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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가 최영섭崔泳燮<독립운동가>
    광주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한 광주 보통학교 4학년 반장 “독립운동가 최영섭崔泳燮”
      최영섭(1902-미상)은 대한 독립운동가. 본관은 탐진. 광주 북구 충효동출신이다.그는 당시 광주보통학교 4학년 반장으로 1919년 3월 13일경 보통학교생도 유봉식과 같이 광주면 성저리城底里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청년들과 조선 독립운동을 시작하도록 교사를 받은 결과 동년 4월 7일 위 독립운동의 목적하에 광주 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자기가 급장級長임을 이용하여 동교 4학년생도 수십 명에 대해 ‘명 8일 아침, 조선 독립운동을 일으켜만세를 외치겠으니 일동 휴교하여 동일 상오 10시까지 자혜병원慈惠病院앞에 집합하라. 만일 이를 위배하여 등교하는 자는 구타하겠다’라고 협박하여 동일同日 일동으로 하여금 휴교케 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하였다.이상은 판시한 바와 같이 ‘성명 미상의 청년으로부터 독립운동을 일으키도록 교사받고, 4월 7일 판시 장소에서 동급생들에게 “휴교치 않으면구타하겠다”라고 협박하였다’라는 피고의 당 법정에서의 공술과 아울러증인 최종하崔鍾夏에 대한 검사의 신문 조서 가운데 ‘4월 7일 판시 장소에서 판시 사실과 같은 협박을 받고 이튿날 아침 김봉수金鳳洙·김길선金吉善과 함께 위 병원 앞으로 나갔다’라는 요지의 공술 기재를 종합하여이를 인정하는 바이다.법률을 감안하건대 피고가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르고자 동급생을 선동교사한 점은 보안법 제7조 및 조선형사령 제42조에 해당하며, 협박 행위는 형법 제222조에 해당하는 바이나 피고의 소위는 하나의 행위로 여러법조문에 저촉되므로 형법 제54조 제1항 전단, 제10조를 적용하여 무거운 보안법 위반의 형에 따라 징역형을 선택하고 그 형기의 범위 안에서 이를 처단, 징역 1년에 처하되 그 형의 집행을 유예할만한 정상이 있는 바 동법 제25조 제1호에 따라 2년간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 압수품은 몰수 대상이 아니므로 형소법 제202조에 따라 각각 소유자에게 반환하는 바이다. 따라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그는 보안법 위반 및 협박 교사 사건으로 입건되어 광주지방법원 총독부 검사 굴감치랑掘勘治郞의 판결로 징역 1년에 처하고 집행유예 2년을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출전 독립유공자 공훈록, 광주지방법원 판결문.-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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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가 최정두崔正斗<독립운동가>
    서울과 광주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최정두崔正斗
     최정두(1898~1930)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탐진. 광주 북구 양산동 양지 마을 출신이다.그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던 중 서울에서 전개된 3·1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광무황제光武皇帝의 국장國葬에 참례參禮하기 위해 서울에 와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게 되었던 김철金鐵과 함께 3월 5일 귀향하여, 이날 밤 양림동 남궁혁南宮赫의 집에서 김강金剛, 최병준崔丙浚, 최한영崔漢泳, 황상호黃尙鎬, 강석봉姜錫奉, 한길상韓吉祥, 최영균崔瑛均, 김용규金容奎, 서정희徐廷禧, 김태열金泰烈, 홍승애洪承愛 등과 회동하여 서울의 독립만세시위 정황을 알려주며 광주에서도 똑같은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제안하였다.이에 광주의 큰 장날인 3월 8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기로 결의하고, 각급 학교 학생과 주민의 시위참가 등 사전준비를 분담하였는데, 그는 최한영의 집에서 한길상, 김용규, 범윤두范潤斗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 태극기, 격문, 독립가를 밤낮으로 인쇄하며 준비를 서둘렀다.그러나 준비기간이 너무 짧아서 작은 장날인 3월 10일 오후 3시 30분으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3월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不動橋아래의 작은 장터에는 기독교인,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須彼亞女學校, 농업학교 학생및 일반 주민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독립만세 시위군중은 1천여명이 넘었다. 