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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지호(吳之湖) : 1905 ~ 1983
    예술원종신회원이며, 국전심사위원장을 역임한 서양화의 원로였던 오지호는 망국을 재촉하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905년 12월에 화순군 동복에서 오재영의 아들로 태어났다.오지호는 애국애족의 가문에서 자라면서 미술에 대한 취미와 함께 강렬한 민족주의 정신과 애국심을 가졌다. 그는 휘문고보에 진학하여 고영동의 지도로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시작한 뒤 고려미술회관 미술연구소에서 계속 공부하였다.그 후 1926년 동경미술학교 서양학과에 입학하여 후기인상파의 기법을 공부하였으며, 한국의 산하를 한국적 색채감으로 담아보려고 하였다. 그는 귀국하여 1928년에 신미술운동을 표방하고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미전에 대항하여 ‘녹향회(綠鄕會)’를 조직하고 조선인이 주체적으로 작품 활동을 펴나가자고 했다. 한때 그는 민족주의자들이 운집해 있는 개성의 송도고보에서 학생들에게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후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광주로 돌아와 지산동 초실(草室)에 정착하여, 4·19혁명을 계기로 학원민주화에 앞장서다가 5·16군사정권 때에 조선대학교를 그만두고 야인으로 예술 활동과 한자교육 부활운동에 전념하였다.시에서는 이 분의 서양화발전에 끼친 공로를 높이 평가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3회에 걸쳐 회화발전에 기여한 사람에게 전국규모의 ‘오지호미술상’을 시상해오고 있으며, 지산동의 생가인 초실을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하고 있다. 아울러 시립미술관인 1992년에 개관한 ‘오지호기념관’에는 대표작인 “추경” 등 8점의 작품이 상설 전시되고 있어 일반인들이 작품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으며 지산동 도로이름을 오지호로 정하여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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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덕홍(金德弘) : 1558~1592
    김덕홍(1558~1592)은 덕령의 형이다. 호는 성암(省菴)으로 아우 덕령과 매형 김응회와 함께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덕령과 덕보 두 동생과 함께 어머니를 모셨는데 효우가 지극하였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의의 뜻을 가지고 어머니께 하직하고 덕령과 함께 의병을 불러 모아 전주에 이르렀을 때 적세가 매우 성함을 보고 금산으로 진격하기 전 덕령에게  말하기를 "노모가 집에 계시는데 아우만이 혼자 있으니 우리 형제가 모두 나선다면 어머님을 보호할 사람이 없게 되니, 나는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이니 너는 돌아가서 어머님을 봉양하여라."고 당부의 말을 하였다. 그해 7월 10일 제 1차 금산성 전투에서 고경명 장군과함께 순절하였다.1785년(정조 9) 지평(持平)으로 증직하고 광주 '의열사'에 배향하였다.  슬하에 딸 2명을 두었다, 『광주읍지』(1879), 『국역 김충장공유사』(1979), 『호남절의록』(1799), 『김덕령 평전』(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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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백춘(李百春) : 1537~1592
    이백춘(1537~1592)은  병사 종우의 증손이다. 자는 영경, 본관은 함평으로 광산구 등임동 방혜마을에서 태어나 1558년 용봉택지개발지구로 편입된 중봉마을(저불)로 이사했다. 천성이 강직하고 문학절행(文學節行)이 뛰어난 그는 용봉동으로 옮긴 그해 사마시에 급제한 뒤, 마을에 읍취정(挹翠停)을 짓고 세심천(세심천)을 만들어 후학을 양성하고 봄과 가을 향약을 강학(강학)하였다.1590년(선조 23) 사옹원봉사로 임명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때 중앙 관리로부터 지방 아전에 이르기까지 모두 도망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임금을 호종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직분을 지켜 죽으리라." 하고 끝까지 항거하다가 적의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조금도 얼굴빛을 변하지 아니하고 그는 적을 꾸짖으며 굴복하지 않다가 그해 9월 23일 순절하였다.1997년 보령 호국사에 위패를 봉안하였고, 그의 묘는 1980년 어린이대공원이 조성하면서 일곡동 호항동으로 옮겼다. 『광주읍지』 (1879), 『함평이씨 광주종친회지』(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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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진여(梁振汝) : 1860~1910
