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독립운동가 이윤호李允鎬<독립운동가>
독립운동자금 1만원(현재 5억원)을 모금한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이윤호李允鎬”


  이윤호(1898~1931)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본

관은 광산. 기미독립운동 광주·전남의 주동 인물로

선두에서 지휘했던 이주상李周庠의 아들로 광주 북

구 일곡동 일동 마을 출신이다.

이윤호는 아버지, 동생 이창호李昌鎬, 처남 유계

문劉桂文 등과 함께 3·1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질이 청수하였고 자라서는 우월한 성적으로 광주 숭

일중학교를 졸업하여 학식이 밝았다. 1919년 3월 10일 전라남도 광주군

본촌면 일곡리에서 동생 이창호 등과 함께 수백명의 군중을 지휘하여 독

립만세를 높이 부르면서 광주시내로 진입, 독립만세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그해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

월형을 받고 대구 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광주교도소에서 옥

고를 치렀다.

그 후에는 ‘조선독립대동단’이라는 단체에 가입, 자금을 모으기 위해 노

석중盧錫中, 노석정盧錫正 등과 함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이 모

금 활동에는 그의 아내인 유덕례劉德禮와 동생인 창호昌鎬도 참여했다.

당시 일곡동에 있었던 그의 집은 군자금 모금 활동의 아지트 역할을 했다.

1920년 5월, 중국 북간도 신흥무관학교에서 한문 교사로 일하던 신덕

영, 최양옥이 광주로 내려왔다.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에 필요한 무기와 식

량을 사들이기 위해 상대적으로 현금을 많이 가지고 있던 부자들을 대상

으로 자금을 모금키로 하고, 이에 따라 광주와 전라도에 이들을 보냈다.

이들은 광주 3·1운동 핵심 인물이었던 이윤호, 이창호 형제를 찾아갔고,

이윤호는 같은 마을에 살고 있던 노씨 5명을 설득해 군자금 모금을 주도

했다.

이들은 한발 더 나아가, 모금으로 끝나지 않고 전라도 부자들을 찾아가

권총을 이용한 모금 운동으로 방향이 바뀌게 된다.

1920년 10월 15일, 일곡리 그의 집에서 최양옥, 신덕영, 박일봉, 노기준

盧基準 등과 논의하면서 권총을 구해서 독립자금을 만들자고 합의했다.

다음날 최양옥이 서울로 올라가 권총을 구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

들은 생각 끝에 장난감 권총 2정을 휴대하고 이경민과 함께 광주로 내려

왔다.

 총을 구하지 못해 거사의 추진을 망설이던 그들은 2개 반으로 나눠 추

진키로 하고 1반은 이윤호가 이끌고 화순군, 나주군 방면으로, 2반은 담

양군, 곡성군으로 최양옥, 신덕영, 노기준이 내려갔다. 이들은 장난감 권총

2정으로 많은 성과를 거뒀다. 전라도 부자를 찾아간 그들은 곡성군 칠보

리의 심윤택 집에 들어가서 장난감 권총을 들이댔다. 눈앞에서 권총을 보

고 놀라 뒤로 넘어진 심윤택은 그 자리에서 독립운동자금 1천 500원을 내

놓겠다고 약속했다.

장난감 권총의 위력에 자신감을 얻은 2반은 담양군 창평면 부자 박종

호朴宗鎬의 집에 가서는 저항하려던 무리를 권총 한 자루로 제압하고 모

두 묶었다. 박종호에게 1천원을 요구하고 그 자리에서 40원을 모금했다.

이러한 모금 활동을 며칠 후 경찰이 알게 됐고, 광주로 가던 도중 모두

체포됐다.

다행히 자금을 가지고 있던 신덕영은 임시정부에 전달 후 잡혀 임시정

부 재정에 숨통을 틔게 했다. 이들이 모은 자금은 당시 약 1만원 가량으로

현재 가치는 5억원에 달하는 큰돈이었다.

이윤호가 이끌었던 1반 또한 대동단 조선지부원들도 대부분 체포됐다.

이들은 3~4개월의 조사 후 기소됐고, 공판에서 이윤호를 비롯한 대동단

조선지부의 단원들은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것을 떳떳이 밝혔다.

그는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린 대동단 재판 당시에 궐석재판으로 징역 7

년형을 받고, 1922년 9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돼 1924년 12월31

일까지 옥고를 치렀다. 그의 형제는 1931년 3월 에 동생 창호가 29살의 나

이로, 7월에는 형인 그가 33세의 젊은 나이에 후유증으로 같은 해에 사망했다.

33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의 묘비에 애절함이 그대로 적혀있다. 정

부는 그의 이러한 공로를 기려 1986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을 추서

했다.

1988년 10월 애국지사광산이공윤호공적비愛國志士光山李公允鎬功蹟

碑는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 일곡 마을에 세웠다. 규모는 높이 270cm,

폭 56cm, 두께 26cm이며 비문은 광산인 김강일이 썼다.

1994년 그는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출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시사, 광주지방법원판결문,

국가보훈처 공훈록.


-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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