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난곡蘭谷 이연관李淵觀<처사,선비>
무등산 유람기 ‘유서석록’의 저자 “난곡蘭谷 이연관李淵觀”

 

 이연관(1857~1935)은 조선 말기의 유학자. 자는 형국炯國. 호는 난곡蘭

谷. 본관은 광산. 아버지 이인석李麟錫과 어머니 광주 노씨 사이에 광주

북구 황계리黃鷄里에서 태어났다.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의 엄한 가르침을 받으며 일곡日谷 외가에서 성

장하였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잡스러운

행동을 일체 삼갔다. 이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른 결과이다. 18세에 모친

을 모시고 고향인 황계리로 돌아와 집안을 일으키고 여섯 가지의 덕행(효

도, 형제 우애, 친족 화목, 외척 친목, 친구 간의 믿음, 구휼)을 수행修行하

여 인근 향리에 문장과 현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1891년 그는 박성의朴誠義, 임장준任璋準, 송재담宋在淡 등 무등산을

유람하고 『난곡유고蘭谷遺稿』에 「유서석록遊瑞石綠」을 남기기를

“서석봉瑞石峯을 우러러 바라보니 한 덩어리의 뭉쳐진 숙기淑氣가 엄연하

면서도 또한 엄숙하였고, 입석의 만 길은 삐죽삐죽 천겹으로 신령스러운

새들과 기이한 짐승들이 무리를 지어 노닐고, 기이한 꽃과 아름다운 풀들

이 구름을 헤치며 웃고 있었다. 광석대廣石臺와 풍혈주風穴柱는 생긴 꼴

이 기이하였고, 주검굴鑄釰窟과 용추동 龍 湫洞의 고적은 지금까지도 남

아 있어서 별천지의 특이한 격은 붓으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산수가 이

처럼 맑고 맑은데 어찌하여 생김새나 재주가 뛰어난 인물이 없었겠는가?”

하였다.

1895년 동학東學의 교도들이 그의 명성을 듣고 유혹하여 그를 끌어들

이려고 하였으나 단호히 거절하였다. 1906〜1907년에 송사 기우만奇宇萬

이 항일의병장으로 체포되어 광주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위험한 곳을 모시고 따라갔다.

1898년 4월 무등산과 금당산이 한눈에 보이는 운암산에 그가 지은 영

풍정迎風亭은 아쉽게도 일제 말기 무렵 없어져 불과 50년 남짓 짧은 기간

존재했지만 많은 문인들이 시와 글을 짓고 학문을 연마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1919년 고종의 국상을 당하여서는 두문불출하였다. 만년에는

향산고사香山故事를 본떠서 구로회九老會를 만들어 시문詩文

을 통하여 울분을 달래다 향년79세로 타계하였다.

 저서로 난곡유고蘭谷遺稿는아들 완상玩相이 편집, 1979년

손자 재복再福이 간행하였다.


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호남절의록, 호남 정자기행, 북구 문화유적, 난곡유고.


-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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