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대천大川 조경환曺京煥<독립운동가>
광주 수비대장 요시다를 사살한 의병 선봉장 대천大川 조경환曺京煥


조경환(1876~1909) 대한제국기의 의병장. 본명은 준환準煥.

자는 서암棲巖. 호는 대천大川.본관은 창녕昌寧. 병원秉元의

아들로 1876년 2월 14일 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 693-2

번지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질이 총명하여 부친의 의지로 9세부터 22세까지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따라서 14년의

긴 기간 동안 학문을 닦았으니 그는 스승인 면암 최익현으

로부터 우국애민憂國愛民적인 위정척사의 사상을 이어받아 그것을 나라

를 위한 자주적인 민족사상으로 체계화한 선비로 학문적으로 경지에 이

르렀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자 이를 본 그는 분

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1907년 12월 초순에 광주의 김원오金元五, 김

동수金東洙, 양상기梁相基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10일에 함평의 죽

봉竹峰 김태원金泰元 의병진을 찾아갔다. 13일 의병 진영을 편성할 때 그

는 좌익장의 임무를 맡게 되어 항일의병의 길을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1907년 12월 14일 새벽, 함평 성내城內의 일본군을 급습하여 적 수십

명을 생포하고 총 18정 및 다수의 화약과 탄환을 노획하였다. 그날 밤 학

교리에 주둔한 일본의 기병대騎兵隊를 습격하고, 함평향교 뒷산으로 퇴

각하여 전 현감 이용안李龍 安의 집에서 휴식하였다. 이 전투 이후 조경환

은 김율 의병진과 이진사 의병진에 합세하여 세력을 키워 김태원 의병부

대의 선봉장先鋒將이 되었다.

12월 27일 삼계면 사창을 습격하고 군량을 확보하였다. 또한 상도리 낭

월산浪月山에서 일대 격전을 전개하여 10여 인의 적을 잡아 죽였으나 아

군도 4명의 중상자를 내었다.

죽봉 김태원 의병진이 구정 초하루 전날 함평, 영광, 나주에서 규합한 많

은 장정을 인솔하고 창평 무동촌舞童村에 가기 위해 창평 지곡芝谷에 도

착했다. 그런데 불길한 전갈이 왔다. 성재 기삼연 호남 창의 대장이 순창

구수동에서 일군에게 체포됐다고 했다. 승전을 다지며 다음 전투의 행운

을 빌었던 그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1908년 1월 1일(일요일 양력 2월 2일) 무동촌에 주둔하고 있는데, 일본

군 광주 수비대장 요시다吉田 소좌의 기마병 1부대가 무동촌을 향해 추

격해 온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김태원은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골목길

돌담을 전략상 총알 막는 방벽으로 이용했다. 이미 아우 김율과는 부대가

나뉘어 사실상 독립한 상태였다.

김태원은 부하들을 분산시켜 각 골목에 배치했다. 임기응변으로 여기서

사격술이 뛰어난 두 사수 강길환姜吉煥, 조덕관趙德寬을 복병으로 배치

했다. 참으로 일본군과 서로 만나 싸울만한 설날 아침의 매혹적인 무동촌

전투였다.

오늘의 전투에 대비해 선봉장 조경환, 도포장 최동학, 후군장 김옥현,

참모장 유병기 등 쟁쟁한 포진으로 각자 독자적 체제로 부대 형성을 강

화했다.

요시다의 기마 병력은 오만한 기세로 쳐들어왔다. 이때 위장 전술로 한

쪽 길을 터서 달아나는 척하였다. 이에 요시다가 걸려들었다. 돌담에 숨어

침착하게 기다리던 복병의 눈앞에 서서히 사정거리에 표적이 들어왔다. 이

내 방아쇠를 끌어당기자 바로 요시다를 말 위에서 떨어지게 했다. 참으로

명쾌한 전과였다.

이 창평 무동촌 전투에서 대장 요시다吉田 이하 수명을 사살하는 전과

를 올렸다. 이곳은 산중이 되어 오래 머물 수 없으므로 나와서 장성 월평

月坪으로 향하여 수일 동안 머물렀다.

1908년 2월 21일(양력 3.23) 임곡면 광곡廣谷에서 의병 80여 명이 토벌

대가 포위 공격하여 심야에 탈출하며, 10여 차례 적의 공격을 받아 엎치

고 덮쳐 김태원 의병장이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1908년 2월 24일(양력 3.26)에 김태원 의병장이 포군 70여 명을 거느리

고 임곡면 토물(土泉) 뒷산에 복병하고 일병과 싸웠는데 처음에는 일병 3

명이 죽고 1명은 도망하여 각처의 수비대에 응원병을 청하여 일병 60여

명이 와서 오전 8시부터 자정까지 싸워 일병은 30여 명이 죽고 의병도 10

여 명이 죽었다.

1908년 3월 7일 영광의 토산土山에서 왜병과 교전하였는데 적이 예상

밖으로 많은 병력으로 대항해 옴으로 전세가 불리하게 되었다. 이에 병력

을 불갑사佛甲寺로 후퇴시키고 부상병을 치료하며 무기를 수선하며 다음

을 기다렸다.

