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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암靑巖 범택균范澤均<현대인물>
    대한민국 공무원·기업인, 치산녹화에 공헌한 “청암靑巖 범택균范澤均”
     범택균(1932~2016)은 대한민국 공무원 기업인. 호는 청암靑巖. 본관은 금성. 범재풍范在豊의 4남으로 광주 북구 생용동 지내 마을 출신이다.1955년 국학 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사로 1988년 호서대학교 대학원 행정학과 행정학석사를 졸업하였다.국학 대학 졸업 후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소속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1973년 산림청이 농림부에서 내무부로 이관하여 치산녹화 10년 계획을수립할 때 그는 산림청 기술보급과장으로 참여하였다. 1976년 전라남도농림국장으로 한해 대책 사업으로 장성, 담양, 광주, 나주 4개 댐 준공에참여했다.이어 전라남도 내무국장을 역임하고, 1980년 8월부터 1983년 12월까지전라남도 목포시장을, 1985년 12월부터 1986년 10월까지 전라남도 광주시장을 지냈다.1986년 10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강원도 부지사를, 1988년 6월부터 1989년 12월까지 내무부 소방국장(현. 소방청장)을, 1989년 12월부터1991년 12월까지 인천직할시 부시장을 지냈다.퇴임 후 인천시는 내무부로부터 지방공사 인천 터미널 설립을 인가받고준비기획 단장에 범택균 전 인천시 부시장을 임명했다. 이에 따라 지방공사인천터미널 설립을 위한 준비 기획단을 공사 발족시까지 운영하게 되는데 인원은 단장과 부장 2명을 포함해 모두 14명으로 하고 공사 설립과 동시에 단장은 사장, 부장은 이사로 임명되었다.1993년까지 인천 터미널 공사 사장을 지냈다. 그리고 금성범씨 서울종친회장 등으로 활동하였다.2016년 집에서 타계하였다. 출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지산 지리지, 금성 범씨세보, 광주시사.-자미골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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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인詩人 범대순范大錞 <현대인물>
    무등산 시인 “시인詩人 범대순范大錞”
     범대순(1930~2014)은 대학 교수 영문학자 시인.본관은 금성. 한시인漢詩人인 부친 취강翠崗 범윤중范潤中의 장남으로 광주 북구 우치동 신촌에서태어났다. 신촌에서 3년간 모친과 같이 어린 시절을 보내고 네 살 때 광주시 북구 용강동 하신 마을부친의 농장 거처로 옮겨 이후 1954년까지 20년 동안 그 강변 마을에서살았다.1944년 광주 지산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50년 광주 서중학교에 입학6년 과정을 마치고, 1957년 고려대학교 영문학과를 거쳐 1959년 고려대학교 대학원 졸업했다. 1986년 전북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1980년 9월부터 1981년 1월까지 고려대학교 영문학과 객원 교수, 1981년 1월부터 1981년 12월까지 미국 Ohio Denison 대학 연구 교수, 1981년 6~8월 영국 Oxford 대학 International Senier’s Summer School연수, 1985년 6~8월 영국 London 대학 Summer School 연수, 1989년6~12월 미국 Iowa 대학 International Writer’s Program 연수, 1990년~1991년 영국 Cambridge 대학 연구, 1960년대 후반부터 1994년 8월까지 전남대학교 교수로 영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정년퇴직하고 명예교수로 있다.원탁시 동인이며 전남도문화상(1971), 미국 Denison대 Macneill시문학상(1981), 미국 Ohio Denison대 MacNeill 시 창작상 및 동 영문학과Essay 상(1981), 제4회 금호학술상(1987), 국민훈장 동백장(1994), 광주시민대상 ‘예술부문’(1996), 제29회 한국시인협회상(1997), 문예한국 대상(2002) 등을 수상했다.