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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사牧使 신석유申錫遊<문과,무과>
    사재를 털어 복룡 마을을 재건에 힘쓴 목민관 “목사牧使 신석유申錫遊”
      신석유(1842~1886)는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성언聖言. 본관은 평산.신재수申在修의 아들로 한양 출신이다. 목사 시절에 복룡 마을과 인연이있었다.  음직으로 관직에 나아가 1860년(철종 11) 선공감繕工監 주부主簿를 시작으로 1864년(고종 1) 용궁현감, 1865년 덕산군수, 1867년 장흥부사,1871년(고종 8) 광주목사를 거쳐 신미양요가 발발하자 장단진長湍鎭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총융청후영장토포사摠戎廳後營將討捕使를지내고, 1875년(고종 12) 강화도 판관, 1876년 공주목 판관, 1878년(고종15) 진주목사, 1883년(고종 20)에 문과 병과 11위로 급제하였다. 1884년갑신정변 때 좌부승지, 1885년(고종 22) 사헌부 대사헌, 사간원 대사간을역임하고, 죽은 뒤 1910년 규장각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광주광역시 북구 신룡동 632-1에 1881년(고종 18)에 세워진 높이128cm, 폭 44cm, 두께 21cm의 목사 신석유 영세불망비가 있다. 비문의내용에 따르면 고종 8년(1871) 신미년 봄에 나무가 울창한 광주 복룡 마을에 마을 주민들이 영산강 솔 무대기 숲 주변에서 잡은 물고기를 마을로가져와 옹기솥에 끓이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 마을 주택 30호가 전소되어 마을이 폐허가 되어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자 광주 목사 신석유가 마을 재건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내놓는 등 마을 재건에 많은 도움을주었다. 이에 마을 독지가인 김용희金溶喜가 앞장서고 주민들이 협조하여1881년 목사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서 영세불망비를 세우게 되었다.  원래 이 비는 마을 입구 복룡동 산31-2번지 미구등(2009년도로편입)에 세웠으나 1970년대 광주시가 각종 비석을 광주공원으로 옮길 때 이 비도 그곳에 옮겼다. 2011년 10월 마을 만들기사업의 목적으로 추진된 <복룡마을 노거수 공원> 조성 때 광주공원에서 이곳으로 다시 옮겨 복원하였는데 비문의 원문은다음과 같다.- 앞면 -牧使申候錫游永世不忘碑一府陽春 한 고을 따뜻한 봄날에翳我伏龍 복룡 마을이 자신을 가리니,惠愛惟均 은혜와 사랑이 한결같아民蒙偏仁 백성들을 자애롭게 했네,里災于燬 마을이 불에 타버리자公去擇存 공이 사람들을 구해내고,百堵維新 집집마다 담장 새로 쌓았으니永世侯句 목사의 업적 영원하리.- 후면 -上之八年 辛未光之伏龍厄於鬱攸里 墟民散時 侯申公錫游 捐俸撫循使之 奠堵墟者新 散者集 侯之德 忽可忘 諸民不堪六矣 歲辛巳本里士人金溶喜 出專力圖 不朽足以驗侯惠之入人深 而非溶喜之出義伊誰爲哉里人咸曰可記也,辛巳 二月日출전 문과방목, 광주읍지, 광주의 문화유적, 북구 문화유적조사, 평산신씨 광주·전남사.-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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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찰방察訪 송택훈宋宅薰<문과,무과>
    찰방 송공 택훈 권학청덕 거사비’의 주인 “찰방察訪 송택훈宋宅薰”
      송택훈(1827~?)은 조선후기의 문신. 자는 지형之衡. 본관은 여산礪山.송식언宋植彦의 아들로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다.1855년(철종 6)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8위로 과거에 급제하고, 1857년(철종 8) 금상을 인견할 때 가주서假注書로 입시했다. 동년에는 광주의 경양역 찰방으로 부임하여 이곳에서 학문을 권장하고 청덕한 공적이 인정되어 1860년 경양역 비석거리에 주민들이 찰방송공택훈권학청덕거사비를 세웠었다. 그는 1863년(철종 14)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 1864년(고종1) 춘추관 기주관記注官, 1880년(고종 17) 교서관 판교判校,1881년(고종 18) 병조참의兵曺叅議를 지냈다. 경양역 권학청덕비가 1957년도로 확장공사로 인해 광주공원으로 옮겨갔는데, 북구 우산동주민자치위원회에서 2003년 12월 12일 아름다운 마을 만들기사업의 일환으로 본래 이곳에 있었던 찰방송공택훈권학청덕거사비, 찰방김공붕래구폐영세불망비를 다시 옮겨 소공원을 조성하고, 이 마을의 역사를 살리고자 이건移建 하였는데 현재의 위치는 광주광역시 북구 우산동 514-2번지이다. 비의 규모는 높이 153cm, 폭 52cm, 두께 24cm이다.이 비는 2022년 12월 9일 현지 확인 결과 비의 자리가 아파트 건립으로도로에 편입 철거되고 앞으로 경양역 공원조성 부지에 이건할 계획이라고한다.출전 광주읍지, 경양역 찰방선정비 조사보고, 광주의 문화유적, 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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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감縣監 송수겸宋守謙<문과,무과>
