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몽암夢菴 신덕균申德均<독립운동가>
왜놈들에게 피살당해 순국한 지리산 피아골의 의병장 “몽암夢菴 신덕균申德均”


 신덕균(1878~1908)은 대한제국기의 의병장. 자는 정효正孝. 호는 몽암

夢菴. 초명初名은 덕순德淳. 본관은 평산. 아버지 신태수申泰洙와 어머니

옥천장씨의 아들로 광주 북구 우산동 416번지 출신인데 1891년에 각화동

277번지로 옮겨 살았다.

일찍이 장등동에 사는 진사 장석헌 張錫憲 문하에 입문하여 학업에 열

중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그 후 기우만奇宇萬과 간재 전우田愚의 문하에

서 수학하여 학문에 뛰어났다.

27세 되던 1904년에는 각화리에 낙고정사樂古精舍라는 서재를 짓고 향

유들과 대의를 강론하고 충의효제를 권장하니 인근에서 추종을 원하는

사람이 많이 모여들었다.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뒤 최익현崔益鉉의 창의 격문을 받아 동지를

규합, 기회를 엿보던 중 1906년 6월 최익현, 임병찬이 태인에서 호남의병

을 일으킬 때 달려가서 참여하려 했으나 의병이 쉽게 패하자 중단하였다.

그는 1907년 1월에 창평에서 고광순高光洵이 의병을 일으켜 화순을 점

령하고 동복으로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촌 아우인 상철相徹과 같이

부하들을 이끌고 달려갔으나, 고광순의 병대가 도마치圖馬峙 전투에서

패하여 해산해 버리자 전세가 불리하여 광주로 돌아와 재기의 날을 기다

렸다.

 1907년 8월 고광순 의진에 들어가 종사관이 되었다. 이때 의진의 맹주

에 고광순이 추대되었고, 부장 고제량, 선봉장 고광수, 좌익장 고광훈, 우

익장 고광채, 참모 박기덕·고광문, 호군 윤영기, 종사 신덕균·조동규 등이

었다. 처음에는 40명 규모였으나, 곡성에서 포수와 무기를 수습하여 70명

으로 증원되어 남원으로 이동하려 하였으나 물거품이 되었다. 고광순은

1907년 8월 군대해산으로 일제의 국권 침탈이 노골화하자 고광순은 험지

인 지리산 피아골에 유진하고 그곳을 의병 기지로 하여 일본군과 항쟁하

였다.

1907년 9월 14일 고광순 의진은 그의 제의에 따라 일본인이 많다고 알

려진 동복읍을 습격하여 적들을 궤산시키고, 그는 하동 화개동으로 들어

가 한달 동안 의병훈련을 시행하며 의병 모집에 힘썼다.

이때 고광순은 구례 연곡사에 본영을 정하고 의진의 부서를 개편하였는

데 그는 참모가 되었다. 그러나 10월 17일 고광순 의병대는 광주수비대 및

진해만 요새 포병대와의 연곡사 전투에서 부하 의병들과 함께 장렬하게

순국하고 말았다.6)

그는 화개에 있을 때 병력과 무기가 부족하여 윤영기尹永淇와 함께 광

주에 가서 해산군인들을 모집하여 그 수가 40여 명이 확보되어 병력을 거

느리고 구례로 가는데 도중에서 고광순 의병대의 패배 소식과 고광순 등

의 전사 소식을 듣고, 독자적으로 지리산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하게 되

었다.

그는 1908년 초에 의병대를 정비하여 3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화개


6) 홍영기 「한말 고광순의 의병활동과 지리산 근거지론」, 『역사학 연구』P47, 2012.


花開로 진군하다가 왜적30여 명을 무찌르고 지리산을 종횡하면서 적과 전

투를 벌였다.그는 주장을 잃었기 때문에 이제 독자적인 활동을

펼 때가 왔지만, 일본군의 거센 추격을 모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

서 그는 지리산에서 호서의병장 윤내린尹乃隣, 전승화全勝化를 만나 산포수

수백명과 합세하여 벽소령을 넘어 함양 마천의소정·백모·두산 계곡에 진

지를 설치하고서 버티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독자적인 활동을 위해 새로

이 진영을 편성했다. 고태원(전주 출신)을 선봉장으로, 신보현(순창)을 참모

장, 채영찬, 채상순(순창)을 좌우익, 양춘영(순창), 조공삼(순천)을 후군, 임

화지(순창), 황창균(무주), 유장열(고창), 양치언(남원), 임당(태인),

김태권(태인)을 중군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는 중의에 의해 대장이 되었다.

그는 의병장이 되어 10여명의 장수와 3백여 명의 의군을 거느렸지만 군

수와 무기가 없으므로, 부장에게 군무를 맡기고 광주로 돌아와 전답을 팔

아 군기를 마련한 다음 부대로 돌아왔다.


  마침내 진영을 순창 회문산으로 옮기고, 이어 군사를 거느리고 정읍 내

장사로 들어가 참봉 김태원金泰元을 서로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도

독都督이 되고, 김태원은 선봉이 되고 그 아우 김율은 호군이 되었다. 이

때 격문을 지어 각 군에 보내고, 김태원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순창 회

문산으로 되돌아와 무기를 감추어 둔 곳을 찾은 즉, 간상배들이 적을 끌

고 들어가 모두 가져가고 포나 창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김태원과 더불

어 서로 개탄해마지않다가 다시내장산으 로 돌아왔다. 이때 김

태원은 장성 백양사에 집결하여장성읍을 공격하여 우편 취급소장 남부룡오랑南

部龍五郞을 처단한 후 영광·나주 방면으로 향했기에 그와 헤어지게 되었다.

1908년 11월이 되자 그에게 드디어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의사 1백여명을 모집하여 11월 1일에 길을 떠나 담양읍으로 들어가 성의

북쪽 민가에서 유숙하고, 2일에 순창 귀암사에서 자고, 3일에 장성 백양

사에 당도하여 천지신명에게 제사 지냈다. 그리고 피곤한 군사들이 포를

옆에 두고 휴식하는 시간이므로, 대오隊伍도 정해 있지 않았고 회문산의

무기가 유실되었으므로 군의 세력도 역시 축소되어 있는데 갑자기 일본군

이 쏘아대는 총탄이 비오듯하니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민가로 들어갔다.

그는 적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5일에 정읍으로 압송되니 길가에서 보는 자는 모두 그 붙

잡혀 가는 행색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6일 정읍 감옥 수용되었다가, 7일 정읍 고부

의 두승산斗升山에서 적에게 피살 순국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시사, 광주북구지, 평산신씨 광주·전남사,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동록.

-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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