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설죽雪竹 양상기梁相基<독립운동가>
부친과 함께 의병투쟁을 하다가 교수형 당한 “설죽雪竹 양상기梁相基”



 양상기(1883~1910)는 한말 의병장. 보명譜名은병기秉奇.

호는 설죽雪竹. 본관은 제주. 1883년 10월 10일 광주군서양면

이동(현. 광주시 북구 중흥동)에서 의병장 양진여梁振汝의 장남으로 출생하

였다.

1891년 8세에 장성 하청산 정이암 수학도에게 학문을 배우다가 국운이

기울여지자 학업을 중단하고 부친이 세운 담양군 대전면 삼인산 뒤편에

풍정암風征菴에서 22세까지 병서와 무예를 연마하였다.

1905년 우리나라 군대인 진위대에 입대하여 병사로 활동하였다.

1907년 정미 7조약이 체결되어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어 진위대를 나와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친과 의병을 모집, 왜적을 도모할 계획을 세우면서

화승총 1천정과 대완구 15문을 구할 것을 약속하고, 위장하여 광주경찰

서 순사가 되었다. 왜경이 되어 약속한 무기를 구해 보내며 기밀을 탐지하

다가 정체가 발각되어 파면 체포령이 내릴 기밀을 알고 탈출하였다.

1908년 4월 부친의 의병에 가담, 정훈과 교육을 담당하는 훈련대장직

을 맡았다. 그 후 5월에 광주, 창평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 독립부대를 창

설하고 의병장이 되어 참모장에 유병기劉秉淇, 도총장 안판구安判九, 후

군장 이문거李文擧, 포군장 안영숙安永淑, 도선봉장 조사윤曺士允이 임

명되었다.

동복 화순 곡성 담양 등지에서 친일역도를 처단하고 일본군과 싸웠다.

11월에 부친의 원병요청을 받고 200여명의 의병을 인솔, 담양 대치에 도착

하여 전해산 부대와 합류, 900여 의병군을 모아 야간훈련을 실시하였다.

1909년 3월 화순군 서유촌(현, 화순군 북면 서유리)에서 일본군과 교전

하여 크게 무찔렀다. 다음 5월 17일 담양 덕실(현, 담양군 무정면 덕곡리)

에 도착했을 때 같은 마을에 거주하는 정황두丁黃斗 밀정이 담양 수비대

에 제보하여 담양, 옥과, 창평 등지의 일군, 헌병, 경찰의 공격으로 교전 1

시간여에 겨우 탈출했으나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었고, 참모장 유병기는

팔에 부상을 당하였다. 그 후 동복, 창평, 옥과 분견소와 담양 수비대를 습

격하여 불을 지르는 등 많은 보복전을 전개하였다.

1909년 8월 남한대토벌작전으로 부친이 체포된 4개월 후인 12월 24일

밤에 전북 남원군 통한면 도통리 민가에서 토벌대와 교전 끝에 체포되었

다. 남원경찰서에 구속되었다가 광주감옥으로 이송되었다.

1910년 대구감옥으로 다시 이송되어 5월 17일 대구공소원에서 귀순할

의사가 없느냐는 물음을 받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귀순할 뜻은 추

호도 없으며 죽음이 있을 뿐이다. 만일 살아날 수 있다면 다시 의병을 일

으켜 침략자와 싸우겠다.”하였다. 교수형의 선고를 받고, 6월 16일 대구복

심원에서 교수형이 확정되었다.

이에 8월 1일 향년 27세로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유해는 매제인

정병모에 의해 인수되어 현재 광주광역시 서구 매월동 151-9번지에 안장되었다.

1977년 12월 13일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건국포장을 받고,

1990년 12월 26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2011년 광주광역시 북구에서는 도로명 주소를 부여하 면서 그의 의병활동을 기리기

위해서 임동 신안교에서 일곡동 동아아파트 뒤편 일곡교차로까지의 도로명을 ‘설죽로’

라고 명명하였다.그밖에 양진여, 양상기 부자의 의병활동의 내용은 전남폭도사,

판결문, 의병열전,한국독립운동사, 매천야록,한국인물대사전 등에서 볼수 있다.


출전 양진여·양상기 의병장 실기, 전남폭도사, 판결문, 의병열전, 한국독립운동사,

매천야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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