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12
게시물 검색 폼
  • 경렬공 정지(景烈公 鄭地 : 1347 ~1391년)
    정지장군은 36세 때 해군사령관이 되어 왜구토벌의 총지휘를 맡았으며, 재상의 자리에 올라 여러 도에 전함을 만들자고 조정에 건의했고, 양광 · 전라 · 경상 · 강릉의 육군총지휘관까지 겸하여 9전 8승하여 왜구의 소탕에 공을 세웠다. 그리고 대마도정벌을 자청하였으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후 고려왕조가 몰락하고 그 세력이 이성계에서 몰리자 우왕의 복위를 꾀하고 사직을 지키려다 경주와 청주에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고려왕조가 몰락한 후 광주로 돌아와 충의를 지켰다. 이성계는 조선왕조 설립 후에 장군의 능력을 인정하여 수도의 책임자(판개성부사)로 임명되었으나, 장군은 병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다가 한을 품은 채 45세 때 병사했다. 나라에서는 경렬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후손들은 북구 청옥동의 묘지 밑에 경렬사를 지어 장군을 추모하고 있다. 시에서는 농성동 농촌진흥원에서 광주역 사이의 도로를 경열로라고 이름을 지어 정지장군을 기리고 있다.
    더보기
  • 복애 범세동(伏厓 范世凍 : 연대미상)
    범세동은 고려말 사람으로 정몽주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간쟁의 책임자인 간의대부가 되었다. 선생은 도덕과 의리가 뛰어났는데,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의 신진사대부들이 이성계를 추대하여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이에 맞서 충절을 지켰다.선생은 고려왕조가 멸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절개를 지켰는데, 이성계가 이곳에 불을 지르자 고향 땅인 광산군 본량면 복만동에 내려와 은거하였다. 태종은 선생을 대사성(국립대총장)으로 임명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저술 활동에 힘썼다.원천석과 함께 화해사전(華海師全)을 저술하여 동방성리학의 근원을 살폈으며,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를 저술하여 동방의 인물들을 소개하였고,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자손들이라는 허왕된 주장을 반박하기도 했다. 선생의 충절은 조선시대의 사육신이나 퇴계 이황 그리고 상촌 신흠의 칭송을 받으며 선비정신의 지주가 되었고, 유림의 추천을 받아 광주 생룡동 복룡사(伏龍祠)에 모셔 매년 추모하고 있다.
    더보기
  • 눌제 박상(訥薺 朴祥 : 1474 ~ 1530년)
    박상은 전라도도사(전라도부지사) · 홍문관의 요직을 거쳤으나 노부모 봉양을 위해 향리인 담양의 부사를 자청하여 봉직했다. 그러나 연산군의 척족을 탄핵하여 해직되자 선비가 나아갈 때가 아니라하여 고향에 은거하였다. 박상은 중종반정 후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 이 중종비 신씨(愼氏)를 몰아내고 국정을 좌지우지하자 순창군수 김정과 함께 중종왕후의 복위를 건위하다가 혁명세력의 보복으로 남평에 유배당했다. 그 후 복직되어 충주목사가 되었고 기묘사화를 맞아 많은 선비들이 살해되고 유배 또는 은거하게 되었는데, 박상은 직접 연루되지 않았으나 그들과 뜻이 맞아 김안국이나 김세필 등의 기묘명현 등을 보살피는데 최선을 다했다. 선생은 나주목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저술을 남기고 제자들을 길렀는데, 그의 동국사략(東國史略)은 강직한 선비정신과 정의감을 모아서 저술한 역사서이고, 그가 가르치거나 교류한 후학들로는 하서 김인후, 면앙정 송순, 소쇄원 양산보, 제봉 고경명, 석천 임억령 등이 대표적이다. 후손들은 서창면 절골과 송정리의 솔모리(素村) 송호영당 주변에 살고 있으며, 월봉서원에 배향하여 매년 추모하고 있다.
