국독립운동사,매천야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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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암瑞菴 양진여梁振汝<독립운동가>
    호남의 의병투쟁에 헌신한 의병장의 대장 “서암瑞菴 양진여梁振汝”
      양진여(1860~1910)는 한말 의병장. 아명兒名은 석환錫丸. 보명譜名은 진영振永. 호는 서암瑞菴. 본관은 제주이다. 1860년 5월 11일 광주군 서양면 이동(현, 광주시 북구 중흥동)에서양남중梁南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72년 13세에 장성 하청산 정이암鄭李庵에서 10년간 공부를 하고, 학문연구와 과거준비에 전념하였다.1895년 왜놈의 손에 민비가 시해되자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움을 알고과거를 포기하고, 담양군 대전면 삼인산 뒤편에 풍정암風征菴을 세워 병서와 무예를 연마하였다. 이 때 모여진 제자가 300여명에 이르렀다.1904년 2월 23일 한일 의정서가 강제 조인되자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처가 마을인 장성군 갑향면 행정리(현, 담양군 대전면)에 주막을 차렸고, 이어서 주점을 각 군마다 1개소씩 10여곳을 두었다.1907년 정미 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가을에 의병모집 격문을 각지에 돌려 300여명의 의병이 모집되어 창의대장에 추대되고 도총장에 안판구(본명 안영옥), 중군장에 박성일, 우익장에 김익지, 좌익장에 김처중, 포대장에 윤평원을 결정하고, 마침내 선생은 그해 10월 전남 담양군 대치산을 근거지로 거의 함으로써 의병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광주·담양·장성 등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선생의 의병투쟁은 선생의 의병부대 단독으로, 때로는 전해산, 강판열 의병부대와 연합의 진을 형성하여 이루어졌다.1908년 2월 김태원 장군의 원병요청으로 우익장 김처중 외 50여명의 의병을 보내 무동촌(현, 담양군 남면 무동리) 전투에서 왜장 요시다吉田少佐를 죽이고 많은 전과를 얻었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동년 10월 26일 단독으로 광주군 송정읍 신촌리에서 일본군 및 순사대를 공격하고, 11월 14일에 일본인 우체부를 담양군 오치면에서 처단한 일이 있었다. 나아가 연합군의 편성은 화순 동복에서 온 200여명의 양상기 부대와 영광에서 온전해산 부대 200여명, 영산포에서 온 강판열, 김태원 장군의 우익장 조경환 부대 100여명 등 900여명의 의병이 연합부대를 조직 장성, 담양을 습격한 뒤, 11월 23일 대치산에서 일본군 광주 수비대를 대파하였다. 그 후의병의 모집과 군자금 조달 및 정보 수집 차 20여명을 인솔하고 각 지방의주막을 순회하고, 광산군 서창면 만호리 이회춘李會春의 집에 유숙하고,담양 본 진으로 귀대하던 중 가막골(현, 광주시 광산구 송정동 신촌)에서나가고지中小路 군조의 합동수색대 일본 헌병 7명, 왜경 4명과 1시간 동안 공방전을 치르고 본 진으로 귀환 후 본 진을 담양에서 장성 북하면 약수리로 옮겼다. 12월 25일 야마다山田 소위가 이끈 토벌대의 매복 기습으로 부상을 입었다.1909년 일제는 2,260명의 대병력을 호남에 투입 남한대토벌 작전을 개시하여 호남 일대를 유린할 때 양진여 의병장은 장성 갑향면 행정리(현,담양군 대전면) 주막에서 총상을 치료하던 중 8월 25일 오후 병상에서 왜군 헌병 정찰대에 급습을 당하여 체포되었다. 광주경찰서에 수감 되었다가 광주감옥을 경유 대구감옥에 이송되었다.1910년 3월 5일 대구 공소원 형사부에서 교수형이 선고되고, 4월 13일대구 복심원에서 교수형이 확정되었다. 이에 5월 30일 대구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51세로 순국하였다. 그러나 순국 당시에도 선생은 “한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형을 받고 죽으니 유감”이라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이를 보면 선생이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겠다. 