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서헌瑞軒 안규용安圭容<처사,선비>
광주공원 ‘안규용의적비’의 주인공 “서헌瑞軒 안규용安圭容”

 

 안규용(1860~1910)은 구한말 유학자. 자는 삼공公三. 호는 서헌瑞軒.

본관은 순흥. 아버지 국환國煥과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에 광주 북구 용

봉동 봉곡鳳谷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할아버지인 봉수鳳壽에게 수업하였고 또 어머니의 명을 받아 송

사松沙 기우만奇宇萬선생을 스승으로 삼고 태극이기설太極理氣說을 터

득하고 명정학明正學 척사설斥邪說로 당시 학문의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

고 선생에게 누차 상서하여 시의時義와 경의經義의 의문점을 토론하였던

바 선생은 “견해가 정밀하니 극히 옳은 말입니다(極是極是 見得精密). 군

자의 도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니 어찌 희열을 이기오리까(碩果消息 豈

勝喜悅)?” 등의 답이 있었다.

그와 교류했던 이들로는 일신日新 정의림鄭義林, 면암勉菴 최익현崔益

鉉,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상고上古 박노원朴魯寃, 부해浮海 안병택安

秉宅, 판서判書 서상우徐相雨, 주목州牧 이희성李羲性 등 이었다.

을미시변乙未弑變이 있은 후 송사선생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는 사생死

生을 맹서盟誓하는가 하면, 1906년(丙午)에 송사선생이 의병을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광주옥光州獄에 체인逮囚되었는데 그는 수개월 동안 잠

시도 옥문을 떠나지 않으면서 식사를 제공하였고, 선생이 경성감옥으로

압송됨에 그가 또 시종배종終始陪從하여 무사귀환하였다.

 의병장 기삼연奇參衍이 사형되어 그의 유해는 한동안 광주천변 백사장

에 방치되어 뉘 감히 접근하는 자가 없었으나 그가 단독으로 관棺을 갖추

어 수습하여 광주군 공수방 서탑등(현. 광주광역시 남구 사동 사직공원)

에 안장되고 ‘호남의병장 기삼연’이라 새긴 나무 비석을 세웠다. 그로부터

20여 년 후에 장성군 황룡면 관동리 보룡산 선영에 이장되었다가 2009년

고향 마을인 황룡면 아곡리 뒷산에 재차 이장되었다.

왜적이 광주향교에 병원을 설치코자 통문을 돌리어 군 관아에서 유림회

의를 열었는데 군수 이하는 오히려 반대를 못하나, 그는 적극반대하여 결

국 주장主將에게 끌려가 무수한 변론 끝에 계획을 변경하고 중지하였는

데 얼마 후에 돌연 병원간판이 향교에 걸려있어 그가 또 힐책하여 못하게

함으로 교궁校宮이 보호되었다. 광주유림은 향교근처에 그의 의적비義績碑를

건립하여 그 공을 기리었다.

그는 51세에 타계하여 저서 『서헌유고瑞軒遺稿』를 남기었

는데 증손 병도秉度가 여러차례 간행코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

하고, 1989년에 전라남도에서 향토문화연구자료 제28집으로 영인

간행하게 되었다.


출전 서헌유고,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광주향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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