    다양한 관직을 성실하게 수행한 조선후기 문신 “현감縣監 송수겸宋守謙”
      송수겸(1774~1834)은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형지亨之. 본관은 홍주.해광 송제민의 후손으로 아버지 익좌益佐와 어머니 수원백씨의 아들로광주 북구 용두동 거상 마을 출신이다.1816년(순조 16) 식년시 병과 8위로 문과에 급제하니 그의 나이 43세때의 일이다.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821년(순조 21) 승정원 가주서假注書가 되었는데, 1822년(순조 22) 이희조李羲肇가 아뢰기를 “가주서假注書 송수겸宋守謙이 신병이 갑자기 중해져서 직임을 살피기 어려운 형편이니 지금 우선 개차함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1825년(순조 25) 부사과副司果에 제수되었다.1829년(순조 29)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고, 사간원 정언正言, 사헌부지평持平, 경상도 자인현감慈仁縣監 등을 역임하였다.출전 북구 역사인물, 문과방목, 광주읍지, 승정원일기, 홍주송시 대동보.-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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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서注書 송제宋磾<문과,무과>
    조선 후기의 천재 문신으로 요절한 “주서注書 송제宋磾”
      송제(1767~1796)는 조선 후기의 문신. 초명初名은 수은守殷. 자는 여옥汝玉. 본관은 홍주. 사헌부 감찰監察 익중益中의 둘째 아들로 광주 북구용두동 거상 마을에서 출생하였다.1796년(정조 20) 그의 나이 30세 때에 과거시험(별시)이 열렸는데 이때합격자는 모두 5명에 불과했다. 이 시험에서 송제는 아원亞元, 즉 전체 석차에서 두 번째 성적으로 급제했다. 이러한 사실은 국립중앙도서관과 규장각에 소장 중인 『국조방목國朝榜目』에 이러한 급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그런데 그는 급제 얼마 뒤에세상을 뜨고 만다. 그의 아들 동몽교관童蒙敎官 송희현宋希賢의 상언에, “저의 아버지 송제는 1796년(정조 20) 별시別試을과乙科에 2등으로 급제하였는데, 가주서假注書를 거치고 고향으로 내려와 성묘하고나서 그해 4월에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근무지에 임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의 아버지가 직명職名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단지 ‘문과급제文科及第’로 신주神主에 썼을 뿐입니다.삼가 바라옵건대 『대전통편大典通編』 「이전吏典」 추증조追贈條에 ‘새로 급제하여 분관되기 전에 죽은 자에게는 그에 상당한 관직을 증직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다행히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직명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바라건대 『대전통편』에 따라 증직하게 해 주소서.”하였다. 이에 승정원 주서注書 겸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으로 증직되었다.출전 문과방목, 북구 역사인물, 일성록, 승정원일기, 광주읍지, 북구 문화유적.-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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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촌陽村 송익중宋益中<문과,무과>
    5대 조인 해광 송제민의 ‘해광집’을 간행한 “양촌陽村 송익중宋益中”
