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시명是鳴 노석정盧錫正<독립운동가>
사재를 털어 독립운동 자금을 보낸 시명是鳴 노석정盧錫正


노석정(1892~1967)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가. 자는 기준基準. 호는 시명是鳴. 이명異名은

기준基俊 基準. 본관은 광주. 노문규盧汶奎의

둘째아들로 광주 북구 일곡동 출신이다.

그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은 1919년 3·1운동

에 참여한 뒤 상하이로 망명했다가, 1920년 국내

로 잠입하여 동지인 전아협全雅莢, 조병철曺秉喆, 김정련金正連, 윤영기

尹永淇, 양인묵梁仁默, 노형규盧衡奎, 조병렬曺秉烈, 신유선辛有善 등과

함께 서울에 있는 신덕영 및 최양옥 등과 연락하며 광주, 화순, 곡성, 담

양, 보성 등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독립운동 자금 모

집 활동을 펼쳤다.

그는 광주군에 거주하는 이윤호李允鎬의 집에서 대한민국 군제특파원

軍制特派員 한준호韓俊鎬, 박문용朴文容, 이재환李在煥, 정용택鄭容澤

등과 회합하여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할 것을 논의했다.

3·1운동 직후에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에 가입하면서 부터다.

대동단은 1919년 3·1운동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는 시기에 전협全協, 최

익환崔益煥 등이 결성한 비밀 독립단체였다. 이 단체는 국내에서 제2의

3·1운동을 조직하려고 했고 그해 9월에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義親王 이강李堈을 상해임시정부로 망명시키려고 했다가 중도에 발각되

는 바람에 불발에 그친 적도 있다.

대동단 가입 후에 그는 광주 전남지역을 돌며 군자금 모금활동을 했다.

먼저 그 자신의 집안 자산을 팔아 상해임시정부에 송금했다.(광주시사 제

2권 477쪽) 아울러 광주 전남지역을 돌며 부호들에게서 군자금을 모금했

다. 그러던 중 체포돼 1921년 광주지방법원에서 그는 징역 7년 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동아일보 1931년 6월 4일자)

이후에도 독립운동과 사회활동을 지속해 1920년대에는 광주 고등보통

학교 학부모회 활동에 관여했고, 동아일보 광주지국 기자와 지국장으로

활동했으며, 노문영盧文永과 함께 빈농들의 자제들을 가르치는 ‘일곡청년

야학원’을 설립했다.(동아일보 1929년 1월 7일자) 1930년대에는 동아일보

여수지국장을 지냈고, 해방 후에는 광주에서 발행되던 호남신문 부사장과

한독당 전남대표를 맡았다.

1949년 03월 12일 국민회 전라남도본부 결성 추진위원회 추진위원으로

선정되고, 3월 31일 광주시지부를 광주극장에서 지부결성식을 거행한 결

과 선출된 임원은 위원장 장병준張柄俊, 부위원장 김영대金永大, 김용환

金容煥, 사무국장 강익수姜益秀, 그는 선전부장에 선출되었다.

정부는 노석정의 독립운동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을, 1990년 건국훈

장을 추서했다.

1991년 그의 유해를 국립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출전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 독립운동사, 광주지방법원판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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