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중암中庵 최종섭崔鍾涉<독립운동가>
독립운동을 하면서 노동자와 농민들의 보호자였고 반민특위 전남 지부장을 지낸 중암中庵 최종섭崔鍾涉



 최종섭(1882~1969)은 대한민국 정치인. 자는

성원聲遠. 호는 중암中庵. 본관은 탐진. 아버지

최병선崔秉瑄과 남평문씨 사이에서 1남 2녀 중

외아들로 광주면 서남리(현. 광산동) 42번지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잠시 몸을 피해 광산군

비아면 신창리에 은신하다 극락면 동림리 684번

지로 이거를 하였다. 해방 후 활동할 때는 대인동에서 기거하다 광주 북구

동림동으로 돌아왔다.

그는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이었지만 한학을 열심히 배우며, 일제의 침

탈로 나라를 빼앗기고 곳곳에서 의병 활동이 전개되던 구한말의 격동기

에 은둔으로 달랬으나 전국에서 일어나는 독립활동을 보고 여기에 참여

하게 되었다.

그는 1909년 대한독립협회 광주지부 실업부장을 시작으로 3·1운동을

비롯한 모든 항일운동에 직접 참여해 조국광복에 앞장섰다. 그 후 광주 사

회운동의 구심점이 되는 광주청년회가 1920년 6월 12일 창립되자 초대

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그는 그해 광주 유지들이 발기한 광주 상업조합 발

기인으로도 참여했다.

한편 소작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면서 1922년 지주들이 주도한

소작인 상조회 전남지회 부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지만 곧바로 노동자와

농민의 편에 서서 활동했다. 1924년에는 광주면 소작인회를 주도적으로

조직하고 1925년에는 광주 소작인 연합회장과 광주 수해 구제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주로부터 가해지는 온갖 불이익에 맞서 농민을 보호했다.

1927년 민족 협동전선인 신간회가 결성되자 그는 1927~1929년까지 신

간회 광주지회 조사부장과 총무간사 등을 역임하고, 1929년 중앙집행위

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육 부문에서도 많은 활동을 했다. 1926년 광주여고 창립 기성

위원과 1927년 광주교육보급회 규칙 기초위원을 역임했고, 1928년에는

사립 보통학교 유지 방침 연구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 후 그는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집을 광산군 비아면과 극락면으로

옮기고 농사를 지으며 은둔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식들에게 일제하

에서 봉급생활하는 것은 일제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것이므로 취직하

지 말고 농부가 되라고 훈계하기도 했다.

그가 사회활동을 재개한 것은 8·15해방 이후 이승만이 주도한 범국민운

동 단체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가입한 후 1946년 2월 전남지부장을 맡

아 사무실을 충장로 5가, 구.금성여객 자리에 두고 임원은 부지부장에는

장병준, 사무국장에는 장병상을 각각 선출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신

탁통치를 반대하고 좌익을 반대하며 우선 반쪽이나마 정부부터 수립하자

고 주장하며 좌익단체에 대항해 산하에 만들어진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

맹과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의 전남지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 문제가 UN으로 이관되고 국제연합 위원단이 들어올 때,

그는 전국환영회 전남 대표로도 활동했다. 또한 그는 남한 단독으로 실시

한 1948년 5·10선거에서는 총선거 대책 전남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국민

이 선거에 참여하도록 권유하기도 했다.

1946년 11월 간접 선거를 통해 미군정이 조직한 조선과도 입법위원에

참여했다. 1948년 9월 22일 과거 일본 강점기에 친일 부역해 동포들에게

악질적인 반역 행위를 자행한 반민족행위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반민족행

위자에 대한 처벌법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그 실행기관으로 10월 23일 반

민특위가 구성되었는데 그는 전남지부장을 맡았다. 당시 반민특위 전남지

부는 20명을 구속 송치하고 18명을 불구속으로 조사하는 등 38명을 조사

했는데, 특위는 일제의 식민정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벼슬을 지낸 거물급

들은 불구속으로 가볍게 처리하고 독립운동자를 탄압한 경찰 출신들을

중점적으로 처벌했다. 그러나 반민특위의 활동은 너무 늦게 시작되어 이

미 반민족행위자들이 정계, 경찰, 군부 등 각계가 층에서 고위직을 차지하

고 있었으며, 이들의 집요한 방해 공작으로 결국 반민특위 활동은 좌절되

고 말았다.

그는 정부수립 후에 국민회 전남본부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한편으로 호

남, 동강 두 신문사의 사장을 거치면서 지방 언론 창달에도 앞장섰으며,

광주고등법원과 광주고등검찰청을 유치하고 전남대 전신인 대성대학 기성

회장을 맡는 등 지역사회의 발전에 남보다 앞장서 활동했다.

노년인데도 왕성한 활동을 보였던 그는 한국전쟁 이후 별다른 활동을 하

지 않고 『사서오경』, 『의학』, 『예서』 등을 읽으면서 생활했다. 그러다가

1969년 2월 7일 88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그의 공적을 기리고자 2월 11일 광주공원 광장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은

수많은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그는 일생을 자기희생과 침략자에 대한 투쟁 그리고 지역 발전과 교육,

언론, 문화 향상에 바친 광주의 지도자였다.

주요 양력을 소개하면

1909년 대한협회 광주지부 실업부장

1919년 광주청년회장

1920년 조선교육개선회 발기인, 동회 전남위원

1922년 광주노동조합장

1922년 광주 소작인회 연합회장

1926년 광주 사립 보통학교 유지 회장

1927년 신간회 중앙 집행위원 광주지부간사

1945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광주지부장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전남지부장

1946년 대한노동총연맹 전남연맹 위원장

1946년 입법위원

1946년 대한농민총연맹 전남지부장

1946년 민족통일총본부 전남사무국장

1947년 동광 신문 사장

1947년 국제연합위원단 전남환영회 전남대표

1948년 민족대표자 대회 광산군 대표

1948년 총선거 대책 전남 위원장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전남 조사부장

1949년 국민회 전남도 본부 위원장

1949년 성균관 전남도 전학

1949년 유도회 전남본부 부위원장

1949년 대성대학 기성회장(현.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1949년 전남 농지위원

1949년 호남신문 사장

1950년 광주고등법원, 고등검찰청 설치 기성회장

1950년 무양서원 재단법인 이사장

1950년 무양중학교 설치 기성회장

1951년 광주호법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출전 광주시사, 광주·전남 광복 30년사, 네이버 검색창 “최종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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