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의병장 김동수金東洙<독립운동가>
가을이슬처럼 위엄이 있었던 한말 전남 의병장 "의병장 김동수金東洙"


  김동수(1879~1910)는 한말 의병장. 본관은 김해. 광주목 경양면 병문동

(현 북구 우산동 283)에서 태어났으며 처가댁인 중흥동 84-3번지에서 살

기도 했다(후손 김홍두 증언).

포목상과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는 한말의 망국과정을 지켜보면서 의분

을 품고 살다가 1906년에 27세의 나이로 대한제국 군대에 입대하였다. 언

변이 좋고 뜻이 강해 얼마 되지 않아 사관士官으로 승진했는데 따르는 사

졸이 아주 많았다. 그런데 이듬해 1907년에 고종 황제가 강제퇴위하고 군

대마저 해산되었다. 하늘을 쳐다보며 통곡하고 지내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왜군을 물리치기로 마음을 먹었다.

결국 의병을 주도한 전남의병이 도처에서 봉기하자 1907년 광주에서 조

경환曺京煥, 양상기梁相基 등과 함께 거의하여 활동하고, 1908년 7월에

는 이웃 마을 출신으로 의병을 일으킨 양진여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12월

25일 5~6명의 부하들을 인솔하고 면장 집에 60원을 요구하였으나 돈이

없다고 거절당하자 그를 구타하고 그로부터 짚신 50켤레를 가지고 왔다.

의병장 김동수와 그 예하부대들의 활동을 일제 측 기록인 전남폭도사와

의병항쟁 재판 기록에서 발췌하여 날짜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1909년 화순에서 독립부대를 편성하여 광주, 담양, 장성 등지에서

일제 군경과 친일파를 응징하였다. 그의 의병부대는 65명으로 편성되었

고, 부관 이기섭李基燮은 서방면 모른거리毛弄里 출신이며, 선전병 선덕

현宣德玄은 서방면 시네굴溪川里 출신이고, 도포사 임윤팔林允八, 임윤

오林允五 형제는 오치면 외촌 출신이며, 도십장 김재민金在珉은 천곡면

봉산리 출신이었고, 대원隊員 양동골梁東骨은 서방면 솟대거리孝竹里 출

신이며, 백학선白學善은 모른거리 출신이고, 그리고 박포대朴砲大는 신나

굴 출신이었다.

1909년 1월 12일에 광주군의 이장집에 들어가 총기로 위협하면서 20원

을 강요하였으나 돈이 없어 백목 2필을 가져왔고 2월 하순에는 광주 오치

동의 동장집에 들어가 현금 20원과 백목 10필을 강요했으나 거절당하고

백목 3필만 가져왔다. 2월 30일부터 15명과 함께 총기를 들고 5월까지 광

주, 화순, 담양, 창평, 장성 등지를 횡행했다.

1909년 3월 15일에 동장집에 들어가 백목 4필을 빼앗았으며, 20일에는

장성군에 사는 최봉근 집에 2명과 함께 들어가 군도 1자루를 빼앗았다. 3

월 23일에는 광주군 동장집에 들어가 현금 5원을 억지로 빼앗았으며 29

일까지 광주를 무대로 계속 활동했다.

또한 4월 1일부터 4월 29일까지 7차례에 걸쳐 현금과 백목을 억지로 빼

앗고, 순사대와 교전으로 인해 3명의 전사자와 총 9정을 빼앗기는 등의 피

해를 입었다.

특히 5월 19일에 광주시 유덕동에서 광주분견소 고요오 상등병 일행

이 그가 이끄는 약 50명의 의병을 공격하여 14명을 죽이고 화승총 10정

을 빼앗아 갔고, 31일에 광주경찰서 순사부장 외 11명이 광주시 본촌동

김영조 집을 포위하여 4명을 죽이고 의병장 김동수를 부상시켰다고 기록

하고 있다.

6월에는 그의 부하 십 수명과 함께 선도면 동산동으로 이동했는데 이를

안 일본 경찰은 5일에 공격하여 3명을 죽이고 말았다. 그는 상대곡면 분토

동 석양오 집에 은신하고 있는데 15일에 경찰이 급습했으나 도주하여 갑

마보면 동촌, 천곡면 봉산리 등지를 전전하며 잠입 생활에 들어갔다.

7월에는 27일 경찰의 봉산리 수색으로 중군장 송자화宋子化와 도십장

都十長 김봉래金鳳來(23세), 조경환曺京煥의 좌익장左翌將이었던 이원

오李元午(33세), 동복군 외서면 영신동에 사는 하응방河應方(18세)이 체

포당하고 말았다.

8월 25일에는 그의 부장副將 김모金某 등 8명을 일본 경찰이 광주군 석

제면에서 발견하여 30분간 교전한 결과 3명을 죽이고 2명을 부상 입히고

군기를 노획해갔다. 이제 김동수 의병진은 괘멸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다가 9월에 장성 사창社倉 전투에서 그는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

고 체포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한국독립운동사자료』16권

의 「10월중 폭도상황월보」를 보면 “이제 남은 것은 김영백金永伯, 양상기

梁相基, 장인상張仁尙, 이덕삼李德三, 강승우姜勝宇, 김동수金東洙, 정

대홍鄭大洪, 정대인鄭大仁 등 수인에 불과하나 답답히 소식이 없고 어디

론가 잠복하였다.”고 하여 10월까지 김동수는 체포되지 않고 활동하고 있

었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7권의 「1910년 1월분 폭도상황월보」를

보면, “본월 7일 수괴 김동수는 충청북도에서 그곳 수비대로부터 파견한

수색대에 체포되어 관내에 행동한 의병장은 한명도 없다.”고 기록되어 있

다. 즉, 1910년 1월 7일에 충청북도에서 그곳 수비대가 파견한 수색대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가 광주를 떠나 멀리 충청도로 피신한 셈이

다. 그래서 그는 공주지법 재판소 청주지청에서 통감부 판사 전중형田中

亨에 의해 징역 15년 형을 받고 복역 중 옥중에서 죽어가면서도 왜놈을

꾸짖었고, 꾸짖는 소리가 가을 이슬과 같았다고 한다. 그의 부하들도 체

포되어 재판에 회부 되었는데, 선전병 선덕현은 10년 형을 언도 받았고,

도포사 임윤팔과 도집장 김재민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1910년 옥중에서

장렬히 순직하였다.

김태진 전남대 교수에 의해 『김동수 의병실록』이 1986년 간행되고,

1995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출전 김동수 의병실기, 북구 역사인물, 광주시사, 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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