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죽암竹巖 이응구李應龜<처사,선비>
학창의를 입고 백우선을 흔들며 유유자적한 “죽암竹巖 이응구李應龜”

 


 이응구(1703~1781)는 조선 후기의 유학자. 자는 주서周瑞. 호는 죽암竹

巖. 본관은 광산. 삼우당 이제백李齊白의 아들로 광주 북구 운암동 황계

마을 출신이다.

 그는 눈썹이 맑고 눈동자가 밝았으며, 타고난 성품이 인자하고 온화하였

다. 또 부모에게는 효심을 다하고 형제간에 우애도 깊었다. 지조를 지키고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였으며, 문사文詞에도 능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아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선산先山 아래 집을 짓고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선영을 바라보며

절을 하기를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에도 멈추지 않았으며, 늙어서도

그치지 않아 마을에서는 그의 한결같은 효심을 칭찬하였다.

그는 사람을 대할 때나 사물을 접할 때는 언제나 성심을 다해서 대했으

며, 입으로는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다. 또 한가한 겨를이 있으면 꽃을

가꾸고, 때때로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 부르기를 즐겼다.

만년에 자미산紫微山 선산 아래 집을 지었는데 가파른 바위가 사진 같

이 솟아 있고 바위 가에 대나무가 있어 덮으니 호를 죽암으로 하였다. 죽

순이 여름에 나는 것인데 겨울에 돋아나 무성하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기

이하게 여기었다. 뜰가에 연못을 파고 향기로운 연꽃을 심었다. 그리고 학

창의鶴氅衣를 입고 백우선白羽扇을 흔들며 이 가운데서 산책하니 원근

선비들이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

그의 둘째 아들 경인 또한 그가 병이 났을 때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그

의 목숨을 3일 동안 연장하게 하는 등 집안 대대로 효자가 나자 고을 사

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향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집으로 『죽암유고竹巖遺稿』 4권이 있다. 권 1에는 오언절구

81수, 오언율시 1수, 오언고시 1수, 칠언절구 134수와 화답시 9수가 수록

되어 있고, 권 2에는 칠언율시 36수와 화답시 48수가 실려 있다. 권 3에는

잡저 4편과 화답글 5편, 잠箴 1편, 명銘 2편, 제문 5편이 수록되어 있고,

권 4에는 만挽 69편, 제문, 행록, 행장 등이 실려 있다.

서문序文은 조선을 대표하는 마지막 유학자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이 썼고, 발문跋文은 고시홍高時鴻이 썼다. 이응

구의 행장行狀은 오광원吳光源이 썼다.



출전 북구 역사인물, 죽암유고, 광주읍지, 광산이씨선세유집, 광주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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