      송익중(1729~1789)은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양촌陽村. 본관은 홍주.도명道明의 둘째 아들로 광주 북구 용두동 거상 마을 출신이다.1753년(영조 29) 그의 나이 25살 때 식년시 병과 16위로 문과에 급제했다. 그의 급제 사실과 신원 사항은 규장각에 소장 중인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과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 중인 『국조방목國朝榜目』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그는 1762년(영조 38) 양재良才 고산도高山道 찰방察訪 등을 역임하고,1778(정조 2) 병조정랑兵曹正郞, 1779년(정조 3) 기주관記注官으로 춘추관을 겸할 때 아마兒馬 1필을 하사 받고, 1782년(정조 6) 사헌부 감찰監察로 있을 때는 장궁粧弓 1틀을 하사 받았다. 전라도사全羅都事를 거쳐1785년(정조 9) 사헌부 장령과 성균관 사성司成 등을 역임했다.1783년(정조 7)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의병인 해광海狂 송제민(宋濟民1549~1602)의 시문집 『해광집海狂集』을 5대손인 그가 2권 2책으로 편집하여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발문은 이의철李宜哲이1776년에, 행장은 기정익奇挻翼이 1687년에 쓴 것이다. 상권에는 「소모호남의병문召募湖南義兵文」과 「만언소萬言疏」 등 해광이 직접 지은 문장이 수록되어 있고, 하권에는 송시열이 쓴 묘표 『송자대전宋子大全』의 「해광처사송공묘표海狂處士宋公墓表」나 박세채가 지은 『처사해광송공전處士海狂宋公傳』의 「해광선생증직사실海狂先生贈職事實」 등 해광과 관련된 자료를 모아 수록했다. 이 책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의 의병활동과 지식인들의 시대 인식 등을 파악하는 데좋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서문은 김종수金鍾秀가 1783년에 쓴 친필을 그대로 판각한것으로, 다른 본문에 해당하는 글들과 함께 새겨 판각하였다.출전 북구 역사인물, 승정원일기, 지산 향토지리지, 광주읍지, 해광집.-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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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자정軍資正 송만宋墁<문과,무과>
    여러 관직을 두루 섭렵한 조선 중기 문신 “군자정軍資正 송만宋墁”
      송만(1663~1721)은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화이華而. 본관은 홍주. 흡熻의 둘째 아들로 광주 북구 용두동 거상 마을 출신이다.1684년(숙종 10) 식년시 병과 26위로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1687년(숙종 13) 금보집사학록金寶執事學錄으로 책보개수에冊寶修改4)에 참여한 12인에 각각 상현궁上弦弓 일장一張을 하사下賜하였다.1697년(숙종 23) 예조정랑禮曹正郎, 1701년(숙종 27) 강진현감康津縣監, 1704년(숙종 30) 함경도 경성판관鏡城判官, 1713년(숙종 39)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1714년(숙종 40) 병조정랑兵曹正郎, 1918년(숙종 44)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1719년(숙종 45) 군자정軍資正(정3품 당하관) 등을역임한 것으로 확인이 된다.그는 숙종에 이어 임금이 된 경종景宗이 세자 시절에 돈독한 관계였던것으로 보이는데 『숙종실록』 숙종 44년 12월 26일 사헌부 장령으로 발탁되었는데 사신史臣이 논하기를 “송만은 늙어서 이미 정신이 매우 혼미하고, 지위와 명망 또한 가벼운데, 외람되게 사헌부에 선발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랍게 여겼다.”하였고, 1719년(숙종 45) 2월 5일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에 의견을 아뢰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사헌부의 직무職務는 지위가 깨끗하고 책임이 무거운데 장령 송만은 모두 한미寒微한 신분에서 기용되어 전혀 명칭名稱이 없으면서도 외람되게 사헌부에 선발되었으니 물정物情이 놀라고 있습니다. 청컨대, 개정改正 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다시 2월 7일에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에 아뢰었던 것을거듭 아뢰었는데, 세자가 다만 송만의 일만 따랐다.위의 기록에서 그 신임을 엿볼 수 있다.출전 문과방목, 광주읍지, 북구 역사인물, 조선왕조실록, 북구 문화유적.-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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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자正字 송정황宋庭篁<문과,무과>