    더보기
  • 제봉 고경명(霽峯 高敬命 : 1533 ~ 1592년)
    고경명(高敬命)은 광주 남구 대촌 출신으로 문과에 장원하여 요직을 거친 후 향리에 은거하였다. 왜란이 일어나 팔도가 유린당하자 의병을 일으켜 전주 외곽인 금산을 탈환하기 위해 800여 의병으로 공격하다가 아들 고인후, 종상관 유팽로 등과 함께 순국했다. 선조께서 제봉의 구국정신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임금님이 직접 내린 사당 포충사가 광산구 원산동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분을 주인공으로 모시고 있다. 시에서는 제봉 고경명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남광주역 사거리에서 장동로타리와 대인광장을 지나 광주역에 이르는 도로를 제봉로로 부르고 있다.
    더보기
  • 충장공 김덕령(忠壯公 金德齡 : 1567 ~ 1596년)
    김덕령(金德齡)장군은 광주 충장동에서 출생하여 종조부 김윤제와 우계 성혼에게서 수학했다. 왜란이 일어나자 형 김덕홍을 따라 고경명 의병대에 참여했다가 노모 봉양을 책임지고 귀가했다. 어머니를 여의고 형의 전사소식을 들은 장군은 내종형인 해광(海狂) 송제민의 권유와 장성현령 이귀의 천거와 전라감사의 인정을 받아 각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켰다. 김덕령장군은 왕으로부터 충용장이라는 칭호를 받고 권율원수의 지휘 하에 진주 · 고성 등지에서 왜병을 공격하였고 거제도를 총공격했는데 왜군이 성을 굳게 지켜 성과가 없었다. 그 후 장군은 모함을 받아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었다고 고문을 받다 29살의 나이로 죽게 되었다. 사후에 병조판서에 증직되고 충장공의 시호가 추증되었으며, 광주 무등산에 충장사를 건립하여 그를 주인공으로 모시고 있다. 시에서는 김덕령 장군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광주 중심지의 상징도로인 충장로 입구부터 광주일고를 지나 경열로에 연결되는 도로를 충장로로 부르고 있다.
    더보기
  • 금남군 정충신(錦南君 鄭忠信 : 1576 ~ 1646년)
    정충신은 비록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출중한 재주와 행동이 민첩하여 왜란 때는 광주목사 권율을 도와 공을 세웠다. 또한 중앙으로 올라간 후 이항복을 도와 외교문제 해결에도 큰 공을 세웠으며, 후일 권율의 사위가 되었다. 인주반정 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켜 서울이 함락되자 정충신은 이괄의 난을 평정하고 서울을 탈환하였다. 정묘호란이 발생하여 왕이 강화도로 피난하자 장군은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출전하여 사직을 지켰다. 국가로부터 장군은 금남군으로 봉해져 광주의 중심가를 그 칭호를 따서 금남로로 부르게 되었다.
    더보기
  • 구성 전상의(龜城 全尙毅 : 1575 ~ 1627년)
    전상의(全尙毅)장군은 광주출신으로 정묘호란 때 귀성부사로 평안도의 군사 중심지 안주를 지켰다. 안주는 평안부사 남이홍 · 안주목사 김준이 중앙을 막고 장군은 남영인 백상루를 지키는데, 남공과 김공이 세가 불리하자 탄약고를 폭파시키고 죽자 장군은 백상루에서 최후까지 접전하였으나 죽음이 임박하자 자살하였다. 그 후 경렬사에 배향되었으나 지금 화암동에 충민사를 짓고 성역화 했다 .광주고등학교에서 사구동에 이르는 거리를 구성로로 이름을 지어 전상의장군을 기리고 있다.