저서로는 시집인 『유아원에서』, 『기승전결』, 『이방에서노자를 읽다』, 『연가』 등이있다. 또한 용강동 하신 마을에는 그의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은 원래 2013년 계림동의 자택에서 개관했으나 자택이 도심재개발로 헐릴 처지가 되면서2017년 고향인 하신 마을에서 재개관했다.출전 범대순 전집, 유아원에서, 기승전결, 이방에서 노자를 읽다, 연가, 무등산.-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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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찰서장 범시균范時均<현대인물>
    대한민국 경찰공무원으로 ‘범씨 대종회’ 초대 회장을 지낸 “경찰서장 범시균范時均”
     범시균(1920~1999)은 근대 경찰공무원. 본관은 금성. 범재풍范在豊의장남으로 광주 북구 생용동 지내 마을 출신이다.1939년 광주고보(광주제일고등학교)졸업하고, 일본 중앙대학 경제과에입학하여 신지식을 습득하였다. 일본 유학 중 학병으로 강제 차출되어 일본군 소위로서 조선 출신 학병 책임자로 있던 중 해방을 맞았다.광주경찰서 경무계장, 1952년 나주경찰서 경감 경무계장, 장흥경찰서 경무계장, 순천경찰서 경무계장 등 역임하고, 1953년 도경 경무과 인사계장,1954년 제3연대 부연대장 등을 역임하였다.1954년 총경으로 승진 전라남도 화순경찰서장을 거쳐 강진·곡성·영광·화순 등지에서 경찰서장을 역임했다.전남경찰청에 재직시 실전失傳됐던 시조묘를 비롯 8세까지의 묘소의유적지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 끝에 4세 휘 세동世東의 유적지를 찾아내고, 그 후 재일在日실업인 범진규 등 다른 후손들의 지원 하에 오늘의 모습으로 복원하고 정화淨化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그리고 대종회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타계하기 전에는 부모님 명의로 대종회에 거액을 기부하였다.출전 대한민국건국십년지, 지산 지리지, 금성 범씨세보.-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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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사芝史 범재풍范在豊<현대인물>
    향약을 실천하는 광람계를 창계한 “지사芝史 범재풍范在豊”
     범재풍(1885~1945)은 일제강점기의 면장. 호는 지사芝史. 본관은 금성.난계灡溪 문섭文燮의 아들로 광주군 대촌면 월성리에서 출생하여 지산면 생용리 지내池內 마을에서 살았다.1910년 한일 늑약 후 최초로 토지 조사사업의 목적으로 추진된 지적측량사업地籍測量事業에 참여하기 위해 광동측량교습소光東測量敎習所에 입학해 측량기술을 습득하였다.그는 부모 생존할 때 효행은 물론, 모친이 작고 후 35년간 매일 아침에성묘하는 지극한 효행을 다하였다.면민들이 추대하여 1916년 32세에 광주군 우치면장을 시작으로 인접본촌면을 병합한 지산면장까지 줄곧 18년 동안 면민의 공복으로 일하였다. 그는 덕으로 면민을 지도·교화하고 향약의 4대 덕목을 면정의 기본으로 실천함으로써 그 공로가 면민의 경모敬慕를 받아 1932년 6월 5일에 광주 북구 생용동 산 93번지에 면민들이 면장범재풍기념비面長范在豊紀念碑를 건립하였다. 비의 규모는 높이 228㎝, 폭 48㎝, 두께 19cm이다.그는 향리에 덕을 선양코자 광람계光藍契를 1918년 당시 광주군 우치면장에 재직하고 있을 때 우치 본촌면 일대의 주민 61명이 백미 1말씩을갹출하여 계원으로 창계하였다. 계원의 거주지를 보면 생룡, 용전, 태령,수곡, 입암, 회룡, 단지, 거진, 지야, 본촌, 용두, 양지, 일곡 등 광범한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광람계라는 명칭의 의미는 우리 고장 광주에서도중국의 남전여씨藍田呂氏 향약의 전범典範에 따른 유교적 이상향을 건설해 보고자 하는 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광람계는 지금까지도 존속되고 있어 1900년대 초기 계의 형태와 현재의 계를 비교 검토하는데 하나의 좋은 사례가 되고 있다.1968년 광주시 북구 용전동 601-9(용전 마을 입구)에 광람계기적비光藍契紀蹟碑를 세워 그 뜻을 기려오고 있다.