유해는 사위인 정병모에 의해 인수되어 현재 광주광역시 서구 매월동 산 151-9번지에 안장되었다.1977년 12월 13일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어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 받았다. 1992년 10월 29일 광주광역시는 서암 양진여 의병장의 출생지를 통과하는 서방4거리에서 전대4거리를 거쳐 동운고가도로까지 3,2㎞를 양진여의병장의 호를 따서 서암로瑞菴路라 가로명을 지정하였다.2000년 5월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하신 양진여 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이달의독립운동가 양진여 의병장 공훈선양 학술강좌를 5월 6일 독립기념관 독립관 교육장에서 순천대학교 홍영기 교수의 발표가 있었다.출전 양진여·양상기 의병장 실기, 전남폭도사, 판결문, 의병열전, 한국독립운동사,매천야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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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암夢菴 신덕균申德均<독립운동가>
    왜놈들에게 피살당해 순국한 지리산 피아골의 의병장 “몽암夢菴 신덕균申德均”
     신덕균(1878~1908)은 대한제국기의 의병장. 자는 정효正孝. 호는 몽암夢菴. 초명初名은 덕순德淳. 본관은 평산. 아버지 신태수申泰洙와 어머니옥천장씨의 아들로 광주 북구 우산동 416번지 출신인데 1891년에 각화동277번지로 옮겨 살았다.일찍이 장등동에 사는 진사 장석헌 張錫憲 문하에 입문하여 학업에 열중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그 후 기우만奇宇萬과 간재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에 뛰어났다.27세 되던 1904년에는 각화리에 낙고정사樂古精舍라는 서재를 짓고 향유들과 대의를 강론하고 충의효제를 권장하니 인근에서 추종을 원하는사람이 많이 모여들었다.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뒤 최익현崔益鉉의 창의 격문을 받아 동지를규합, 기회를 엿보던 중 1906년 6월 최익현, 임병찬이 태인에서 호남의병을 일으킬 때 달려가서 참여하려 했으나 의병이 쉽게 패하자 중단하였다.그는 1907년 1월에 창평에서 고광순高光洵이 의병을 일으켜 화순을 점령하고 동복으로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촌 아우인 상철相徹과 같이부하들을 이끌고 달려갔으나, 고광순의 병대가 도마치圖馬峙 전투에서패하여 해산해 버리자 전세가 불리하여 광주로 돌아와 재기의 날을 기다렸다. 1907년 8월 고광순 의진에 들어가 종사관이 되었다. 이때 의진의 맹주에 고광순이 추대되었고, 부장 고제량, 선봉장 고광수, 좌익장 고광훈, 우익장 고광채, 참모 박기덕·고광문, 호군 윤영기, 종사 신덕균·조동규 등이었다. 처음에는 40명 규모였으나, 곡성에서 포수와 무기를 수습하여 70명으로 증원되어 남원으로 이동하려 하였으나 물거품이 되었다. 고광순은1907년 8월 군대해산으로 일제의 국권 침탈이 노골화하자 고광순은 험지인 지리산 피아골에 유진하고 그곳을 의병 기지로 하여 일본군과 항쟁하였다.1907년 9월 14일 고광순 의진은 그의 제의에 따라 일본인이 많다고 알려진 동복읍을 습격하여 적들을 궤산시키고, 그는 하동 화개동으로 들어가 한달 동안 의병훈련을 시행하며 의병 모집에 힘썼다.이때 고광순은 구례 연곡사에 본영을 정하고 의진의 부서를 개편하였는데 그는 참모가 되었다. 그러나 10월 17일 고광순 의병대는 광주수비대 및진해만 요새 포병대와의 연곡사 전투에서 부하 의병들과 함께 장렬하게순국하고 말았다.6)그는 화개에 있을 때 병력과 무기가 부족하여 윤영기尹永淇와 함께 광주에 가서 해산군인들을 모집하여 그 수가 40여 명이 확보되어 병력을 거느리고 구례로 가는데 도중에서 고광순 의병대의 패배 소식과 고광순 등의 전사 소식을 듣고, 독자적으로 지리산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하게 되었다.그는 1908년 초에 의병대를 정비하여 3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화개6) 홍영기 「한말 고광순의 의병활동과 지리산 근거지론」, 『역사학 연구』P47, 2012.花開로 진군하다가 왜적30여 명을 무찌르고 지리산을 종횡하면서 적과 전투를 벌였다.그는 주장을 잃었기 때문에 이제 독자적인 활동을 펼 때가 왔지만, 일본군의 거센 추격을 모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그는 지리산에서 호서의병장 윤내린尹乃隣, 전승화全勝化를 만나 산포수 수백명과 합세하여 벽소령을 넘어 함양 마천의소정·백모·두산 계곡에 진지를 설치하고서 버티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독자적인 활동을 위해 새로이 진영을 편성했다. 