    양진여(1860~1910) 는 휘는 진영, 호는 서암, 본관은 제주로 1860년 5월 11일 광주목 서양면 니동리, 현 중흥동 498-1번지에서 남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양진여는 1908년 7월 20일경 삼각산 죽취봉에서 30여 명으로 거병하고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거병의 목적은 일인 관리를 살육하고 각지에 침임하고 있는 일인을 물리쳐 독립국으로 복구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는 의병 부대의 확충을 위해 진력했고, 그 결과 1908년 11월에는 100여 명으로 규모가 커졌다. 부대의 주 무기는 화승총이었지만, 양총과 대포, 권총도 보유하고 있었다. 대부분 광주와 인근 지역의 농민들이었지만 해산 군인이 참여하기도 했다. 주 활동무대는 광주를 근거지로 한 인근의 장성, 담양, 창평 등이었다.  거병 초기 일본인 우편체송인을 살해하는 등 일본인을 응징하기도 했지만, 일본군 토벌대의 주 토벌 대상이 되면서 일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1908년 10월의 신촌전투와 11월의 대치.추월산 전투가 그것이다.  그가 전투를 통해 일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 그의 의병 부대의 피해도 막심했다.  특히 추월산 전투에서는 일본군의 기습 공격으로 15명의 의병이 순절하였다. 이후 그의 의병부대는 크게 위축되었다. 1909년 2월 연합 의진을 구성하여 총대장으로 추대되지만, 지병과 부상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3월 이후 그의 의병부대는 사실상 와해된 채 부대원의 일부는 아들인 양상기 의병부대에, 그리고 일부는 부하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운영되었다.  양진여는 일본의 추격을 피해 장성군 갑향면 향정리에 잠복했지만, 부왜인의 밀고로 1909년 8월 26일 체포되었다. 1909년 12월 1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대구공소원에 항소했지만, 1910년 3월 5일 대구공소원은 다시 그에게 내란죄를 적용하여 교수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1910년 5월 30일 아들 양상기보다 두달 앞서 대구 감옥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1992년 10월,  광주시에서는 그의 의병활도을 기리기 위해서 서방사거리에서 전대사거리를 거처 동운고가도로까지의 도로명을  '서암로'라고 명명하였다. 『양진여.양상기 의병장 실기』(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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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상기(梁相基) : 1833~1910
    양상기(1883~1910)는 진여의 아들로 부자 의병장이다. 호는 설죽으로 1883년 10월 10일 광주목 서양면 니동리, 현 중흥동 498-1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부친이 세운 풍정암에서 병서를 읽고 무예를 닦았다. 광주진위대 병졸이었던 그는 1907년 8월 군대가 해산되자 진위대 출신을 배경으로 광주경찰서 순사가 되었다. 그러나 부친이 거병을 준비 중인 시점에 순사로의 취업은, 일제의 정보를 캐내기 위한 위장 전술이었다. 따라서 그의 광주경찰서 순사직은 오래갈수 없었다.  1908년 4월 23일 그는 순사직에서 면직되었다. 그리고 1908년 5월, 40명으로 거병하여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그의 의병활동은 다음해인 1909년 6월까지 계속되었다.양상기 부대의 규모는 최대 80여명이었고 주로 황승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도총장 안판구, 후군장 이문거, 포군장 안영숙, 도선봉장 조사윤, 참모장 유병기가 임명되었다.   그런데 도통장 안판구는 구식 군대였던 진위대 조장 출신이었고, 참모장 유병기와 도선봉장 조사윤은 김태원 의병장의 참모와 부하 출신이다. 또한 참모장 유병기는 당시 거유였던 송병선의 문하이기도 했다. 이는 양상기 부대가 구식군인이 참여한 평민부대였고, 김태원 의병장이 죽은 후 그 부대를 계승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양반 출신인 유병기의 합류나 부장들의 나이가 전부 의병장인 양상기보다 많았다는 것은 양상기 의병장이 어떤 인물이지를 잘 말해 준다. '한국의 복구'를 주창했던 양상기 부대의 활동은 군자금 모금, 밀고자 및 일진회원 처단, 헌병분견소 방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끈질긴 추격을 피할 수 없었다. 1908년 11월부터 일제와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그 중 1909년 4월의 동복 서촌 전투에서 10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고, 1909년 5월의 담양 덕곡리 전투에서는 23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당하였다. 양상기 부대가 대패를 당한 것은 무기의 열세도 있었지만, 토착민들의 밀고로 인한 기습 때문이었다. 담양 덕곡리 전투 이후 양상기 부대는 정상적인 활동을 전개 할 수 없었다. 이에 양상기는 1909년 6월 상순 부대를 해산하고 잠행 중 1909년 12월 20일 전북 남원에서 붙잡혔다. 1910년 3월 29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 강도 방화 및 살인사건이 죄목으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대구공소원에 항소했지만, 1910년 5월 17일 대구공소원은 다시 동일의 죄를 적용하여 교수형을 선고했다. 1910년 8월 1일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27세의 젊은 나이였다. 2011년 광주광역시 북구에서는 도로명 주소를 부여하면서 그의 의병활동을 기리기 위해서 임동 신안교에서 일곡동 동아아파트 뒤편 일곡교차로까지의 도로명을 '설죽로'라고 명명하였다. 『양진여,양상기 의병장 실기』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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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수(金東洙) : 1879~?