출전 지산 지리지, 면장범재풍기념비, 광람계기적비, 북구 문화유적.-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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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강翠崗 범윤중范潤中<현대인물>
    일제강점기 민중의 애환을 노래한 “취강翠崗 범윤중范潤中”
     범윤중(1883~1951)은 구한말의 유학자. 자는 학노學魯. 호는 취강翠崗.본관은 금성. 철준哲俊 의 아들로 광주 북구 생용동에서 태어났다.어려서 백부伯父인 소강小岡 범치준范致駿의 문하생으로 학문을 닦아한시의 대가大家가 되어 젊어서 학동學童들에게 학문을 가르쳤으며, 한때는 공직에 몸담기도 하였으나, 20여 년간 서당 훈장으로서 제자 교육과지방 교화에 힘써, 당시 인근에 글 읽는 자 가운데에 선생의 제자 아닌 사람이 없었다.1930년대인 50대에는 한시 동호인들과 모산시계茅山詩契를 조직하여시학詩學의 부흥과 고문古文의 전승에도 정진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당시 관헌官憲들이 미곡공출米穀供出을 위해 마을을 샅샅이 뒤져, 심지어 농사용 곡물까지 색출하여 가자, 이에 분노·항거한 일로 광주경찰서에 수감되기도 했다.그의 당시 작품 내용을 보면 일제강점기의 민중들의 애환, 은둔, 회고懷古 등이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일제 말 한국 농촌의 실상을 그린 시로「영사詠事」, 「랑사郞事」, 「동중랑사冬中郞事」, 「대공출유감對供出有感」, 「대면화독려원유제對棉花督勵員有題」, 「독신문유제讀新聞有題」, 「대공출최촉관유감對供出催促官有惑」 등이 있으며, 해방 이후김구 선생에 관한 시로 「문김구선생남순강연이구어진표聞金九先生南巡講演以句語陳表」, 「차백범김구선생만次白凡金九先生輓」,「대조선독립유감對朝鮮獨立有感」 등이 있다.이들 작품은 양림동의 갑부였던 양파楊波 정낙교鄭洛敎가 1914년 양림산 바위 언덕에 지은 양파정에서 자주 지인들의 시회가 열렸으며 당시의시국을 논하며 즐겼던 작품으로 일제강점기 유학자들의 정치의식과 세계관을 엿보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저서로 『취강율훈집翠崗汩薰集』 3권이 있었으나안타깝게도 2권은 유실되고, 남아 있던 1권을 선생의후학들의 노력과 아들 범대순의 노력으로 1991년 『취강유고翠崗遺稿』로 발간되었다.출전 취강유고,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북구 문화유적.-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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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곡東谷 박남주朴南柱<현대인물>
    농가소득 증대사업의 선각자 “동곡東谷 박남주朴南柱”
      박남주(1934~?)는 대한민국의 면장·조합장. 호는 동곡東谷. 본관은 진원. 노은 태원과 광산김씨 김계순 여사의 장남으로 장성군 남면 삼태리196번지에서 출생하였다.전통적인 유가의 가정에서 부모의 교훈을 받으며 전남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병역을 면제 후 남면 동태 마을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농촌지도자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65년부터 남면 삼태리 조합장을 5년간 역임하고 1983년부터 남면 면장으로 재직하면서 남면 삼태리 일부와 진원면 산동리 일부 경지정리를 추진하여 1985년에 준공하였다. 면장 퇴임 후면사무소 청사건립추진위원장으로 취임한 후 1995년 지하 1층 지상 2층의 면사무소청사를 준공하였다.남면 삼태리 입구에서 광주시 북구 오룡동까지 2차선으로 포장도로를2001년에 추진 준공하였다. 