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소석小石 범윤두范潤斗<독립운동가>
광주 독립 만세 운동에 주도한 “소석小石 범윤두范潤斗”



범윤두(1891~1958)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호는 소석小石. 본관은

금성. 소강小岡 범치준范致駿의 차남으로 광주 북구 생용동 출신이다.

대서소 직원으로 근무하던 그는 1919년 3월 10일 광주 작은 장날을 이

용하여 김강金剛, 김철金鐵, 최병준崔丙浚, 최한영崔漢泳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광주는 경성부에서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 도쿄 유학생인

정광호가 귀국하여 동경에서 일어난 2.8 독립선언 거사 사실을 청년들에

게 알려, 2.8 독립선언서를 최한영, 김복수 등이 등사하여 두는 등 일찍부

터 독립만세운동이 싹트고 있었다.

한편 고종황제의 국장國葬에 참례하기 위하여 상경했다가 경성부의 만

세 시위를 목격했던 김철과 서울 유학생인 최정두崔正斗가 3월 5일 귀향

하여 이날 밤 남궁혁南宮赫의 집에서 김강, 최병준, 최한영, 황상호黃尙

鎬, 강석봉姜錫奉, 한길상韓吉祥, 최영균崔瑛均, 김용규金容奎, 서정희,

김태열金泰烈, 홍승애洪承愛, 손인식, 송흥진 등과 만나 경성부의 독립

만세 시위 정황을 전하고, 광주의 큰 장날인 3월 8일을 이용하여 독립 만

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각 학교 학생이나 시민들의 시위 참가 연

락 등 사전 준비를 분담하여 추진하였다. 그는 이때 최한영, 최정두, 한길

상, 김용규 등과 함께 선언서와 태극기의 준비를 맡았다.

 그러나 준비기일이 너무 짧아서 작은 장날인 3월 10일 오후 3시 30분으

로 거사 계획을 변경하고 독립선언서, 경고문, 독립가獨立歌 등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인쇄하였다.

3월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不動橋 아래의 작은 장터에는 기독교인, 숭

일학교, 수피아 여학교, 광주농업학교 학생이나 일반 주민 등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그는 다른 동지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

누어주며 큰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장 안을 행진하였

다. 점점 시위군중이 늘어나고, 시위대열이 시장에서 읍내로 빠져나가 만

세 시위를 계속할 때 일본 헌병·경찰은 시위군중의 기세에 눌려 시위를 제

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날 저녁 무렵 시위군중이 읍내를 돌아 경찰서 앞에 이르자 많

은 경찰과 기마 헌병이 출동하여 김철 등의 주동자를 연행해 가는 것을

보고 그는 격노한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서 마당으로 돌진하여 독립 만세

를 부르면서 연행자를 석방하라고 외쳤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자 일단 피신하였다가 2차

독립 만세 시위를 위하여 3월 17일, 18일 이틀에 걸쳐 송정면 선암리(현

광산구 선암동)에 있는 박경주의 집에서 독립선언서와 경고문 각 1,500여

매와 독립가獨立歌 500여 매를 등사하여 목포 등 인근 지역에 배포하는

등 계속하여 독립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에 발각되어 수배를

받고 피신하였다.

그러나 그해 6월 1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궐석재판으로 열려 소위 보안

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장기간에 걸쳐 고

통스러운 피신 생활을 하다가 1933년경에 붙잡혀 투옥(수형인명부1-1933

년 6월 6일, 수형인명부2-1933년 9월 15일)되었는데 출옥 후 조용히 지내

다가 1958년 5월 10일 별세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

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출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독립운동사, 광주지방법원판결문, 광주시사.


-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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