이때 그는 다른 주동자들과 함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준 다음, 큰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안을 행진하였다. 점점 시위 군중이 늘어나고 시위대열이 시장에서 읍내로 빠져나가 행진시위를 계속하였으나 일본의 헌병·경찰은 시위대열의기세에 눌려 감히 시위방해를 하지 못하였다.그러자 이날 저녁 무렵 시위군중이 읍내를 돌고 경찰서 앞에 이르자 많은 경찰과 기마헌병이 김철 등의 주동자를 연행하여 갔다. 이에 그는 격분한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서 마당으로 돌진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연행자를 석방하라고 외치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일제는 재향군인과 소방서원까지 투입하여 총칼로 시위군중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시위대열은 무너지고, 그는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결국 이해 9월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받아 옥고를 치렀다.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대통령표창과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시사, 한국독립운동사, 대구복심법원 판결문.-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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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암中庵 최종섭崔鍾涉<독립운동가>
    독립운동을 하면서 노동자와 농민들의 보호자였고 반민특위 전남 지부장을 지낸 중암中庵 최종섭崔鍾涉
     최종섭(1882~1969)은 대한민국 정치인. 자는성원聲遠. 호는 중암中庵. 본관은 탐진. 아버지최병선崔秉瑄과 남평문씨 사이에서 1남 2녀 중외아들로 광주면 서남리(현. 광산동) 42번지에서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잠시 몸을 피해 광산군비아면 신창리에 은신하다 극락면 동림리 684번지로 이거를 하였다. 해방 후 활동할 때는 대인동에서 기거하다 광주 북구동림동으로 돌아왔다.그는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이었지만 한학을 열심히 배우며, 일제의 침탈로 나라를 빼앗기고 곳곳에서 의병 활동이 전개되던 구한말의 격동기에 은둔으로 달랬으나 전국에서 일어나는 독립활동을 보고 여기에 참여하게 되었다.그는 1909년 대한독립협회 광주지부 실업부장을 시작으로 3·1운동을비롯한 모든 항일운동에 직접 참여해 조국광복에 앞장섰다. 그 후 광주 사회운동의 구심점이 되는 광주청년회가 1920년 6월 12일 창립되자 초대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그는 그해 광주 유지들이 발기한 광주 상업조합 발기인으로도 참여했다.한편 소작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면서 1922년 지주들이 주도한소작인 상조회 전남지회 부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지만 곧바로 노동자와농민의 편에 서서 활동했다. 1924년에는 광주면 소작인회를 주도적으로조직하고 1925년에는 광주 소작인 연합회장과 광주 수해 구제회 위원으로활동하면서 지주로부터 가해지는 온갖 불이익에 맞서 농민을 보호했다.1927년 민족 협동전선인 신간회가 결성되자 그는 1927~1929년까지 신간회 광주지회 조사부장과 총무간사 등을 역임하고, 1929년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그는 교육 부문에서도 많은 활동을 했다. 1926년 광주여고 창립 기성위원과 1927년 광주교육보급회 규칙 기초위원을 역임했고, 1928년에는사립 보통학교 유지 방침 연구회 위원으로 활동했다.그 후 그는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집을 광산군 비아면과 극락면으로옮기고 농사를 지으며 은둔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식들에게 일제하에서 봉급생활하는 것은 일제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것이므로 취직하지 말고 농부가 되라고 훈계하기도 했다.그가 사회활동을 재개한 것은 8·15해방 이후 이승만이 주도한 범국민운동 단체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가입한 후 1946년 2월 전남지부장을 맡아 사무실을 충장로 5가, 구.금성여객 자리에 두고 임원은 부지부장에는장병준, 사무국장에는 장병상을 각각 선출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좌익을 반대하며 우선 반쪽이나마 정부부터 수립하자고 주장하며 좌익단체에 대항해 산하에 만들어진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과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의 전남지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그리고 한국 문제가 UN으로 이관되고 국제연합 위원단이 들어올 때,그는 전국환영회 전남 대표로도 활동했다. 