    더보기
  • 허백련(許白鍊 : 1892 ~ 1977년)
    의제 허백련은 진도출신으로 한국 근 · 현대 회화사에서 전통적 형식의 남종화풍(南宗畵風)을 전승한 화가이며, 조선시대 말기 남종화풍을 토착화 시켰던 소치(小癡) 허련(許鍊)(1809~1892년)의 방손(傍孫)이다. 허련의 아들 허영(許瀯)(1850~1931년)에게서 기본적인 필법을 익히고 상경, 도일을 통하여 화업을 쌓았으며 전통 남종화의 화풍과 정신을 고수하는데 전력하였다. 1938년부터 광주에 정착하여 서화 전승의 진작과 후진양성을 목적으로 한 연진회(鍊眞會)를 발족시켰다. 그 후 국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을 역임하였으며, 농촌지도자의 육성에 뜻을 두고 삼애학원(三愛學院)을 설립하였다.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 확립하기 위하여 단군신전건립위원회를 발족하는 등 지역사회발전에도 공이 컸다. 무등산 증심사 밑 계곡 우측 산록에 위치한 춘설헌(春雪軒)(지방기념물 제5호)은 그의 작은 우주이자 화실이었다. 이곳은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잦은 문화의 산실로서 잘 활용되고 있으며, 현재에도 남화의 맥을 잇고자 하는 많은 한국 화가들이 드나들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시에서는 의재선생의 한국화발전에 끼친 공을 높이 평가하고 일반시민들이 쉽게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기 위하여, 시립박물관에 상설전시실인 ‘허백련기념관’을 1992년 개관하고 11점의 작품을 전시해 오고 있다.
    더보기
  • 박용철(朴龍喆 : 1900 ~ 1938년)
    용아(龍兒) 박용철은 1900년 송정 솔머리에서 부농의 아들로 출생하여 광주서중, 배제고를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 청산학원, 동경외국어대 독문과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고교시절부터 지하신문 ‘목탁’을 발간하여 항일독립정신을 고취시켰고, 일본유학시절 김영랑과 교류하였으며 가정형편이 어려운 한국유학생들을 돌보기도 하였다. 자비로 월간문예, 시문학, 문학 등의 잡지를 간행하였다.1923년 귀국하여 시작(詩作)에 전념하고 1930년에는 서울에서 정지용과 함께 ‘시문학’이라는 잡지를 만들었으며, 1937년 ‘청색지’라는 순수문학잡지를 간행하였다. 또 일제하의 민족계몽에 온 정력을 쏟았으며 대표작품으로 ‘떠나가는 배’, ‘빛나는 자취’ 등의 명작이 있다. 우리나라 현대문학계를 대표하는 한사람으로 초기시단을 빛낸 용아를 기리기 위해 광산구 소촌동에 있는 그 생가일원이 지방기념물 제13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더보기
  • 임방울(林芳蔚 : 1904 ~ 1961년)
    판소리의 명창 임방울은 광산구 도산동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소망에 따라 14세 때 박재현 문하에서 춘향가와 홍보가를 배웠고 뒤에 유성준으로부터 수궁가, 적벽가를 배웠다. 선천적으로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성량이 매우 풍부하였다. 오랫동안 판소리를 수련한 그는 25세 때 상경하여 송만갑의 소개로 처녀무대에서 춘향가 가운데 ‘쑥대머리’를 불러 크게 인기를 얻었다. 이것을 계기로 쑥대머리를 비롯한 많은 음반을 내었는데, 특히 일본에서 취입한 쑥대머리는 우리나라, 일본, 만주 등지에서 100여만 장이나 팔렸다.일제 때에 그는 이화중선과 더불어 가장 인기 있는 명창이었으나 판소리의 사설에는 치밀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많은 음반 가운데 춘향가에서 ‘쑥대머리’, 수궁가에서 ‘토끼와 자라’ 대목은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또한 그의 소리는 박귀희(朴貴姬), 한애순(韓愛順), 신평일(申平日), 김용준(金龍準), 성우향(成又香) 등이 이어 전수하고 있다.
    더보기
top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