1908년 3월 25일에는 의병부대를 2대로 나누어 1대는 김태원이 영솔하

여 천곡泉谷으로 갔고, 조경환은 나머지를 영솔하고 광산군 어등산魚登

山으로 가서 적과 교전하였다. 이날 전투에서 2개 부대가 모두 참패를 당

하고, 김태원이 중상을 입게 되어 함께 함평의 당산촌堂山村 나평집羅平

集의 집에 은신하여 치료하였다.

4월 8일부터 함평군 해보면 지월치芝月峙 표군팔表君八의 집에서 전략

수립을 위하여 막료 회의를 주재하였다. 김태원은 일찍이 병兵은 정예精

銳가 중요한 것이지 숫자의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다고 역설하여 평소

거느린 부하는 40~50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치밀한 훈련과 실전을 거쳐

정예 부대에 속해 있던 부하들은 조경환과 오성술吳成述, 전해산全海山

이 있었다.

김태원이 허리 통증이 심해져서 치료차 4월 23일 광주군 소고룡면 두동

으로 가서 유숙하고 24일 함평군 오산면 박산博山(현. 임곡면 박호리) 마

을로 들어갔다.

사실을 탐지한 수색대가 김태원이 어등산 아래 박산 마을에 잠복해 있

음을 확인하고 박산 마을을 포위 수색하여 오후 1시 각 부대의 부서를 정

하여 행동에 들어가 사면을 포위하고 곧바로 맹렬한 사격을 교환하였는

데, 오후 7시까지 교전 끝에 어등산 밑 바위굴에서 좋은 옷을 입은 폭도 1

명이 도주하자, 이를 우두머리로 인정한 수색대 일본인 순사가 급히 추격

하여 생포하려 하였으나 교묘히 도주하여 추격이 어려워지자 사격이 가능

한 지점에서 곧바로 사격을 가하여 이를 죽였다. 뒤에 시신을 확인한 결과

김태원으로 판명되었다.

1908년 4월 25일 김태원 의병장이 순국한 뒤 조경환은 전부터 함께 전

투에 참여한 바 있던 전해산全海山과 더불어 의병진을 수습하고, 일부의

잔병은 조경환이 인솔하였다.

1908년 5월 5일 의병들의 중의에 따라 전해산을 의병대장으로 추대되

었다.

1908년 6월 2일 영산포榮山浦으로 가서 동곡(동산)에서 이대왕李大旺,

이대극李大克의 왕의병진과 합세하여 적의 포수 1명을 생포하였다.

1908년 6월 30일 전해산과 의병을 나누어 동곡면 동각리東角里 유군

발柳君跋의 집에 묵으면서 의병진을 정비하였다. 이때 중의에 의해 의병장

으로 추대되어 호남 창의대장이라 칭하고, 진용을 정비한 다음 각지 향교

에 수차 격문을 발송하여 항일사상을 고취해 의곡과 의병을 모집하는데

전력하였다.

1908년 9월 김원국金元國은 광주 선암시장仙岩市場에서 의병장 조경

환을 만나 동생 원범元範이 같이 활약하고 있음을 알고 조경환 의병진의

선봉장이 되었으며, 이때 동생은 도포장都砲將에 임명되어 형제가 함께

활약하게 되었다.

1908년 9월 21일 전군을 인솔하고 흑석리黑石里로 가서 경찰대와 교전

한 결과 대장 정득주鄭得柱 이하 수명을 생포하였다.

1908년 10월 7일 함평의 석문石門에서 적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10월 29일 장성군 진원면 고산리에서 휴식을 하고 있던 중 대치

大峙에서 전해산의 의병진이 적과 교전 중이라는 정보에 접하고 의병진을

이끌고 대치로 가서 응원하여 적 수십 명을 생포하였다.

1908년 11월 8일 광주군 우치면 본촌本村에서 적과 교전하였으며, 11

월 25일 전해산 의병부대와 유완요柳完堯와 김여효金汝孝의 의병부대가

연합하여 적과 교전 끝에 적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이처럼 연전연승하던 조경환 의병은 1908년 12월 19일(양력 1909. 1.

10) 구정을 앞두고 과세차 의병을 귀향시키고 몇 명의 막료와 함께 어등산

사동寺洞에 은신하고 있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 헌병대의 급습을 받아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기

증받은 백마를 타고 이리저리 내달으며 일병을 무찌르던 중 적탄이 오른

쪽 가슴에 연달아 두발을 맞아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을 깨달은 조경환

은 목에 걸린 망원경을 벗어 놓고 왼쪽 품안에 깊이 간직하였던 의병진의

구체적인 내용과 명단을 꺼내 불사른 후 조용히 순국하였다.

그의 3년에 걸친 항일의병 활동은 33세의 젊은 나이에 나라를 위해 가

셨지만 그 성과는 천추에 빛나리라.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3월 1일 건국훈장 단장(법이

개정되어 지금의 독립장이다)을 추서하였다.

1973년 10월 16일 국립묘지(현. 국립 서울 현충원)에 안장하였다.

광주광역시는 북구 오치동 989-18번지 한전 전남지사 앞에서 문흥중학

교와 문흥1동 주민센터를 거쳐 문흥동 972-1번지 현대유치원 앞까지 길이

2,065m의 길을 북구에서 새 주소 가로명을 대천로大川路로 지정하였다.



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한국독립운동사, 어등산(魚登山)에서 순국한 불굴의

의병장 조경환.-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top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