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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포현령 노중륜盧仲崙<생진,음사>
    ‘광산 노씨 분묘출토 명기류’의 주인 “남포현령 노중륜盧仲崙”
       노중륜(?~?)은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 절효공 준공의 현손으로직산군수 노규盧珪와 남양홍씨의 아들로 광주 북구 생용동 모산 마을에처음으로 들어와 살았다.  세조 연간에 남포현령南浦縣令을 역임했다고 전한다. 사후에 증병조참판의 증직을 받은 그는 생용동 모산 마을에 살았던 것으로 그의 묘가 우치공원이 들어선 생용동 내동 마을 뒷산 기슭에 있었다.1990년대 일곡택지 조성 직전에 발간된 조사보고서에는 1890년대부터1900년대에 걸쳐 그의 후손들이 내동 마을 뒷산에 있는 자신들의 조상인노중륜과 노한경盧漢經, 노옥손盧玉孫 3대의 무덤 근처에 1772년부터 누군가 무단으로 묘를 만들었고, 이 묘가 이전되도록 조치해 줄 것을 여러차례 광주관아에 탄원한 문서들이 수록되어 있다(향토문화개발협의회,1993, <일곡동> 참조).  공교롭게도 훗날 그의 3대의 묘는 광주의 역사와 문화에 특별한 기여를했다. 1987년 생용동 내동 마을 일대에 지금의 우치공원을 조성하면서그 3기의 묘를 이장할 필요가 있었고 이 과정에서 다수의 부장품이 발견됐다.  그의 묘에서는 청동으로 만든 숟가락과 젓가락이 완벽한 상태로 나왔고, 그의 아들인 한성판윤을 지낸 노한경의 묘에서는 청동거울과 구슬 등이, 손자인 노옥손의 묘에서는 사람과 말의 형상으로 빚은 인형 등이 출토됐다. 이들 3대에 걸친 묘에서 나온 부장품은 ‘광산노씨 분묘 출토 명기류’라는 이름으로 광주광역시 문화재로 지정되어 현재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 소장·전시되고 있다.  백자명기는 16점의 크고 작은 여러 모양이 같이 출토되었다. 도우陶偶는 남녀각각 3점으로 남자는 상투를 틀어 올린 형태이고, 여자는 어여머리를 하고 있는데, 표정만 다를 뿐 크기는 거의 비슷하다. 마형기馬形器는말안장을 얹은 모습으로 2점이 출토되었다. 특히 이 도우와 마형기는 철사鐵砂 안료를 바른 철화鐵畵 백자이다. 술띠는 2개로 분리되어 있으며, 7개의 유리구슬은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 있다. 이외에도 국화무늬를 새긴동경과 가위, 청동 수저 1벌이 함께 발견되었다.  조선 전기의 유물로 추정되는 이들 명기류는 조선 시대 전기 부장품 연구와 백자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마형기는 다른 지역에서 출토된 예가 없는 매우 귀한 자료이다.출전 일곡동 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 광주노씨세고, 광주민속박물관 도록.-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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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생진,음사>
    식영정을 세운 성산의 사선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
      김성원(1525~1597)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자는 강숙剛叔. 호는 서하당棲霞堂 또는 인재忍齋. 광주의 충효리(옛. 석저촌)에서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낸 아버지 김홍익金弘翼과 어머니 해주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1531년 7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환벽당의 사촌 김윤제에게서 송강 정철과 함께 학문을 배우고, 1545년 임억령林億齡의 딸과 결혼하였다. 장인인 임억령과 하서 김인후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1551년(명종 6)에 향시에 장원을 하였고, 1558년(명종 14)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대과에는 응시하지 않고 오직 학문과 덕행에만 힘썼다. 1560년(명종 15) 창계滄溪 건너편의 성산星山에 서하당과 식영정息影亭을 지어 식영정은 장인이면서 스승인 석천石川에게 휴식처로 삼도록 기증하고,이를 배경으로 더욱 자연과 서사書史에 몰입하였으며, 여러 문인과도 활발히 교유하였다. 한편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등과 도의의사귐을 두터이 하였는데, 특히 임억령, 고경명, 정철과는 성산星山의 사선四仙으로 만났다고 한다. 따라서 이때부터 서하당과 식영정을 배경으로 한 여러 문인이 출입하여 시단을 형성하며 시문학 활동이 이어지게 되어 가사 문학 작품인 성산별곡의 무대가 되고,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이 지어지게 되었다.  1580년(선조 14) 효행으로 침랑寢郞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제원도 찰방察訪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복가관同福假官으로 동복현감을 역임하면서 군량을 조달하며 의병을 모으는데 큰 공을세우고 현민들을 보호하였다. 1596년 조카 김덕령이 무고로 20여 일 동안6번의 모진 고문으로 옥사하자 동복현감에서 물러나 세상과 인연을 끊고살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 72세인 그는 아흔의 노모를 모시고 동복의 모후산母后山, 919m 성모산성에서 피신하던 중 왜병을 만나 부인과 함께 온몸으로 막아 싸우다가 노모와 같이 순절한 모후산을 모호산母護山으로 고쳐 부르며 그의 죽음을 기려 이곳에 서하당김선생모호산순효비棲霞堂金先生母護山殉孝碑를 세웠다. 