또한 그는 남한 단독으로 실시한 1948년 5·10선거에서는 총선거 대책 전남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국민이 선거에 참여하도록 권유하기도 했다.1946년 11월 간접 선거를 통해 미군정이 조직한 조선과도 입법위원에참여했다. 1948년 9월 22일 과거 일본 강점기에 친일 부역해 동포들에게악질적인 반역 행위를 자행한 반민족행위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처벌법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그 실행기관으로 10월 23일 반민특위가 구성되었는데 그는 전남지부장을 맡았다. 당시 반민특위 전남지부는 20명을 구속 송치하고 18명을 불구속으로 조사하는 등 38명을 조사했는데, 특위는 일제의 식민정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벼슬을 지낸 거물급들은 불구속으로 가볍게 처리하고 독립운동자를 탄압한 경찰 출신들을중점적으로 처벌했다. 그러나 반민특위의 활동은 너무 늦게 시작되어 이미 반민족행위자들이 정계, 경찰, 군부 등 각계가 층에서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집요한 방해 공작으로 결국 반민특위 활동은 좌절되고 말았다.그는 정부수립 후에 국민회 전남본부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한편으로 호남, 동강 두 신문사의 사장을 거치면서 지방 언론 창달에도 앞장섰으며,광주고등법원과 광주고등검찰청을 유치하고 전남대 전신인 대성대학 기성회장을 맡는 등 지역사회의 발전에 남보다 앞장서 활동했다.노년인데도 왕성한 활동을 보였던 그는 한국전쟁 이후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사서오경』, 『의학』, 『예서』 등을 읽으면서 생활했다. 그러다가 1969년 2월 7일 88세를 일기로 운명했다.그의 공적을 기리고자 2월 11일 광주공원 광장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은수많은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사회장으로 치러졌다.그는 일생을 자기희생과 침략자에 대한 투쟁 그리고 지역 발전과 교육,언론, 문화 향상에 바친 광주의 지도자였다.주요 양력을 소개하면1909년 대한협회 광주지부 실업부장1919년 광주청년회장1920년 조선교육개선회 발기인, 동회 전남위원1922년 광주노동조합장1922년 광주 소작인회 연합회장1926년 광주 사립 보통학교 유지 회장1927년 신간회 중앙 집행위원 광주지부간사1945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광주지부장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전남지부장1946년 대한노동총연맹 전남연맹 위원장1946년 입법위원1946년 대한농민총연맹 전남지부장1946년 민족통일총본부 전남사무국장1947년 동광 신문 사장1947년 국제연합위원단 전남환영회 전남대표1948년 민족대표자 대회 광산군 대표1948년 총선거 대책 전남 위원장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전남 조사부장1949년 국민회 전남도 본부 위원장1949년 성균관 전남도 전학1949년 유도회 전남본부 부위원장1949년 대성대학 기성회장(현. 전남대학교 인문대학)1949년 전남 농지위원1949년 호남신문 사장1950년 광주고등법원, 고등검찰청 설치 기성회장1950년 무양서원 재단법인 이사장1950년 무양중학교 설치 기성회장1951년 광주호법회장 등을 역임하였다.출전 광주시사, 광주·전남 광복 30년사, 네이버 검색창 “최종섭”.-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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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가 조공찬曺公贊<독립운동가>
    광주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조공찬曺公贊
     조공찬(1880~1962)은 대한 독립운동가. 본관은 창녕昌寧. 광주 북구북동(북문통) 출신이다.그는 북문통에서 단야(鍛冶:대장장이) 일을 하였는데 3·1만세 운동에참여하여 징역 4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광주에서의 3·1만세운동은 김복현이 독립선언서 수천 매와 「경고 우리2천만 동포」라는 제목의 격문 약 100장과 「선언서」라는 제목으로 최팔용 외 10명이 연명한 인쇄물 약 150매, 조선 독립을 노래한 독립가 약 100매 및 국민대소집청원서 약 10매를 가져오면서 시작되었다.3월 6일 광주에 온 김복현(김철)은 김강·송흥진·서정희와 숭일학교 교사최병준과 상의하여 3월 10일 광주 작은 시장에 모였다. 