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독립운동가 이창호李昌浩<독립운동가>
아버지와 형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가 요절한 독립운동가 이창호李昌浩

'


 이창호(1902~1931)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광산. 이명은 욱

호郁鎬. 독립운동가 주상周庠의 둘째 아들로 광주 북구 일곡동 일동 마

을 출신이다.

전남 광주숭일학교 재학 중 1919년 3월 10일 전라남도 광주군 본촌면

일곡리에서 아버지와 형 윤호를 따라 수백명의 군중과 독립 만세를 높이

부르면서 광주시내로 들어가 독립만세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일로 일본 경찰에 잡혀 문초를 받고, 그해 4월 13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

역 6월형을 받고 1919년 8월 13일 대구 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소위 보

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이 확정되기까지 광주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 후에는 ‘조선독립대동단’이라는 단체에 가입,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노석중盧錫中, 노석정盧錫正 등과 함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이

모금 활동에는 그의 아내인 유덕례劉德禮와 동생인 창호昌鎬도 참여했

다(동아일보 1922년 6월 15일). 당시 일곡동에 있었던 그의 집은 군자금

모금 활동의 아지트 역할을 했다.

광주 숭일학교 학생으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그는 1931년 3월 29살

의 나이에, 7월 13일에는 형 윤호가 옥고를 치른 후유증으로 33세의 젊은

나이에 형제가 사망했다.

이들 광산 이씨 3부자는 1920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군 자금모

금을 같은 일곡 마을 광주 노씨들과 함께 주도하다가 옥고를 치렀는데 광

산이씨와 강릉유씨가 혼인으로 연결되어 7명이나 광주 3·1 만세운동과 독

립군 자금모금에 참여한 경우는 당시 조선 8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90년에 형 윤호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으며 2006년에는 부친 이

주상은 건국훈장 애국장과 그는 건국포장을 받았다. 3부자가 모두 독립운

동 유공자로 정부 포상을 받았지만, 이윤호의 부인 유덕로와 처남 유계문

은 광주 3·1운동에 참가하여 징역 6월을 살았는데 이들은 아직까지 국가

서훈을 받지 못했다.

 

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시사, 광주지방법원판결문, 지산 지리지, 한국독립운동사.


-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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