    ‘주자 목록’의 저자이며 요절한 천재 “정자正字 송정황宋庭篁”
       송정황(1532~1557)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자는 천경天擎. 본관은홍주. 사헌부 감찰監察을 지낸 구駒의 둘째 아들로 광주 북구 운암동에서 태어났다.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0세가 되기 전에 이미 예술계에 이름을 뽐내었고, 하서河西 김인후金麟 厚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아 열네 살에 향시鄕試에 나가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 1519〜1581)과 함께 입장하였다. 초장初場에 높은 점수를 받고 종장終場에는 나가지 않아 송천이 장원을 했다. 이때 송천이 그의 사람됨을 보고 후에 그의 아들 해광海狂 송제민宋濟民을 장손녀의 사위로 삼았다.1545년(명종 즉위년)에 향시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1555년에 사마시에서 일등으로 합격하였다. 1556년(명종 11) 별시 병과 3위로 문과에 급제하여 유가遊街3)하는 날길에서 당시의 정승이었던 윤원형尹元衡이 그를 만나고자 청하였으나 그는 “청백淸白한 집의 자제로 어찌 권세를 가진 간신에게 허리를 굽혀 스스로 부끄러움을 받을 수 있겠는가.”하고 말하고 말머리를 돌려 다른 길로 가버린 것이 윤원형의 원한을 사게 되어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로 뽑히었는데도 윤원형에 의해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로 바뀌게 되었다. 그는교서에 취임하지 않고 귀향하여 부모를 봉양하는데 정성을 다했다. 미암眉岩 유희춘柳希春을 종매從妹의 사위로 삼아 그와 도의道義를 강론하였다. 그는 평생을 예로써 살면서 “한치만큼의 차례를 잃어도 예가 아니며, 한가지의 물건을 갖추지 않아도 예가 아니다.”라고 천명하였다. 그가26세로 1557년 금산錦山에서 요절하자, 스승인 하서 김인후가 제문祭文을 지어 “학문에 독실함은 자하子夏와 같고 뜻에 따르는 것은 증자曾子와같고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것은 안자顔子와 같으나 수壽가 안자보다6세나 짧으니 이것이 천명天命인가.” 하여 애석해 했고, 만사輓詞를 지어그의 총명하고 효우孝友함을 칭찬했다. 그의 학문적 깊이는 기대승奇大升이 주자문록朱子文錄을 지어 그 발문跋文을 하서에게 청했을 때 하서는 그에게 짓도록 사양했다는 점에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승문원에 발탁되었으나 윤원형의 미움을 받아교서관정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문란한 정치 상황에서 윤의倫義의 임무를 올바로 수행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그 자리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이후 그는 벼슬의 길을 끊고 오직 학문에만 정진할 목적으로 1557년(명종 12)에는 기대승 밑에서 수학하였다.1557년에 기대승의 뜻을 받들어 주서朱書 가운데 긴요한 곳만을 초출抄出 하며『주자문록朱子文祿』을 편저하고 이 책의 발문跋文도 직접 썼다고 한다.그는 26세로 요절하였으나 그가 남긴 시詩나 부賦 등을 보면 웅장하고유려한 문장 속에서 깊은 학식과 고매한 인격을 엿볼 수 있다. 김인후는그의 학문과 인품을 이윤(伊尹, 은나라 명재상)과 안자로 비교하였으며,송시열宋時烈은 김인후의 칭찬이 정말로 맞는 말임을 거듭강조한 것으로 보아 충분히 송정황의 학식과 인품을 짐작할수 있겠다. 저서로 『정자송공유고正字宋公遺稿』 3권 1책이 있다. 3) 유가遊街 : 예전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광대를 데리고 사흘 동안 풍악을 울리면서 거리를 돌며 시험관, 선배, 친척 등을 찾아보는 일을 이르던 말.출전 정자송공유고,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북구 문화유적.-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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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애伏崖 범세동范世東<문과,무과>
    ‘북부여기’의 저자로 민족 고유사상의 계승 발전에 기여한 “복애伏崖 범세동范世東”