김복현이 독립선언서의 취지를 연설한 후에 독립 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예정 시각이 되자김복현·김강·서정희 등은 광주교 아래의 강변에 가서 모여 있는 수백 명의군중과 함께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고 독립운동의 시작을 선언하였다.각자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군중과 함께 강변을 따라 작은시장으로 출발하였다. 양림리 방면에서 송흥진을 중심으로 기독교인과 숭일학교 수피아 여학교 학생들이 시위대의 앞에서 광주천을 따라 행진하였다. 그는 만세 시위대와 함께 광주우편소 앞으로 행진하였다. 이때 일본기마 헌병대와 소방대·재향군인회 소속 회원들까지 가세하여 강제진압에나서자 시위대는 해산되었다.그는 3월 10일 광주의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 집행유예2년을 선고받았다.그 후 가업을 이어 살다가 1962년 서거하였다.정부는 2018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출전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광주지방법원 판결문-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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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천大川 조경환曺京煥<독립운동가>
    광주 수비대장 요시다를 사살한 의병 선봉장 대천大川 조경환曺京煥
    조경환(1876~1909) 대한제국기의 의병장. 본명은 준환準煥. 자는 서암棲巖. 호는 대천大川.본관은 창녕昌寧. 병원秉元의 아들로 1876년 2월 14일 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 693-2번지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질이 총명하여 부친의 의지로 9세부터 22세까지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따라서 14년의 긴 기간 동안 학문을 닦았으니 그는 스승인 면암 최익현으로부터 우국애민憂國愛民적인 위정척사의 사상을 이어받아 그것을 나라를 위한 자주적인 민족사상으로 체계화한 선비로 학문적으로 경지에 이르렀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자 이를 본 그는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1907년 12월 초순에 광주의 김원오金元五, 김동수金東洙, 양상기梁相基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10일에 함평의 죽봉竹峰 김태원金泰元 의병진을 찾아갔다. 13일 의병 진영을 편성할 때 그는 좌익장의 임무를 맡게 되어 항일의병의 길을 선택하기에 이르렀다.1907년 12월 14일 새벽, 함평 성내城內의 일본군을 급습하여 적 수십명을 생포하고 총 18정 및 다수의 화약과 탄환을 노획하였다. 그날 밤 학교리에 주둔한 일본의 기병대騎兵隊를 습격하고, 함평향교 뒷산으로 퇴각하여 전 현감 이용안李龍 安의 집에서 휴식하였다. 이 전투 이후 조경환은 김율 의병진과 이진사 의병진에 합세하여 세력을 키워 김태원 의병부대의 선봉장先鋒將이 되었다.12월 27일 삼계면 사창을 습격하고 군량을 확보하였다. 또한 상도리 낭월산浪月山에서 일대 격전을 전개하여 10여 인의 적을 잡아 죽였으나 아군도 4명의 중상자를 내었다.죽봉 김태원 의병진이 구정 초하루 전날 함평, 영광, 나주에서 규합한 많은 장정을 인솔하고 창평 무동촌舞童村에 가기 위해 창평 지곡芝谷에 도착했다. 그런데 불길한 전갈이 왔다. 성재 기삼연 호남 창의 대장이 순창구수동에서 일군에게 체포됐다고 했다. 승전을 다지며 다음 전투의 행운을 빌었던 그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1908년 1월 1일(일요일 양력 2월 2일) 무동촌에 주둔하고 있는데, 일본군 광주 수비대장 요시다吉田 소좌의 기마병 1부대가 무동촌을 향해 추격해 온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김태원은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골목길돌담을 전략상 총알 막는 방벽으로 이용했다. 이미 아우 김율과는 부대가나뉘어 사실상 독립한 상태였다.김태원은 부하들을 분산시켜 각 골목에 배치했다. 임기응변으로 여기서사격술이 뛰어난 두 사수 강길환姜吉煥, 조덕관趙德寬을 복병으로 배치했다. 참으로 일본군과 서로 만나 싸울만한 설날 아침의 매혹적인 무동촌전투였다.오늘의 전투에 대비해 선봉장 조경환, 도포장 최동학, 후군장 김옥현,참모장 유병기 등 쟁쟁한 포진으로 각자 독자적 체제로 부대 형성을 강화했다.요시다의 기마 병력은 오만한 기세로 쳐들어왔다. 이때 위장 전술로 한쪽 길을 터서 달아나는 척하였다. 이에 요시다가 걸려들었다. 돌담에 숨어침착하게 기다리던 복병의 눈앞에 서서히 사정거리에 표적이 들어왔다. 이내 방아쇠를 끌어당기자 바로 요시다를 말 위에서 떨어지게 했다. 참으로명쾌한 전과였다.