고태원(전주 출신)을 선봉장으로, 신보현(순창)을 참모장, 채영찬, 채상순(순창)을 좌우익, 양춘영(순창), 조공삼(순천)을 후군, 임화지(순창), 황창균(무주), 유장열(고창), 양치언(남원), 임당(태인), 김태권(태인)을 중군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는 중의에 의해 대장이 되었다.그는 의병장이 되어 10여명의 장수와 3백여 명의 의군을 거느렸지만 군수와 무기가 없으므로, 부장에게 군무를 맡기고 광주로 돌아와 전답을 팔아 군기를 마련한 다음 부대로 돌아왔다.  마침내 진영을 순창 회문산으로 옮기고, 이어 군사를 거느리고 정읍 내장사로 들어가 참봉 김태원金泰元을 서로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도독都督이 되고, 김태원은 선봉이 되고 그 아우 김율은 호군이 되었다. 이때 격문을 지어 각 군에 보내고, 김태원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순창 회문산으로 되돌아와 무기를 감추어 둔 곳을 찾은 즉, 간상배들이 적을 끌고 들어가 모두 가져가고 포나 창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김태원과 더불어 서로 개탄해마지않다가 다시내장산으 로 돌아왔다. 이때 김태원은 장성 백양사에 집결하여장성읍을 공격하여 우편 취급소장 남부룡오랑南部龍五郞을 처단한 후 영광·나주 방면으로 향했기에 그와 헤어지게 되었다.1908년 11월이 되자 그에게 드디어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의사 1백여명을 모집하여 11월 1일에 길을 떠나 담양읍으로 들어가 성의북쪽 민가에서 유숙하고, 2일에 순창 귀암사에서 자고, 3일에 장성 백양사에 당도하여 천지신명에게 제사 지냈다. 그리고 피곤한 군사들이 포를옆에 두고 휴식하는 시간이므로, 대오隊伍도 정해 있지 않았고 회문산의무기가 유실되었으므로 군의 세력도 역시 축소되어 있는데 갑자기 일본군이 쏘아대는 총탄이 비오듯하니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민가로 들어갔다.그는 적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5일에 정읍으로 압송되니 길가에서 보는 자는 모두 그 붙잡혀 가는 행색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6일 정읍 감옥 수용되었다가, 7일 정읍 고부의 두승산斗升山에서 적에게 피살 순국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시사, 광주북구지, 평산신씨 광주·전남사,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동록.-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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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병장 송학묵宋學黙<독립운동가>
    장렬하게 처형당한 대한 제국의 지략가 “의병장 송학묵宋學黙”
     송학묵(1871~1910)은 대한제국 시절에 의병장. 자는 자화子化. 본관은홍주洪州. 래영來永의 아들로 광주 북구 용두동 거진 마을 출신이다.1905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하고 1907년 10월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여 극락강 상류 삼각산 요처에서 의병을 훈련하고 있는데 왜병이 포위하여 온다는 정보를 듣고 적과 10리쯤의 거리를 두고 백주에 강을 건너 서쪽으로진군하였다. 이를 고지에서 관망한 왜군은 어둠을 타고 추격하니 적의 전략을 미리 알고 북으로부터 다시 회군하여 자기 진지로 돌아와서 훈련을계속하므로 부하들이 그 전략에 감복하였다. 그곳에서 훈련을 시키는 도중 일본군에 포위되자 진중이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므로 그는 소리 높여“만약 혼란을 일으키면 대사大事를 그르칠 염려가 있으니 나의 계책에 따르라.”하면서 “한 시각 후에 남산 위에서 총소리가 나면 동쪽으로 탈출하라.”라고 명령을 하고 단신으로 어디론가 사라진 뒤 과연 한 시각 후에 남산에서 총성을 내어 적을 그쪽으로 유인하여 의병은 한 사람도 다친 사람없이 모두 동쪽으로 탈출하여 전원이 무사했다.그 후 김동수金東洙 의병장 부대에 소속돼 활동했는데 김동수 부대는1909년 같은 해에 신용동 복룡 마을 등지에서 보급품을 확보했고 광주군덕산면(현. 서구 유촌동 일대)에서 친일 면장 등을 처단했고, 광주와 담양주둔하고 있는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 그 활약이 컸다.그는 적정을 탐색하기 위해 단총을 몸에 품고 단신으로 적의 경비망 안으로 들어갔다가 도중에 일본 기마병과 마주치게 되어 그의 등 뒤를 쏘아사살하고 총검을 노획하여 돌아왔다.