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독립운동가 이남채李南彩<독립운동가>
광주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한 숭일학교 학생 “독립운동가 이남채李南彩”


이남채(1899~미상)는 대한 독립운동가. 광주 북구 중흥동 출신이다.

그는 당시 숭일학교 학생으로 교사였던 최병준에게서 손병희 등 33인

이 연서한 「독립선언서」, 조선의 독립을 노래한 「독립가」를 받아 3월

10일 이 인쇄물을 20여 명의 동지와 배부하며 군중과 함께 만세를 외치

며 서문통을 거쳐 광주우체국으로 나아갔다. 일본 군경은 이를 무력 진

압했다.

그는 광주 작은 장날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주 지방에는 개화기에 일찍부터 기독교가 전파되어 북문 안 교

회가 설립되고 1908년 숭일학교가 설립되었으며 뒤이어 수피아 여학교,

제중의원 등 교육·사회 기관도 시설되어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러한 신문화의 영향으로 서울 및 일본 등지의 유학생들도 많이 생겼고

이들을 통해 세계정세와 독립운동의 움직임도 일찍부터 이해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 만세 시위가 벌어졌을 때 서울 봉래정 신

행 여관에 머물던 전남 나주군 나주면 출신의 김복현(김철)은 독립선언서

수천 매를 전남에 배포하기로 하고 3월 6일에 광주로 내려왔다. 김복현은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김강과 상의하여 3월 10일을 거사 일로 정하였다.

한편 고종황제의 국장을 기회로 서울에 올라갔던 기독교인 김철이 3월 6

일에 광주로 돌아옴과 함께 바로 운동 계획을 시작하였다. 3월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 아래 작은 장터에는 약 1,000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승

일, 수피아 학교 학생들이 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군중은 대한 독

립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시위행렬은 읍내를 돌고 돌아 저녁때 경찰서 앞으로 행진하였다. 경찰과

기마 헌병이 길을 막고 지도자들을 붙잡기 시작하자 군중들은 경찰서 앞

마당으로 밀려들어 갔고 경찰은 구타와 폭행을 자행하였다. 시위 후 체포

된 그는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받고 항고하였으나, 8월 13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옥고를 치르고 풀려나와 조용히 살다가 타계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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