그리고 광주원예농협 감사를 3회 연임하고,광주원예장학회 이사장을 9년 역임했다. 퇴임 후 도정 평가자문위원을 역임하며 농촌지도와 과수원 논농사 재배 등의 농가 소득증대 사업에 노력하였다.그 공적을 인정받아 전남농촌진흥원장상과 농림부장관상, 국회 농림분과위원장상을 받았다.그는 전라남도 농업의 녹색혁명 완수와 지역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하면서 특히 광주·전남 농우회는 시군농촌지도자, 시군회장들로 구성 조직되어 회장으로 20여 년간 농우회발전에 헌신 노력하였기에 농우회원들이 정성과 뜻을 모아 그의공적을 후대에 전하고자 2009년 11월에 공적비건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광주광역시 북구 오룡동 지촌마을에 공적비를 세웠다. 비의 크기는 높이146cm 폭 54cm 두께24cm이다.출전 북구 문화유적, 광주의 문화유적.-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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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정雲亭 박진동朴鎭東<현대인물>
    ‘국한문혼용’이 국어사랑, 나라 사랑이라고 주장한 “대한민국 언론인 운정雲亭 박진동朴鎭東”
     박진동(1926-2012)은 대한민국 언론인. 호는 운정雲亭. 본관은 순천. 광주 북구 일곡동 일동마을 출신이다.광주 서석문화회장, 전남일보 편집국장 (1966-1969), 전남일보 부사장 겸 전일 방송 국장(1969-1980), 광주일보 부사장 (1981-1988), 논설위원실장(1975-?), 전남 도정 자문위원, 전남교육위원, 전남체육회 부회장을 지냈다.저서로는 《원형이정元亨利貞》전남일보사 1979, 《민심천심民心天心》광주일보사출판국 1987, 《한자교육의 부활》 전일실업출판국 1994,《운정고희집雲亭古稀集》전일실업 1995, 《사랑과 인생》전실실업(주)출판국 2000, 《내고향 일곡》2001, 《가을나그네 수필집》한림 2002,《국어사랑 나라사랑, 운정 박진동 팔순 기념문집》한림 2005, 《민주성지 광주비화》성문당 2005, 《아내의 119 수필집》한림문학재단 2009,《광주의 종소리》한림 2009 등이 있다.특히 국어사랑 나라사랑에서는 뿌리가 튼튼해야 국어가 산다. 문화발전과 어문 정책, 한자폐지는 동양문화의 고아된다. 한자를 알아야 국어를 잘알고 국어를 알아야 영어를 잘한다. 국어에 대한 중대한 착각, 평등주의는교육도 망친다. 시급한 어문교육 정책 혁신 “자미축제”의 뜻을 아시나요.한자는 어語(WORD)다. 국어의 장단음에 대하여 나이 어릴수록 천자문잘 외어 등의 수필이 수록되어 있다.평생을 국어사랑 나라사랑에 우리 대한민국이, 우리 문화가, 우리 교육이 다시 한 단계 비약하여 세계에 우뚝 서서 꽃피우기 위해서는 국한문혼용이 가장 이상적인 어문생활로 한글전용이 오래가면 나라는 시나브로망한다는 이론을 펴왔다. 이로서 일경一耕언론문화재단 제1회 언론상 시상식을1997년 11월 12일 한국언론회관 19층 카페테리아에서  제1회 일경언론상 시상식을갖고 광주일보사 박진동 상임고문에게 상패와 상금 1천 만원을 수여했다.출전 운정고희집, 민주성지 광주비화 외, 광주일보, 국어사랑 나라사랑.-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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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석一石 류영렬柳榮烈 <현대인물>
    유도창달에 기여한 “일석一石 류영렬柳榮烈”
     류영렬(1917~?)은 대한민국 공무원, 호는 일석一石. 본관은 문화. 삼초공 인섭寅燮과 어머니 순천박씨의 둘째 아들로 광주 북구 오치동 510번지에서 태어났다.일찍이 일본으로 유학하여 나라 요시노임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46년부터 58년까지 전남도청 및 여러 시군 기수技手를 역임하고, 1958년 6월 광주산림조합장光州山林組合長, 1969년3월 대한산림조합연합회 감사를 거쳐 1987년 8월 광주 향교재단 이사,1988년 5월 광주향교光州鄕校 모성회장募聖會長 등을 역임했다.평소 성행이 강직하고 율기律己가 엄정嚴整하여 다년간 향교 및 유도회儒道會 임원을 역임하면서 유도 창달에 기여한 바 지대하다.한편 문화류씨 충경공파 감찰공 종중회장, 문화류씨 전남종친회 부회장, 동 고문 등을 역임하면서 위선爲先 사업에 힘써 선조 묘소 정화 및 석물 구비에 진력하였다.출전 광주시사, 광주향교지, 광주산림조합지.-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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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회의원 김옥천金玉川<현대인물>