이 창평 무동촌 전투에서 대장 요시다吉田 이하 수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곳은 산중이 되어 오래 머물 수 없으므로 나와서 장성 월평月坪으로 향하여 수일 동안 머물렀다.1908년 2월 21일(양력 3.23) 임곡면 광곡廣谷에서 의병 80여 명이 토벌대가 포위 공격하여 심야에 탈출하며, 10여 차례 적의 공격을 받아 엎치고 덮쳐 김태원 의병장이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1908년 2월 24일(양력 3.26)에 김태원 의병장이 포군 70여 명을 거느리고 임곡면 토물(土泉) 뒷산에 복병하고 일병과 싸웠는데 처음에는 일병 3명이 죽고 1명은 도망하여 각처의 수비대에 응원병을 청하여 일병 60여명이 와서 오전 8시부터 자정까지 싸워 일병은 30여 명이 죽고 의병도 10여 명이 죽었다.1908년 3월 7일 영광의 토산土山에서 왜병과 교전하였는데 적이 예상밖으로 많은 병력으로 대항해 옴으로 전세가 불리하게 되었다. 이에 병력을 불갑사佛甲寺로 후퇴시키고 부상병을 치료하며 무기를 수선하며 다음을 기다렸다.1908년 3월 25일에는 의병부대를 2대로 나누어 1대는 김태원이 영솔하여 천곡泉谷으로 갔고, 조경환은 나머지를 영솔하고 광산군 어등산魚登山으로 가서 적과 교전하였다. 이날 전투에서 2개 부대가 모두 참패를 당하고, 김태원이 중상을 입게 되어 함께 함평의 당산촌堂山村 나평집羅平集의 집에 은신하여 치료하였다.4월 8일부터 함평군 해보면 지월치芝月峙 표군팔表君八의 집에서 전략수립을 위하여 막료 회의를 주재하였다. 김태원은 일찍이 병兵은 정예精銳가 중요한 것이지 숫자의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다고 역설하여 평소거느린 부하는 40~50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치밀한 훈련과 실전을 거쳐정예 부대에 속해 있던 부하들은 조경환과 오성술吳成述, 전해산全海山이 있었다.김태원이 허리 통증이 심해져서 치료차 4월 23일 광주군 소고룡면 두동으로 가서 유숙하고 24일 함평군 오산면 박산博山(현. 임곡면 박호리) 마을로 들어갔다.사실을 탐지한 수색대가 김태원이 어등산 아래 박산 마을에 잠복해 있음을 확인하고 박산 마을을 포위 수색하여 오후 1시 각 부대의 부서를 정하여 행동에 들어가 사면을 포위하고 곧바로 맹렬한 사격을 교환하였는데, 오후 7시까지 교전 끝에 어등산 밑 바위굴에서 좋은 옷을 입은 폭도 1명이 도주하자, 이를 우두머리로 인정한 수색대 일본인 순사가 급히 추격하여 생포하려 하였으나 교묘히 도주하여 추격이 어려워지자 사격이 가능한 지점에서 곧바로 사격을 가하여 이를 죽였다. 뒤에 시신을 확인한 결과김태원으로 판명되었다.1908년 4월 25일 김태원 의병장이 순국한 뒤 조경환은 전부터 함께 전투에 참여한 바 있던 전해산全海山과 더불어 의병진을 수습하고, 일부의잔병은 조경환이 인솔하였다.1908년 5월 5일 의병들의 중의에 따라 전해산을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1908년 6월 2일 영산포榮山浦으로 가서 동곡(동산)에서 이대왕李大旺,이대극李大克의 왕의병진과 합세하여 적의 포수 1명을 생포하였다.1908년 6월 30일 전해산과 의병을 나누어 동곡면 동각리東角里 유군발柳君跋의 집에 묵으면서 의병진을 정비하였다. 이때 중의에 의해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호남 창의대장이라 칭하고, 진용을 정비한 다음 각지 향교에 수차 격문을 발송하여 항일사상을 고취해 의곡과 의병을 모집하는데전력하였다.1908년 9월 김원국金元國은 광주 선암시장仙岩市場에서 의병장 조경환을 만나 동생 원범元範이 같이 활약하고 있음을 알고 조경환 의병진의선봉장이 되었으며, 이때 동생은 도포장都砲將에 임명되어 형제가 함께활약하게 되었다.1908년 9월 21일 전군을 인솔하고 흑석리黑石里로 가서 경찰대와 교전한 결과 대장 정득주鄭得柱 이하 수명을 생포하였다.1908년 10월 7일 함평의 석문石門에서 적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1908년 10월 29일 장성군 진원면 고산리에서 휴식을 하고 있던 중 대치大峙에서 전해산의 의병진이 적과 교전 중이라는 정보에 접하고 의병진을이끌고 대치로 가서 응원하여 적 수십 명을 생포하였다.1908년 11월 8일 광주군 우치면 본촌本村에서 적과 교전하였으며, 11월 25일 전해산 의병부대와 유완요柳完堯와 김여효金汝孝의 의병부대가연합하여 적과 교전 끝에 적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이처럼 연전연승하던 조경환 의병은 1908년 12월 19일(양력 1909. 1.10) 구정을 앞두고 과세차 의병을 귀향시키고 몇 명의 막료와 함께 어등산사동寺洞에 은신하고 있었다.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 헌병대의 급습을 받아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기증받은 백마를 타고 이리저리 내달으며 일병을 무찌르던 중 적탄이 오른쪽 가슴에 연달아 두발을 맞아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을 깨달은 조경환은 목에 걸린 망원경을 벗어 놓고 왼쪽 품안에 깊이 간직하였던 의병진의구체적인 내용과 명단을 꺼내 불사른 후 조용히 순국하였다.그의 3년에 걸친 항일의병 활동은 33세의 젊은 나이에 나라를 위해 가셨지만 그 성과는 천추에 빛나리라.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3월 1일 건국훈장 단장(법이개정되어 지금의 독립장이다)을 추서하였다.1973년 10월 16일 국립묘지(현. 국립 서울 현충원)에 안장하였다.광주광역시는 북구 오치동 989-18번지 한전 전남지사 앞에서 문흥중학교와 문흥1동 주민센터를 거쳐 문흥동 972-1번지 현대유치원 앞까지 길이2,065m의 길을 북구에서 새 주소 가로명을 대천로大川路로 지정하였다.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한국독립운동사, 어등산(魚登山)에서 순국한 불굴의의병장 조경환.-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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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가 정병소丁炳沼<독립운동가>