그런데 1909년 3월로 접어들면서 전국의 의병은 불리하게 되거나 살상당해 그 전력이 크게 쇠퇴하였는데, 그는 마침내 짙은 안개 속에서 적과싸우다가 체포당했다.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적을 꾸짖으면서 탈옥을 위해 맨주먹으로 감옥을 부수다가 실패하였다.1909년 늦가을에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적이 최후의 유언을 묻자, “내가 비록 너희들 칼 앞에 쓰러지나 조금도 유감이 없다. 내가 죽은 뒤에 내 넋이 너희 나라에 들어가 너희 국민을 도륙할 것이니 너희 나라가 망하는 날 나의 혼이 길이 살아있음을 알리라.”라고 꾸짖고, 1910년 5월에 처형당했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0년에 건국훈장을 추서했다.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시사, 홍주송씨대동보, 한국독립운동사, 광주지방법원판결문.-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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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석小石 범윤두范潤斗<독립운동가>
    광주 독립 만세 운동에 주도한 “소석小石 범윤두范潤斗”
    범윤두(1891~1958)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호는 소석小石. 본관은금성. 소강小岡 범치준范致駿의 차남으로 광주 북구 생용동 출신이다.대서소 직원으로 근무하던 그는 1919년 3월 10일 광주 작은 장날을 이용하여 김강金剛, 김철金鐵, 최병준崔丙浚, 최한영崔漢泳 등이 주동하여전개한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당시 광주는 경성부에서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 도쿄 유학생인정광호가 귀국하여 동경에서 일어난 2.8 독립선언 거사 사실을 청년들에게 알려, 2.8 독립선언서를 최한영, 김복수 등이 등사하여 두는 등 일찍부터 독립만세운동이 싹트고 있었다.한편 고종황제의 국장國葬에 참례하기 위하여 상경했다가 경성부의 만세 시위를 목격했던 김철과 서울 유학생인 최정두崔正斗가 3월 5일 귀향하여 이날 밤 남궁혁南宮赫의 집에서 김강, 최병준, 최한영, 황상호黃尙鎬, 강석봉姜錫奉, 한길상韓吉祥, 최영균崔瑛均, 김용규金容奎, 서정희,김태열金泰烈, 홍승애洪承愛, 손인식, 송흥진 등과 만나 경성부의 독립만세 시위 정황을 전하고, 광주의 큰 장날인 3월 8일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각 학교 학생이나 시민들의 시위 참가 연락 등 사전 준비를 분담하여 추진하였다. 그는 이때 최한영, 최정두, 한길상, 김용규 등과 함께 선언서와 태극기의 준비를 맡았다. 그러나 준비기일이 너무 짧아서 작은 장날인 3월 10일 오후 3시 30분으로 거사 계획을 변경하고 독립선언서, 경고문, 독립가獨立歌 등을 밤낮을가리지 않고 인쇄하였다.3월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不動橋 아래의 작은 장터에는 기독교인, 숭일학교, 수피아 여학교, 광주농업학교 학생이나 일반 주민 등 1천여 명의시위군중이 모이자, 그는 다른 동지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며 큰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장 안을 행진하였다. 점점 시위군중이 늘어나고, 시위대열이 시장에서 읍내로 빠져나가 만세 시위를 계속할 때 일본 헌병·경찰은 시위군중의 기세에 눌려 시위를 제지하지 못하였다.그러나 이날 저녁 무렵 시위군중이 읍내를 돌아 경찰서 앞에 이르자 많은 경찰과 기마 헌병이 출동하여 김철 등의 주동자를 연행해 가는 것을보고 그는 격노한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서 마당으로 돌진하여 독립 만세를 부르면서 연행자를 석방하라고 외쳤다.그러나 일본 경찰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자 일단 피신하였다가 2차독립 만세 시위를 위하여 3월 17일, 18일 이틀에 걸쳐 송정면 선암리(현광산구 선암동)에 있는 박경주의 집에서 독립선언서와 경고문 각 1,500여매와 독립가獨立歌 500여 매를 등사하여 목포 등 인근 지역에 배포하는등 계속하여 독립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에 발각되어 수배를받고 피신하였다.