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독립운동가 최정두崔正斗<독립운동가>
서울과 광주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최정두崔正斗


 최정두(1898~1930)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탐진. 광주 북

구 양산동 양지 마을 출신이다.

그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던 중 서울에서 전개된 3·1독립만세시위

에 참가하였다. 광무황제光武皇帝의 국장國葬에 참례參禮하기 위해 서

울에 와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게 되었던 김철金鐵과 함께 3월 5일 귀

향하여, 이날 밤 양림동 남궁혁南宮赫의 집에서 김강金剛, 최병준崔丙

浚, 최한영崔漢泳, 황상호黃尙鎬, 강석봉姜錫奉, 한길상韓吉祥, 최영균

崔瑛均, 김용규金容奎, 서정희徐廷禧, 김태열金泰烈, 홍승애洪承愛 등

과 회동하여 서울의 독립만세시위 정황을 알려주며 광주에서도 똑같은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광주의 큰 장날인 3월 8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기

로 결의하고, 각급 학교 학생과 주민의 시위참가 등 사전준비를 분담하였

는데, 그는 최한영의 집에서 한길상, 김용규, 범윤두范潤斗 등과 함께 독

립선언서, 태극기, 격문, 독립가를 밤낮으로 인쇄하며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준비기간이 너무 짧아서 작은 장날인 3월 10일 오후 3시 30분으

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3월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不動橋아래의 작은 장

터에는 기독교인,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須彼亞女學校, 농업학교 학생

및 일반 주민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독립만세 시위군중은 1천여명이 넘었

다. 이때 그는 다른 주동자들과 함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와 독

립선언서를 나누어 준 다음, 큰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

장안을 행진하였다. 점점 시위 군중이 늘어나고 시위대열이 시장에서 읍

내로 빠져나가 행진시위를 계속하였으나 일본의 헌병·경찰은 시위대열의

기세에 눌려 감히 시위방해를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이날 저녁 무렵 시위군중이 읍내를 돌고 경찰서 앞에 이르자 많

은 경찰과 기마헌병이 김철 등의 주동자를 연행하여 갔다. 이에 그는 격분

한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서 마당으로 돌진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연행

자를 석방하라고 외치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일제는 재향군인과 소방서원

까지 투입하여 총칼로 시위군중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시위대열은 무

너지고, 그는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결국 이해 9월15일 대구복심법원

에서 징역 3년형을받아 옥고를 치렀다.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대통령

표창과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시사, 한국독립운동사, 대구복심법원 판결문.


-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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