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송해松海 노문규盧汶奎<독립운동가>
항일 독립투쟁의 우국지사 송해松海 노문규盧汶奎


 노문규(1850~1935)는 조선 말기 일제강점기의 유학자. 자는 응삼應三.

호는 송해松海. 본관은 광주. 노계열盧啓悅의 아들로 광주 북구 일곡동

출신이다.

간제艮齋 전우田愚와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등과 교유한 그는 젊은

시절 『사서오경』과 『사기』에 능통하여 향시에는 여러번 합격하였으나,

과거시험에 급제하려고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효행을 세상에 알려 정려를 받고 증직을 받는 데는 성

공했다. 1892년에 부친의 효행 사실이 조정으로부터 ‘조봉대부동몽교관’

으로 증직 정려를 받아 일곡동 361번지에 정려각을 건립하였다. 정려각은

년구퇴락年久退落되어 훼철毁撤하고, 1963년 그곳에 유허비遺墟碑를 건

립하였다.

그는 향교에서 유사를 맡은 여러 해 동안에 읍강을 진흥하고, 향약을

만들어서 54세 때인 1903년 전남 관찰부 광주부 주사(7급)에 임명되어

1905년 전남 관찰부 광주부에서 승훈랑承訓郞(六品)으로 승진했다. 그는

시사時事가 날로 좋지 않음을 보고 진취하는데 뜻을 두지 않고 사직하려

하니 도백이 만류하였고, 영암군수를 맡기려 하자 기어이 사직하였다.

1905~1910년 사이에 전개된 애국계몽단체인 대한협회 광주지회 회원

54명 중 교육부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경술국치를 슬퍼하여 항일 독립 투

쟁을 전개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7년 옥고를 치른 당시의 우국지

사였다.

그가 당시 어지러운 세태를 비관하여 자신의 종적을 숨기기 위해 농가

로 돌아와 지냈던 휴양처인 송해당松海堂이 북구 일곡로41번길 26에 자

리 잡고 있다. ‘송해’라는 의미는 그의 뜻이 솔처럼 곧고 그의 마음이 바다

처럼 넓다는 뜻으로 붙인 것이다. 송해당은 현재 민가로 사용되고 있으며

주초 위에 사각기둥을 세운 정면 4칸, 측면 2칸의 평기와 지붕으로 되어있

다. 건물 정면에는 송해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기둥마다 판각 주련柱

聯이 부착되어 있으며 당내에는 40여 개에 달하는 당시 유림들의 찬미 시

문이 편액 되어있다.

또한 일곡동의 도로이름 가운데 ‘송해로’가 있는데 이는 그의 호를 딴 것

이다. 송해는 그가 살던 집인 ‘송해당’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는데 일곡

동 361번지의 2가 송해당 자리이다. 이 집은 1906년 그의 나이 56세 때

중건한 것이다.

1924년 장성 고산서원의 담대헌 중건 때 20냥을 성금으로 내놓았었다.

1935년 5월 6일 풍질風疾로 병사한 후에 담양 수북 삼각산에 장사했다.

저서로『송해유집』 4권 1책이 석인본으로 되어있다. 1960년 국역으로

간행되었으며, 서문은 고연주高淵柱, 행장은 1938년 이범석李範錫, 묘

표는 이병관李炳觀이 썼다. 1권에는 시 70여 수, 「복록수부福祿壽賦」,

「승평성세부昇平聖世賦」, 「성학군덕부聖學君德賦」와 「공부자찬

孔夫子贊」이 있으며, 2권에는 잡저雜著로 마지막에 「금융상황金融狀

況」을 기록하였으며, 3권은 제문祭文, 행장, 4권은 부록, 부편附編이 들

어있다.

2022년 12월 9일 이 유적의 사진을 촬영차 현지를 방문하여 확인한 바

이 부지에 새로운 건축물을 짓고 있었다. 기존의 건물과 노계열의 정려 유

허비도 없었다. 현장 사진을 뒷면에 남긴다.


출전 송해유집, 승정원일기, 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 북구 역사인물.


-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top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