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술재述齋 안종기安鐘基<처사,선비>
망국의 한을 비분강개한 구인회를 조직한 “술재述齋 안종기安鐘基”


 안종기(1881~1949)는 구한말 유학자. 자는 중술仲述. 호는 술재述齋.

본관은 죽산. 서헌瑞軒 안규용安圭容의 아들로 북구 용봉동 봉곡 마을

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타고난 맵시가 순수하여 가정의 근본 학문을 이어받고,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을 사사師事하여 학문의 지름길을 정하고 진실한 공부를 일

찍이 성취했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경술국치로 일제가 대한제국의 통치

권을 빼앗고 한일합병조약을 강제 체결함으로써 고향에 삼양정사三陽精

舍를 짓고 은거하며 상고上古 박노원朴魯寃과 부해浮海 안병택安秉宅으

로부터 문인門人으로 칭하여 졌으며, 서평西坪 김기상金基尙,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 송산松山 권재규權載奎에게서 견문을 넓히었고, 율계栗溪

정기鄭琦, 과재果齋 이교우李敎宇, 만백晩柏 김병대金炳大 등이 그와 가

장 가깝게 교우했던 이들이다.

효행이 돈독하여 어버이 질환에는 생피를 먹이려고 자기 손가락 끝을

째기도 하였고, 스승의 일에 성의가 있어 담대헌澹對軒을 중건重健하고

고산사高山祠를 창건創建하였으며, 송사집松沙集을 발간할 때도 심력을

기울이곤 하였다.

그의 성품은 밖으로는 화락하나 안으로는 강인하고 행동은 민첩하나

말은 느리게 하고 실하면서 화사하지 아니하고 검소하나 결코 비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또한 그의 부친인 서헌端軒과 같이 망국민亡國民이

된 것을 서러워하여 동지들과 구인회九人會5)를 만들어 비분강개悲憤慷

槪로 세월을 보내다 타계하였다.

그는 저술著述에 힘쓰지 않아 긴 유고遺稿는 많지 않으나,그가 하세

후에 장자인 방순邦淳이 약간 자료를 수집하여 『술재유고述齋遺稿』만

남게 되었다. 이 유고 중에서 「논궁리論窮理」, 「소학문목小學問目」,

「논어문목論語問目」은 초학初學의 가르침에 지표가 되었고,

「사우간왕복문師友間住復文」은 그의 학문과 사상 엿볼 수 있겠다.

『술재유고述齋遺稿』는 1989년에 전라남도에서 향토문화연구

자료 제28집으로 『서헌유고端軒遺稿』와 함께 영인 간행하게

되었다.




5) 구인회九人會 : 1933년 8월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결성된 문학 문인 단체이다. 이종명

(李鍾鳴)·김유영(金幽影)의 발기로 이효석(李孝石)·이무영(李無影)·유치진(柳致眞)·이

태준(李泰俊)·조용만(趙容萬)·김기림(金起林)·정지용(鄭芝溶) 등 9인이 결성하였다.

그러나 발족한 지 얼마 안 되어 발기인인 이종명·김유영과 이효석이 탈퇴하고 그 대신 박

태원(朴泰遠)·이상(李箱)·박팔양(朴八陽)이 가입하였으며, 그 뒤 또 유치진·조용만 대신

에 김유정(金裕貞)·김환태(金煥泰)가 보충되어 언제나 인원수는 9명이었다.




출전 술재유고,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남도 정자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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