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소해蘇海 노종룡盧鍾龍<독립운동가>
을사늑약 후 항일 운동에 매진한 “소해蘇海 노종룡盧鍾龍”



 노종룡(盧鍾龍, 1856~1940)은 유학자. 독립운동가. 자는 치운致雲.

호는 소해蘇海. 면수勉修. 농아聾啞. 본관은 광산. 돈녕부 도정

농암聾巖 노재규盧在奎의 아들로 광주 일곡동 출신이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고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과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7의 문하에 들어가 부지런히 학문과 덕행을 수학하였다.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의 통치권을 일본에 빼앗기고 식민지가 된 국

치國恥를 당하자 통곡하고 수차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해 북구 일

곡동에 소해정蘇海亭을 짓고 은둔하면서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 송사

松沙 기우만奇宇萬,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 난와難窩 오계수吳繼洙,

녹천鹿川 고광순高光珣, 신암愼庵 노응규盧應奎, 제현과 도의의 교제를

맺어 학문을 논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스승인

송병선이 자결한데 뒤이어 스승인 최익현이 일군日軍에 잡혀 대마도에서

순절함에 그는 통곡으로 장례을 마친 뒤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척사위정

斥邪衛正의 대의大義로써 누차 상소를 올려 오적五賊을 물리치고 나라

를 보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 농아聾啞라 호를 고치

세상 일과 인연을 끊고 광주 일곡동 농암정聾岩亭 아래에 소해정蘇海

亭을 짓고 제현들과 학문을 논하였다.

  1905년 11월 12일에는 기우만에게 편지를 보내 나라를 보전하는 방책

을 논의하고, 1916년 송사 선생 상례 때 당위掌位로 참석하였으며, 1924

년 담대헌을 중건할 때 220냥을 성금으로 내었다.

그는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려면 먼저 후진육성이 시급한 일이라 생각하

여 전국 노씨삼능단대종회, 삼일계, 보본계 등을 조직하여 항일정신 고취

와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한편 항일 투쟁을 하다가 옥에 갇혔으나 뜻을 굽

히지 않았다. 1915년에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쟁하고 1919년에 사림 수천

명을 동원하여 순종황제의 복위를 위해 노력하였다. 삼대독자인 아들 또

한 항일투쟁으로 일본 관헌으로부터 갖은 고문을 당하고 있어 통분 속에

서 아들의 출옥을 보지 못하고, 1940년 5월 23일 타계하였다.

그의 문인과 향내鄕內 유림이 그와 그의 스승 송병선의 유풍을 추모하

여 1944년 일곡동에 만주사晩州祠를 세워 배향하였다.

소해유고蘇海遺稿는 그의 아들 진영軫永이 1941년에 고광열高光烈의

서와 1948년에 종생宗生 노철수(盧澈秀 1871~1951)의 발을 받아 출간하

려고 했으나 여의치 못해 다시 여기에다 1959년 고윤주高允主의 후서後

序, 1960년 송재성宋在晟의 묘표墓表를 받아 1960년에 발간하였다.

만주사晩洲祠는 일곡동 514번지(소해로 11)에 위치하며 1959년 광주노

씨 문중에서 건립하였다. 건물의 형태는 3단의 화강석 기단을 쌓고 정평

주초를 놓아 원주의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현판은 윤희상尹喜祥이 썼다.

창호는 들어열개의 4분합문이며 내부의 천정은 단청이 잘되어 있고 굴도

리를 올린 2고주 3량가 집이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지붕은 골기와 맞배지

붕이다. 창호중앙에는 태극 청판을 부착했고 좌우측에 소슬대문이 나있

으며 흙석 혼합의 담장이 둘러져 있다.

경내에 소해정은 만주사 강당으로 경의재景義齋라고 개칭하여 오늘날

만주사 경의재로 사용하고 있다. 만주사묘정비晩洲祠廟庭碑는 1984년

10월 광주노씨 문중에서 건립하였으며 규모는 높이 275c㎝, 폭 57cm, 두

께 27cm이다. 이 밖에 농암정이 사당 옆에 있다.

일곡동 내 ‘소해로’라는 도로 이름은 그의 호를 도로명으로 지정한 것

이다.


출전 소해유고, 광주읍지, 북구 역사인물, 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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