    광주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한 농업학교 학생 독립운동가 정병소丁炳沼
    정병소(1898~1948)는 대한 독립운동가. 본관은 영광. 광주 북구 본촌동출신이다.1919년 3월 10일 오후 3시경, 지금의 광주천 부동교 아래 작은 장터에는 학생들과 일반 시민 등 천여명이 모였으며 저녁 무렵, 분노한 군중들이경찰서로 몰려가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지만 총검을 앞세운 일제 군경의 무력 진압에 100여 명이 검거되고 강제로 해산되었다.그는 광주농업학교 재학생으로서 독립만세시위운동에 광주농업학교 학생과 숭일학교 학생에 대한 동원규합 책임을 맡아 이를 성실히 실행하고이들의 독립만세시위 진행을 주도하다가 붙잡혔다.동년 4월 30일에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았다. 동년 8월 14일대구 복심 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광주에서조용히 지내다 1948년 8월 20일에 사망했다.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정병소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출전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광주지방법원 판결문-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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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가 이창호李昌浩<독립운동가>
    아버지와 형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가 요절한 독립운동가 이창호李昌浩
    ' 이창호(1902~1931)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광산. 이명은 욱호郁鎬. 독립운동가 주상周庠의 둘째 아들로 광주 북구 일곡동 일동 마을 출신이다.전남 광주숭일학교 재학 중 1919년 3월 10일 전라남도 광주군 본촌면일곡리에서 아버지와 형 윤호를 따라 수백명의 군중과 독립 만세를 높이부르면서 광주시내로 들어가 독립만세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일로 일본 경찰에 잡혀 문초를 받고, 그해 4월 13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받고 1919년 8월 13일 대구 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이 확정되기까지 광주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렀다.그 후에는 ‘조선독립대동단’이라는 단체에 가입,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노석중盧錫中, 노석정盧錫正 등과 함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이모금 활동에는 그의 아내인 유덕례劉德禮와 동생인 창호昌鎬도 참여했다(동아일보 1922년 6월 15일). 당시 일곡동에 있었던 그의 집은 군자금모금 활동의 아지트 역할을 했다.광주 숭일학교 학생으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그는 1931년 3월 29살의 나이에, 7월 13일에는 형 윤호가 옥고를 치른 후유증으로 33세의 젊은나이에 형제가 사망했다.이들 광산 이씨 3부자는 1920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군 자금모금을 같은 일곡 마을 광주 노씨들과 함께 주도하다가 옥고를 치렀는데 광산이씨와 강릉유씨가 혼인으로 연결되어 7명이나 광주 3·1 만세운동과 독립군 자금모금에 참여한 경우는 당시 조선 8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사례라고 할 수 있다.1990년에 형 윤호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으며 2006년에는 부친 이주상은 건국훈장 애국장과 그는 건국포장을 받았다. 3부자가 모두 독립운동 유공자로 정부 포상을 받았지만, 이윤호의 부인 유덕로와 처남 유계문은 광주 3·1운동에 참가하여 징역 6월을 살았는데 이들은 아직까지 국가서훈을 받지 못했다. 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시사, 광주지방법원판결문, 지산 지리지, 한국독립운동사.-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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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가 이남채李南彩<독립운동가>
