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의병장 송학묵宋學黙<독립운동가>
장렬하게 처형당한 대한 제국의 지략가 “의병장 송학묵宋學黙”


 송학묵(1871~1910)은 대한제국 시절에 의병장. 자는 자화子化. 본관은

홍주洪州. 래영來永의 아들로 광주 북구 용두동 거진 마을 출신이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

을 일으킬 결심을 하고 1907년 10월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여 극

락강 상류 삼각산 요처에서 의병을 훈련하고 있는데 왜병이 포위하여 온

다는 정보를 듣고 적과 10리쯤의 거리를 두고 백주에 강을 건너 서쪽으로

진군하였다. 이를 고지에서 관망한 왜군은 어둠을 타고 추격하니 적의 전

략을 미리 알고 북으로부터 다시 회군하여 자기 진지로 돌아와서 훈련을

계속하므로 부하들이 그 전략에 감복하였다. 그곳에서 훈련을 시키는 도

중 일본군에 포위되자 진중이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므로 그는 소리 높여

“만약 혼란을 일으키면 대사大事를 그르칠 염려가 있으니 나의 계책에 따

르라.”하면서 “한 시각 후에 남산 위에서 총소리가 나면 동쪽으로 탈출하

라.”라고 명령을 하고 단신으로 어디론가 사라진 뒤 과연 한 시각 후에 남

산에서 총성을 내어 적을 그쪽으로 유인하여 의병은 한 사람도 다친 사람

없이 모두 동쪽으로 탈출하여 전원이 무사했다.

그 후 김동수金東洙 의병장 부대에 소속돼 활동했는데 김동수 부대는

1909년 같은 해에 신용동 복룡 마을 등지에서 보급품을 확보했고 광주군

덕산면(현. 서구 유촌동 일대)에서 친일 면장 등을 처단했고, 광주와 담양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 그 활약이 컸다.

그는 적정을 탐색하기 위해 단총을 몸에 품고 단신으로 적의 경비망 안

으로 들어갔다가 도중에 일본 기마병과 마주치게 되어 그의 등 뒤를 쏘아

사살하고 총검을 노획하여 돌아왔다.

그런데 1909년 3월로 접어들면서 전국의 의병은 불리하게 되거나 살상

당해 그 전력이 크게 쇠퇴하였는데, 그는 마침내 짙은 안개 속에서 적과

싸우다가 체포당했다.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적을 꾸짖으면서 탈옥을 위해 맨주먹으로 감옥을 부수다가 실패하였다.

1909년 늦가을에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적이 최후

의 유언을 묻자, “내가 비록 너희들 칼 앞에 쓰러지나 조금도 유감이 없다.

내가 죽은 뒤에 내 넋이 너희 나라에 들어가 너희 국민을 도륙

할 것이니 너희 나라가 망하는 날 나의 혼이 길이 살아

있음을 알리라.”라고 꾸짖고, 1910년 5월에 처형당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0년에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시사, 홍주송씨대동보, 한국독립운동사, 광주지방법원판결문.


-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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