      범세동(1342~1397)은 고려말의 문신·학자. 자는 여명汝明. 호는 복애伏崖. 시호는 문충공文忠公. 본관은 금성이다. 통찬通贊 후춘後春의 아들로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였다가 고향인 나주 시랑곡(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복만동)에 은거하였다.포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문인으로 1369년(공민왕 18) 문과에급제하여 덕녕부윤德寧府尹1)을 거쳐 문하부 낭사의 간쟁책임자인 간의대부諫議大夫2)를 역임하였다.이성계(李成桂 1335~1408) 일파의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고려가 쇠망의길을 걷게 되면서 고려의 충신들은 하나씩 제거되었다. 고려 귀족의 대표로 고려 왕실을 지키기 위해 일생을 바친 목은 이색이 제거 되었고, 선생의 스승인 포은 정몽주가 타살되었으며, 야은 길재가 초야에 묻혀버렸다.이에 신규, 조의생, 임선미, 이경, 맹호성, 고천상, 서중보 등 72인과 같이두문동에 몸을 숨어 은둔하였다.1392년 정도전, 남은, 조준 등 신진 사림들이 태조를 받들어 새 왕조를세우고, 공양왕을 몰아내자 고려는 멸망하였다. 1) 덕녕부윤 : 조선전기 강원도 소속 부(府) 단위 행정구역, 태조의 외향(外鄕)으로 부(府)로 승격됨. 1413년 양양도호부로 개칭, 윤은 지방관청인 부의 우두머리.2) 간의대부 : 고려 시대, 문하부(門下府)에 딸린 정사품(正四品)의 벼슬. 이에 범세동은 세상을 등지고 조선 왕조의 개창을 반대하며 고향인 나주 시랑골侍郞谷(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복만동)에 은거하였다. 조선 태종이 여러 차례 벼슬을 권했으나 끝내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범세동은 그는 설총, 최충, 김양감,안향, 이색으로 전해지는 고려 인물들의 학문 계통과 그 행적을 기술한『화동인물총기』를 저술했고, 『북부여기』를 통해 고조선에서 고구려로이어지는 민족사 국통을 밝히고 천부경을 쉽게 풀이해 고유 사상의 계승발전에 기여했다. 아울러 『화해사전華海師全』, 『동방연원록東方淵源錄』 등의 책을펴내며 동방 성리학의 근원을 밝히는데 힘을 쏟았다. 범세동의 불굴의 정신과 바른 저술은 사육신과 백성들의 숭앙의 대상이었으며 선비정신의 본보기가 되었다. 사후에는 후덕군厚德君에 봉해지고 문충의 시호를 받았으며, 개성의 표절사表節祠,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 광주의 복룡사伏龍祠에 제향되었다. 고려 공민왕조에서 벼슬이 덕령부윤 간의대부 후덕군에 이르렀고 고려의 국운이 다할 때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전조에 충절을 다했다.조선 순조 때에 포양되어 복룡사를 세우고 향화를 올리다가 1868년(고종5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됨에 따라 그 후손들이 복룡사伏龍祠 터에 용호재龍湖齋를 창건하고 복애 범세동의 사적을 기록한 유허비를 세우게 되었다. 용호재는 금성범씨 재실로써 고려 말엽 정충탁절貞忠卓節로 이름이 높던 복애 범세동을 주벽으로 하여 덕행이 높은 범가용, 학행이 높은 범천배와 임진왜란 중 진주대첩에서 순국한 죽천 범기생, 성와省窩 범기봉 등다섯 사람을 배향하던 복룡사가 훼철된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범세동의 묘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 산94-1에 조성되어 있으며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었다. 묘역 안에는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묘비와 문인석이 있다. 1.65m 높이의 묘비는 대리석으로 만들어 화강암의 사각형 대좌에 맞추어 세웠다. 상당한 거리를 두고 마주 보고 서있는 문인석은 높이 210㎝로 각이 진 관모를 쓰고 눈·코·입이 뚜렷한 얼굴에 두 손을 가슴에 모아 홀을 들고 있는데조선시대 사대부 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출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려사 절요, 광주읍지, 북구 역사인물, 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 복룡사유허비, 화해사전(華海師全), 동방연원록(東方淵源錄).-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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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계松溪 노극창盧克昌<문과,무과>
    성리학에 투철한 조선 중기의 문신 “송계松溪 노극창盧克昌”