    김동수(1879~?) 는 본관은 김해로 광주목 경향면 병문동, 현 북구 우산동 283번지에서 태어났으며 처가댁인 중흥동 84-3번지에서 살기도 했다.(후손 김홍두 증언)  포목상과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는 한말의 망국과정을 지켜보면서 의분을 품고 살다가 결국 의병을 주도한 전남의병이 도처에서 봉기하자 1908년 7월 광주 출신으로 의병을 일으킨 양진여 의병대에 가담하여 활약 하였다. 김동수 의병장은 뒤에 독립부대를 편성하여 광주, 담양, 장성 등지에서 일제 군경과  친일파를 응징하였다. 그의 의병대는 65명의 의병으로 편성되었고,  부관은 이기섭(서방면 모른거리 출신), 선전병은 선덕현(서방면 신나굴 출신), 도포사는 임윤팔. 임윤오(오치면 외촌 출신) 형제, 도십장 김재민(천곡면 봉산리 출신) 이었고, 의원은 양동골(서방면 솔대거리 출신), 백학선(모른거리 출신), 그리고 박포대(신나굴 출신)이었다. 일제 측 기록인 전남폭도사와 의병항쟁 재판기록에 담겨 있는 장군의 활약상은 의병을 폭도라 하고 군자금 징수를 강도나 갈취로 친일분자를 양민으로, 침략자인 군경을 치안담당자로 표현하고 있어 내용을 잘 음미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의병장 김동수와 그 예하부대들이 한 활동을 일제 측 기록에서 발췌하여 날짜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김동수 의병장은 양진여의 부하로 1908년 12월 25일 5~6명의 부하들을 인솔하고 면장 집에 60원을 요구하였으나 돈이 없다고 거절당하자 그를 구타하고 그로부터 짚신 50켤레를 징수하였다. 1909년 1월 12일에 광주군의 이장집에 들어가 총기로 위협하면서 20원을 강요하였으나 돈이 없어 백목 2필을 탈취했다.  1909년 2월 하순에 광주 오치동의 동장집에 들어가 현금 20원과 백목 10필을 강요했으나 거절당하고 백목 3필만 탈취했다. 1909년 2월 30일부터 15명과 함께 총기를 들고 5월까지 광주,화순,담양,창평,장성 등지를 횡행했다. 1909년 3월 15일에 동장집에 들어가 백목 4필을 탈취했으며, 20일에는 장성군에 사는 최봉근 집에 2명과 함께 들어가 군도 1자루를 탈취했다. 1909년 3월 23일에는 광주군 동장집에 들어가 현금 5원을 갈취했으며, 29일까지는 광주를 무대로 계속 활동했다. 또한 1909년 4월 1일부터 4월 29일까지 7차례에 걸쳐 현금과 백목 탈취,교전으로 인한 3명의 전사자와 총 9정을 빼앗기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 특히 1909년 5월 19일에 광주시 유덕동에서 광주분견소 고요오 상등병 일행이 김동수가 이끄는 약 50명의 의병을 공격하여 14명을 죽이고, 화승총 10정을 빼앗아 갔고, 31일에 광주경찰서  순사부장 외 11명이 광주시 본촌동 김영조 집을 포이하여 4명을 죽이고 의병장 김동수를 부상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김동수 의병장은 체포되어 그의 활동상을 은폐시키고 강도죄로 징역 15년을 언도받아 복역했다. 『김동수 의병실기 』(1986), 『광주시보』(이상식, 1985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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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덕균(申德均) : 1878~1908
    신덕균(1878~1908)은 광주 우산동 (또는 각화동) 출신이다 초명은 덕순. 자는 정고, 호는 몽암, 본관은 평산으로 태수의 아들이다. 『광주북구지』(1994)에는 우산동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호적부 제적등본』 에는 각화동  277번지로 등재되어 있다. 따라서 출신지에 대한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그이 손자 후복이 현재 각화동에 거주하고 있다. 1906년 6월 최익현, 임병찬이 태인에서  호남의병을 일으킬 때 달려가서 참여하려 했으나 의병이 쉽게 패하자 중단하였다. 그는 1907년 1월에 창평에서 고왕순이 의병을 일으켜 화순을 점령하고 동복으로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하들을 이끌고 달려갔으나 고광순 의병대가 도마치전투에서 패하여 해산해 버리자 광주로 돌아와 재기의 날을 기다렸다. 그는 1907년 9월 1일을 기하여 고광순 의병대가 재기하자 가담하여 참모의 중책을 맡았으나 병력과 무기가 부족하여 신덕균은  윤영기와 함께 광주에가서 해산군인들을 소모하여 그 수가 40여 명이 되었다. 그런데 병력을 거느리고 구례로 가는데 도중에서 고광순의 전사 소식을 듣고 독자적으로 지리산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벌였다.  신덕균은 1908년 초에 의병대를 정비하여 3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화개로 진군하다가 왜적 30여 명을 무찌르고 지리산을 종횡하면서 적과 전투를 벌였다. 그는 차츰 병력과 장비가 부족해지자 부장에게 맡기고 광주로 돌아와 전답을 팔아 군기를 마련한 후  부대로 돌아와 전남,전북의 경계를 누비면서 활동하다가 11월 초순에  의병을 해산하고 도피 은신하던 중  7일 고부 두승산 적에게 피살되었다. 『광주시사1』(1992), 『광주북구지』(1994), 『평산신씨 광주.전남사』(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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