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정자正字 송정황宋庭篁<문과,무과>
‘주자 목록’의 저자이며 요절한 천재 “정자正字 송정황宋庭篁”

 


  송정황(1532~1557)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자는 천경天擎. 본관은

홍주. 사헌부 감찰監察을 지낸 구駒의 둘째 아들로 광주 북구 운암동에

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0세가 되기 전에 이미 예술계에 이름을 뽐내었

고, 하서河西 김인후金麟 厚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아 열네 살에 향

시鄕試에 나가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 1519〜1581)과 함께 입장하였

다. 초장初場에 높은 점수를 받고 종장終場에는 나가지 않아 송천이 장원

을 했다. 이때 송천이 그의 사람됨을 보고 후에 그의 아들 해광海狂 송제

민宋濟民을 장손녀의 사위로 삼았다.

1545년(명종 즉위년)에 향시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1555년에 사마시에

서 일등으로 합격하였다.

 1556년(명종 11) 별시 병과 3위로 문과에 급제하여 유가遊街3)하는 날

길에서 당시의 정승이었던 윤원형尹元衡이 그를 만나고자 청하였으나 그

는 “청백淸白한 집의 자제로 어찌 권세를 가진 간신에게 허리를 굽혀 스

스로 부끄러움을 받을 수 있겠는가.”하고 말하고 말머리를 돌려 다른 길

로 가버린 것이 윤원형의 원한을 사게 되어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로 뽑

히었는데도 윤원형에 의해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로 바뀌게 되었다. 그는

교서에 취임하지 않고 귀향하여 부모를 봉양하는데 정성을 다했다. 미암

眉岩 유희춘柳希春을 종매從妹의 사위로 삼아 그와 도의道義를 강론하

였다. 그는 평생을 예로써 살면서 “한치만큼의 차례를 잃어도 예가 아니

며, 한가지의 물건을 갖추지 않아도 예가 아니다.”라고 천명하였다. 그가

26세로 1557년 금산錦山에서 요절하자, 스승인 하서 김인후가 제문祭文

을 지어 “학문에 독실함은 자하子夏와 같고 뜻에 따르는 것은 증자曾子와

같고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것은 안자顔子와 같으나 수壽가 안자보다

6세나 짧으니 이것이 천명天命인가.” 하여 애석해 했고, 만사輓詞를 지어

그의 총명하고 효우孝友함을 칭찬했다.

 그의 학문적 깊이는 기대승奇大升이 주자문록朱子文錄을 지어 그 발

문跋文을 하서에게 청했을 때 하서는 그에게 짓도록 사양했다는 점에서

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승문원에 발탁되었으나 윤원형의 미움을 받아

교서관정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문란한 정치 상황에서 윤의倫義

의 임무를 올바로 수행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그 자리에 나아가지 아니하

였다.

 이후 그는 벼슬의 길을 끊고 오직 학문에만 정진할 목적으로 1557년(명

종 12)에는 기대승 밑에서 수학하였다.

1557년에 기대승의 뜻을 받들어 주서朱書 가운데 긴요한 곳만을 초출

抄出 하며『주자문록朱子文祿』을 편저하고 이 책의 발문跋文도 직접 썼

다고 한다.

그는 26세로 요절하였으나 그가 남긴 시詩나 부賦 등을 보면 웅장하고

유려한 문장 속에서 깊은 학식과 고매한 인격을 엿볼 수 있다. 김인후는

그의 학문과 인품을 이윤(伊尹, 은나라 명재상)과 안자로 비교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은 김인후의 칭찬이 정말로 맞는 말임을 거듭

강조한 것으로 보아 충분히 송정황의 학식과 인품을 짐작할

수 있겠다. 저서로 『정자송공유고正字宋公遺稿』 3권 1책이 있다.


 3) 유가遊街 : 예전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광대를 데리고 사흘 동안 풍악을 울리면서 거리

를 돌며 시험관, 선배, 친척 등을 찾아보는 일을 이르던 말.

출전 정자송공유고,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북구 문화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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