      노극창(1482~1551)은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영경榮卿. 호는 송계松溪.본관은 광주. 노준공의 8대 후손이며 부친은 의흥위호군義興衛護軍 노상지盧尙枝 모친은 숙부인 보성김씨의 아들로 광주 북구 우치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품행이 뛰어나고 기개와 절도가 있어 부모상에 3년의 시묘살이를 하였고, 20세 때 경전과 사기를 널리 통달하고 성리학에 투철하여,1514년(중종 9) 문과 별시別試 병과丙科 14위로 급제하였다. 1516년(중종11)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 1518(중종 13) 서장관書狀官, 1530년(중종25) 김제군수金堤郡守, 1533년(중종 28) 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에 이르고 외직으로 남원부사南原府使, 담양부사潭陽府使를 거쳐 광주목사光州牧使, 1550년(명종 5) 평산부사平山府使에 이르렀다. 학행이 뛰어나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 하서河西 김인후(金麟 厚 1510~1560),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 1459~1547), 송재松齋 나세찬(羅世纘 1498~1551),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 제현諸賢과 도의道義로 교제交際를 하였다.광주에 살다가 말년에 함평군 나산면 송암리에 이거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가 남원부사로 재임중에 함평 송암리에 가는 길에 광주 극락강에서 백면서생白面書生 안충달安忠達을 만나 글재주를 시험해보니 장차큰 인물이 될 것으로 여겨져 사위를 삼았다. 그로 인해 안씨는 본래 광주에 살았는데 처가에 정착하여 지금까지 이 마을은 죽산안씨의 세거지가되었다. 1551년(명종 6) 평산부에서 병으로 인하여 별세하니 향년 69세였다.1884년에 창건한 송계사松溪祠(나산면 송암리 소재)에 배향되었다.-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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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군光州君 노만盧蔓<문과,무과>
    광산 노씨 광주파의 시조 “광주군光州君 노만盧蔓”
        노만(996~1064)은 고려 시대의 문신. 광주군에 봉해지고. 본관은 광주.광산백光山伯 노해盧垓의 후손으로 광주 북구 일곡동 출신이다.고려에서 문과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문하시랑평장사 벼슬을역임하면서 바른 정사를 펴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많은 공을 세웠다. 이때문에 공신으로 광주군光州君에 봉해졌다. 따라서 그를 광주 또는 광산노씨 광주파의 시조로 1세 조로 세계하고 있다.특히 그의 후손들은 고려조에서 조선조에 이르는 동안 현달하여 높은벼슬과 학문,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학문이 높고 효성이 지극하여 효자로서 이름을 떨친 노준공이 그의 13세손이다. 이들 후손들이 일곡동 일곡마을에 세거하고 있다.묘소는 광주시 북구 오치동 삼각산 하 능안동陵案洞 임간용任坎龍 곤신파坤申破 간좌원艮坐原에 쌍분으로 되어 사패賜牌한 묘지가 세대가멀고 난리를 경화함에 사방의 산록山麓을 전체보수全體補修하지 못하였고 비갈碑碣과 석물石物까지도 병난兵亂에 유실遺失되었다.광주노씨光州盧氏는 고려 말기, 전 노씨를 대표할 만큼 번창하였고 그이름이 세상에 떨치어 당대의 조정에 공헌貢獻한 바 크다.조선말에 개수改竪하여 상석床石과 표갈表碣과 석인문관석石人文官石 망주望柱가 있으며 묘소 아래 영모제永慕齋제가 있는데 송사松沙기우만奇宇萬이 기문記文을 지었고, 간제艮薺 전우田愚가 액자額字를썼다. 1926년 오치동에 광주노씨 삼능단三陵壇을 조성하여 전국 9개 종파의던바壇碑를 한 곳에 세우고, 겸하여 각 종파의 문헌을 종합하여 노씨대동종안盧氏大同宗案을 정리해 노씨의 역사를 정립함으로 후일 자손들에귀감이 되도록 하였다.신도비神道碑는 1960년에 광주시 북구 오치동 109-2(광주노씨삼능단입구) 갑모원甲卯原에 세웠는데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이 비문을 지었고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이 전자를 쓰고 경제敬齊 기종섭奇琮涉이 원문原文을 썼다. 그런데 2003년 비를 새로 만들고 비각을 세우면서 노재구盧在九가 짓고 기호중奇浩仲이 쓰고 광주노씨 광주군파 종회가 다시 건립했다.-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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