    제14대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지낸 기업가, 무등산 온천 관광호텔 대표이사 “국회의원 김옥천金玉川”
     김옥천(1940~1997)은 대한민국 기업인·정치가·국회의원. 본관은 광산. 광주 북구 본촌동 출신이다.1958년 광주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행정학과, 1963년 전남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석사과정을 졸업하였다. 그 후 학생군사교육단 제1기로 육군 보병학교와 포병학교를 졸업하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군인으로 병역의무를 이수하고, 대한민국육군 중위로 예편하였다.대한건설 대표이사(1976~1980년), 무등산 레저타운, 무등산온천관광호텔 대표이사(1980~1992년)를 역임했다.1981년 정치에 입문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권당 공천을받아 전라남도 광주시 동구·북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심상우 후보와 민주한국당 임재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1985년 평민당 민헌연民憲聯 상임위원을 역임하고,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 제8번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어 14대 의원을 지냈으며 93년 민주당 원내 부총무와 국회 예결위·건설교통위 간사를 역임했다.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광주광역시 북구을선거구 공천에서 이길재에게 밀려 탈락하였다.1997년 12월 12일 김대중 후보 정당 연설회에 참석한 뒤 강원 속초시조양모텔에 투숙했다가 가스누출 사고로 같은 당 소속 최정식 전 의원과함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그는 평상시 직책으로 전남탁구연맹 회장, 전남 건설협회 및 공제조합간사, 광산김씨 중앙종친회 부회장, 한국천주교실업인회 부회장, 전남대·동성중·광주상고 총동창회장 등을 지냈다.출전 대한민국 국회사, 연합뉴스, 광산 김씨 중앙종친회보-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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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시장 김일도金一道<현대인물>
    1958년 광주 민선 시장에 당선된 정치인 “광주시장 김일도金一道”
    김일도(1909~2007)는 대한민국 정치인·시장.본관은 김녕. 광주 북구 신용동 복룡 마을 출신이다.1952년~1956년까지 야당인 민주당 당적을 가지고 초대 전남도의원을 역임했다.1956년 9월~1960년 11월까지 제2대 전라남도 도의원을 지냈다.1958년 4월에 치러진 광주시장 선거에도 출마했다. 당시 선거에는 여당인 자유당 후보로 정상호가 출마했다. 이에 맞서 야당인 민주당 후보로그가 출마했다.이 선거에서 정상호는 3만 4천표, 김일도는 3만 8천표를 얻어 근소한 차이로 김일도가 당선되었다.이후 그는 1959년 11월까지 광주시장직을 수행했다. 그런데 광주시장 기록에는 민선이 아닌 관선 임명직 시장으로 되어 있다.1970년대에는 광산군 농지개량조합장을 지내기도 했다.출전 광주시사, 전라남도 의회사.-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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