    광주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한 숭일학교 학생 “독립운동가 이남채李南彩”
    이남채(1899~미상)는 대한 독립운동가. 광주 북구 중흥동 출신이다.그는 당시 숭일학교 학생으로 교사였던 최병준에게서 손병희 등 33인이 연서한 「독립선언서」, 조선의 독립을 노래한 「독립가」를 받아 3월10일 이 인쇄물을 20여 명의 동지와 배부하며 군중과 함께 만세를 외치며 서문통을 거쳐 광주우체국으로 나아갔다. 일본 군경은 이를 무력 진압했다.그는 광주 작은 장날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치렀다. 광주 지방에는 개화기에 일찍부터 기독교가 전파되어 북문 안 교회가 설립되고 1908년 숭일학교가 설립되었으며 뒤이어 수피아 여학교,제중의원 등 교육·사회 기관도 시설되어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이러한 신문화의 영향으로 서울 및 일본 등지의 유학생들도 많이 생겼고이들을 통해 세계정세와 독립운동의 움직임도 일찍부터 이해하고 있었다.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 만세 시위가 벌어졌을 때 서울 봉래정 신행 여관에 머물던 전남 나주군 나주면 출신의 김복현(김철)은 독립선언서수천 매를 전남에 배포하기로 하고 3월 6일에 광주로 내려왔다. 김복현은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김강과 상의하여 3월 10일을 거사 일로 정하였다.한편 고종황제의 국장을 기회로 서울에 올라갔던 기독교인 김철이 3월 6일에 광주로 돌아옴과 함께 바로 운동 계획을 시작하였다. 3월 10일 오후3시경, 부동교 아래 작은 장터에는 약 1,000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승일, 수피아 학교 학생들이 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군중은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시위행렬은 읍내를 돌고 돌아 저녁때 경찰서 앞으로 행진하였다. 경찰과기마 헌병이 길을 막고 지도자들을 붙잡기 시작하자 군중들은 경찰서 앞마당으로 밀려들어 갔고 경찰은 구타와 폭행을 자행하였다. 시위 후 체포된 그는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받고 항고하였으나, 8월 13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기각되었다.옥고를 치르고 풀려나와 조용히 살다가 타계하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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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가 이병환李炳煥<독립운동가>
    광주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이병환李炳煥”
      이병환(1898~1946)은 대한 독립운동가. 본관은 광산. 동섭東燮의 아들로 광주 북구 일곡동 출신이다.그는 숭일학교 재학생으로 1919년 3월 10일 광주 부동교(광주 동구 불로동과 남구 사동을 잇는 다리) 아래 작은 장터에서 김강·김철·최병준·최한영 등과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광주농업학교 교사 또는 학생 주민1,000여 명이 모여 독립 만세운동을 펼쳤다.당시 그는 기숙사에서 학교 수업을 받고 있었다. 독립 만세운동이 시작되기 전에 숭일학교 교사인 최병준이 정두범 외 6명에게 배분한 「독립선언서」 등을 전달받았다. 그는 이를 김판철 등과 함께 광주 중심 시가에서 군중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시위 군중과 함께 광주우편국까지 다시 행진하면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그는 3월 10일 「독립선언서」 등을 배포하며 만세를 외쳤다는 이유만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받았다.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8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재선고 받았다. 대구 감옥에서 옥고를 치른후 1920년 2월 14일에 출옥하였다.이후 광주사범학교 훈도로 조용히 지내다 해방이 되었으나 1946년 빛을 보지 못하고 귀천하였다.정부는 201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출전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 광주지방법원 판결문.-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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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가 이윤호李允鎬<독립운동가>