그러나 그해 6월 1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궐석재판으로 열려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장기간에 걸쳐 고통스러운 피신 생활을 하다가 1933년경에 붙잡혀 투옥(수형인명부1-1933년 6월 6일, 수형인명부2-1933년 9월 15일)되었는데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1958년 5월 10일 별세하였다.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출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독립운동사, 광주지방법원판결문, 광주시사.-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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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가 박창규朴昌奎<독립운동가>
    광주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박창규朴昌奎
     박창규(1887~미상)는 대한 독립운동가. 본관은 밀양. 전라남도 화순군동면 대포리 출신으로 1900년 초에 광주 북구 중흥동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짓고 살았다.기미년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의 호응으로 광주에서는 1919년 3월 10일 부동교 아래 강변 모래밭에서 ‘독립 만세운동’을 일으켰다.이날 만세운동의 중심에는 학생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숭일학교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은 사전에 독립선언서 배포, 수피아 여학교 학생들은 태극기 등을 제작했다.그는 이날 독립 만세운동의 소식을 듣고 광주교에 가서 만세 행렬에 동참하여 대한 독립을 외쳤다.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광주지방법원, 광주경찰서 등 일본 관공서를 방문하여 대한 독립을 주장했다.이때 일본 당국자들은 독립 주장을 무력으로 짓밟았다. 여기서 적지 않은 시위 참가자들이 폭행을 당했다. 그는 일본 당국의 무력 진압과정에서체포되었다.일본 경찰의 가진 고문과 심문 끝에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고, 감옥살이하고 풀려났다.정부는 2019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출전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광주지방법원 판결문.-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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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가 민성숙閔成淑<독립운동가>
    광주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민성숙閔成淑”
     민성숙(1890~미상)은 대한 독립운동가. 본관은 여흥. 광주 북구 중흥동출신이다.그는 하는 일 없이 집에 있었는데 1919년 3월 10일 ‘독립 만세운동’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우편국 앞에 나가 ‘만세운동’의 대열을 보고 대열에합류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다.당일 ‘대한독립 만세운동’은 광주 부동교 아래 작은 장터에서 ‘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만세 시위에 동참하고자 장터에 모여든 군중은 1,000여명에 달했다. 시위군중은 광주경찰서 등 주요 관공서에 찾아가 독립을 외치며 시가지를 돌았다.그는 광주우편국 앞에서 시위 모습을 보고 대열에 합세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하다가 제지하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광주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정부에서는 2019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출전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광주지방법원 판결문.-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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