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서암瑞菴 양진여梁振汝<독립운동가>
호남의 의병투쟁에 헌신한 의병장의 대장 “서암瑞菴 양진여梁振汝”


  양진여(1860~1910)는 한말 의병장. 아명兒名은 석환錫丸.

보명譜名은 진영振永. 호는 서암瑞菴. 본관은 제주이다. 1860년 5월 11일 광주

군 서양면 이동(현, 광주시 북구 중흥동)에서양남중梁南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72년 13세에 장성 하청산 정이암鄭李庵에서 10년간 공부를 하고, 학

문연구와 과거준비에 전념하였다.

1895년 왜놈의 손에 민비가 시해되자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움을 알고

과거를 포기하고, 담양군 대전면 삼인산 뒤편에 풍정암風征菴을 세워 병

서와 무예를 연마하였다. 이 때 모여진 제자가 300여명에 이르렀다.

1904년 2월 23일 한일 의정서가 강제 조인되자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

심하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처가 마을인 장성군 갑향면 행정리(현, 담

양군 대전면)에 주막을 차렸고, 이어서 주점을 각 군마다 1개소씩 10여

곳을 두었다.

1907년 정미 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가을에 의병모집 격문을 각지

에 돌려 300여명의 의병이 모집되어 창의대장에 추대되고 도총장에 안판

구(본명 안영옥), 중군장에 박성일, 우익장에 김익지, 좌익장에 김처중, 포

대장에 윤평원을 결정하고, 마침내 선생은 그해 10월 전남 담양군 대치산

을 근거지로 거의 함으로써 의병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광주·담양·장

성 등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선생의 의병투쟁은 선생의 의

병부대 단독으로, 때로는 전해산, 강판열 의병부대와 연합의 진을 형성하

여 이루어졌다.

1908년 2월 김태원 장군의 원병요청으로 우익장 김처중 외 50여명의 의

병을 보내 무동촌(현, 담양군 남면 무동리) 전투에서 왜장 요시다吉田少

佐를 죽이고 많은 전과를 얻었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동년 10월 26일 단

독으로 광주군 송정읍 신촌리에서 일본군 및 순사대를 공격하고, 11월 14

일에 일본인 우체부를 담양군 오치면에서 처단한 일이 있었다. 나아가 연

합군의 편성은 화순 동복에서 온 200여명의 양상기 부대와 영광에서 온

전해산 부대 200여명, 영산포에서 온 강판열, 김태원 장군의 우익장 조경

환 부대 100여명 등 900여명의 의병이 연합부대를 조직 장성, 담양을 습

격한 뒤, 11월 23일 대치산에서 일본군 광주 수비대를 대파하였다. 그 후

의병의 모집과 군자금 조달 및 정보 수집 차 20여명을 인솔하고 각 지방의

주막을 순회하고, 광산군 서창면 만호리 이회춘李會春의 집에 유숙하고,

담양 본 진으로 귀대하던 중 가막골(현, 광주시 광산구 송정동 신촌)에서

나가고지中小路 군조의 합동수색대 일본 헌병 7명, 왜경 4명과 1시간 동

안 공방전을 치르고 본 진으로 귀환 후 본 진을 담양에서 장성 북하면 약

수리로 옮겼다. 12월 25일 야마다山田 소위가 이끈 토벌대의 매복 기습으

로 부상을 입었다.

1909년 일제는 2,260명의 대병력을 호남에 투입 남한대토벌 작전을 개

시하여 호남 일대를 유린할 때 양진여 의병장은 장성 갑향면 행정리(현,

담양군 대전면) 주막에서 총상을 치료하던 중 8월 25일 오후 병상에서 왜

군 헌병 정찰대에 급습을 당하여 체포되었다. 광주경찰서에 수감 되었다

가 광주감옥을 경유 대구감옥에 이송되었다.

1910년 3월 5일 대구 공소원 형사부에서 교수형이 선고되고, 4월 13일

대구 복심원에서 교수형이 확정되었다. 이에 5월 30일 대구감옥에서 사형

이 집행되어 51세로 순국하였다. 그러나 순국 당시에도 선생은 “한 목숨

은 아깝지 않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형을 받고 죽으니 유감”이라고 한

탄하였다고 한다. 이를 보면 선생이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

나 깊었는지 알 수 있겠다. 유해는 사위인 정병모에 의해 인수되어 현재 광

주광역시 서구 매월동 산 151-9번지에 안장되었다.

1977년 12월 13일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어 건국훈장 국민장

을 추서 받았다.

 1992년 10월 29일 광주광역시는 서암 양진여 의병장의 출생지를 통과

하는 서방4거리에서 전대4거리를 거쳐 동운고가도로까지 3,2㎞를 양진여

의병장의 호를 따서 서암로瑞菴路라 가로명을 지정하였다.

2000년 5월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

복을 위해 헌신하신 양진여 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이달의

독립운동가 양진여 의병장 공훈선양 학술강좌를 5월 6일 독립기념관 독

립관 교육장에서 순천대학교 홍영기 교수의 발표가 있었다.



출전 양진여·양상기 의병장 실기, 전남폭도사, 판결문, 의병열전, 한국독립운동사,

매천야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top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