    독립운동자금 1만원(현재 5억원)을 모금한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이윤호李允鎬”
      이윤호(1898~1931)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광산. 기미독립운동 광주·전남의 주동 인물로선두에서 지휘했던 이주상李周庠의 아들로 광주 북구 일곡동 일동 마을 출신이다.이윤호는 아버지, 동생 이창호李昌鎬, 처남 유계문劉桂文 등과 함께 3·1운동에 참여했다.그는 어려서부터 재질이 청수하였고 자라서는 우월한 성적으로 광주 숭일중학교를 졸업하여 학식이 밝았다. 1919년 3월 10일 전라남도 광주군본촌면 일곡리에서 동생 이창호 등과 함께 수백명의 군중을 지휘하여 독립만세를 높이 부르면서 광주시내로 진입, 독립만세 시위에 적극적으로참여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그해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월형을 받고 대구 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광주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렀다.그 후에는 ‘조선독립대동단’이라는 단체에 가입, 자금을 모으기 위해 노석중盧錫中, 노석정盧錫正 등과 함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이 모금 활동에는 그의 아내인 유덕례劉德禮와 동생인 창호昌鎬도 참여했다.당시 일곡동에 있었던 그의 집은 군자금 모금 활동의 아지트 역할을 했다.1920년 5월, 중국 북간도 신흥무관학교에서 한문 교사로 일하던 신덕영, 최양옥이 광주로 내려왔다.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에 필요한 무기와 식량을 사들이기 위해 상대적으로 현금을 많이 가지고 있던 부자들을 대상으로 자금을 모금키로 하고, 이에 따라 광주와 전라도에 이들을 보냈다.이들은 광주 3·1운동 핵심 인물이었던 이윤호, 이창호 형제를 찾아갔고,이윤호는 같은 마을에 살고 있던 노씨 5명을 설득해 군자금 모금을 주도했다.이들은 한발 더 나아가, 모금으로 끝나지 않고 전라도 부자들을 찾아가권총을 이용한 모금 운동으로 방향이 바뀌게 된다.1920년 10월 15일, 일곡리 그의 집에서 최양옥, 신덕영, 박일봉, 노기준盧基準 등과 논의하면서 권총을 구해서 독립자금을 만들자고 합의했다.다음날 최양옥이 서울로 올라가 권총을 구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들은 생각 끝에 장난감 권총 2정을 휴대하고 이경민과 함께 광주로 내려왔다. 총을 구하지 못해 거사의 추진을 망설이던 그들은 2개 반으로 나눠 추진키로 하고 1반은 이윤호가 이끌고 화순군, 나주군 방면으로, 2반은 담양군, 곡성군으로 최양옥, 신덕영, 노기준이 내려갔다. 이들은 장난감 권총2정으로 많은 성과를 거뒀다. 전라도 부자를 찾아간 그들은 곡성군 칠보리의 심윤택 집에 들어가서 장난감 권총을 들이댔다. 눈앞에서 권총을 보고 놀라 뒤로 넘어진 심윤택은 그 자리에서 독립운동자금 1천 500원을 내놓겠다고 약속했다.장난감 권총의 위력에 자신감을 얻은 2반은 담양군 창평면 부자 박종호朴宗鎬의 집에 가서는 저항하려던 무리를 권총 한 자루로 제압하고 모두 묶었다. 박종호에게 1천원을 요구하고 그 자리에서 40원을 모금했다.이러한 모금 활동을 며칠 후 경찰이 알게 됐고, 광주로 가던 도중 모두체포됐다.다행히 자금을 가지고 있던 신덕영은 임시정부에 전달 후 잡혀 임시정부 재정에 숨통을 틔게 했다. 이들이 모은 자금은 당시 약 1만원 가량으로현재 가치는 5억원에 달하는 큰돈이었다.이윤호가 이끌었던 1반 또한 대동단 조선지부원들도 대부분 체포됐다.이들은 3~4개월의 조사 후 기소됐고, 공판에서 이윤호를 비롯한 대동단조선지부의 단원들은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것을 떳떳이 밝혔다.그는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린 대동단 재판 당시에 궐석재판으로 징역 7년형을 받고, 1922년 9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돼 1924년 12월31일까지 옥고를 치렀다. 그의 형제는 1931년 3월 에 동생 창호가 29살의 나이로, 7월에는 형인 그가 33세의 젊은 나이에 후유증으로 같은 해에 사망했다. 33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의 묘비에 애절함이 그대로 적혀있다. 정부는 그의 이러한 공로를 기려 1986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을 추서했다.1988년 10월 애국지사광산이공윤호공적비愛國志士光山李公允鎬功蹟碑는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 일곡 마을에 세웠다. 규모는 높이 270cm,폭 56cm, 두께 26cm이며 비문은 광산인 김강일이 썼다.1994년 그는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출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시사, 광주지방법원판결문,국가보훈처 공훈록.-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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