뒤에 후손들이 화순군 남면 복교리 광산김씨 선산 겸 영롱대 부근으로 옮겼는데 주암댐이 만들어지면서 수몰되게 되자, 1979년 호남 유림의 주도로 광주 북구 금곡동900(배재길 68)에 다시 비를 세웠다. 비문은 담양의 전원식이 짓고 글씨는 그의 11세손 김희진이 썼다.모후산은 순천과 화순의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나복산이라고 불렀다. 정유재란때 김성원의 순효를 기려 모후산을 모호산으로 바꿔 불렀다고도 한다.  성리학과 주역 등의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시로서는 「식영정잡영息影亭雜詠」, 「척서도滌署圖」 등이 있고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의 저서를 남겼다.출전 서하당유고, 광주읍지, 광산김씨 충장공파보, 북구 역사인물, 북구 문화유적,호남 정자기행.-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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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랑滄浪 고경리高敬履<생진,음사>
    창랑실적의 의인 “창랑滄浪 고경리高敬履”
      고경리(1559~1609)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 자는 이척而惕. 호는 창랑滄浪. 본관은 장흥長興. 진사 고계영高季英의 아들로 광주 북구 장등동 출신이다.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1591년(선조 24) 사마시에 합격하였다.그는 광해군 즉위 후 집권한 대북 세력이 서인 학통을 공격하며 기축옥사己丑獄事(정여립모반사건) 때 배후 인물로 알려져 투옥된 영의정 최영경崔永慶의 죽음이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곤경에 빠져 있던 송강 정철鄭澈과 우계 성혼成渾이 사주해 죽였다고 성상을 속여 관작을 추삭追削 하였는데, 이는 사실이 아님을 주장하는 상소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 상소에서 선현으로 이름 높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제외하였다는 이유로 대북 세력에 의하여 상소는 불태워지고, 사림의 구호救護에도 불구하고 종신금고에 처했으며 관직에 진출할수 없었다. 사후에는 성균 생원 조봉대부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다.  1709년(숙종 35)에는 광주에 건립된 운암사雲巖祠에 추배追配 되었다.현재는 장흥고씨 창랑 문중에서 관리하는 용호재龍虎齋에서 매년 10월제향하고 있다.  저서로 『창랑실적滄浪實蹟』이 있다. 그 내용은 목활자본 3권 1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1은 그의 유고만을 모아 놓은 것으로 부 1편, 시 1수,소 2편, 서 2편, 잡저 2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2는 부록으로서 만시13수, 제문 4수, 행장, 유사, 묘표, 묘지명, 운암사 봉안문, 춘추향 축문, 창랑정 제영 3수, 소사전말, 증직사전말, 익묘대리시상언, 증직교지, 감회설등이 있고, 권3도 부록으로서 세계와 연보 등이 있다. 권1의 창랑정입춘부滄浪亭立春賦는 44세 입춘 때 지은 것으로 ‘자신의 생을 한 번 돌아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겠노라’는 다짐을 한 내용이고, 시문 1수인 「만종질군수輓從姪郡守」는 종질인 고성후高成厚가 죽자 그를 애도하여 지은작품이다.  「신구우계송강양선생소伸救牛溪松江兩先生疏」는 정여립 모반사건때 배후 인물로 알려져 투옥된 최영경崔永慶의 죽음이 정철과 성혼 때문이 아님을 주장한 글이고, 계자서戒子書는 아들을 훈계하는 글이다.「답신상사응순서答辛上舍應純書」는 그의 나이 50세(1608)에 쓴 것으로 당시의 교유 인물인 성재省齋 신응순辛應純의 편지글에 답장한 것이고, 잡저 중의 「양심구방심의養心求放心疑」는 ‘양심養心’과 ‘구방심求放心’ 가운데에서 ‘구방심’을 더 중요하게생각함을 보여주며, 또한 ‘경敬’을 강조한다.『창랑실적』은 16세기 말 정치사의 구도 속에서 호남의 한 유생이 어떠한 행동을 보여주었는가를 알 수 있는 자료로써, 특히 기축옥사를 연구하는데 활용될 수 있겠다.출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광해군일기, 대동야승, 매산집, 북구 역사인물,북구 문화유적, 광주읍지.-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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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은醉隱 정덕필鄭德弼<문과,무과>
    영조께서 ‘참된 선비’라고 칭찬하신 “취은醉隱 정덕필鄭德弼”
        정덕필(1725~1800)은 조선 말기의 문신 학자. 자는 사량士良. 호는 취은醉隱. 초명은 몽필夢弼. 본관은 하동河東. 정대중鄭岱重의 아들로 광주 북구 오치동 출신이다.송시열의 제자로 경학과 성리학을 공부해 학문의 경지에 이르렀다.1756년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한 뒤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759(영조 35)년 3월에 성균관에 있을 때 왕이 성균관에 명하여 경의를강론하는데 적합한 5~6인을 뽑아 대학서문을 강講하라고 하여 이 중에뽑혔는데, 영조가 뽑혀 온 유생儒生들에게 “세상의 도가 어지럽혀지고 선비의 풍토가 권세를 다투는 일에만 있는 폐단弊端을 없애는 방법을 묻자,그는 도道가 어지럽고 사습士習이 바르지 못함은 윗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으므로 위에서 성심으로 바르게 인도하면 모든 폐단을 없앨수 있다.”고 진언進言하였으며 이후에도 종종 경연에서 임금과 묻고 대답할 기회가 있어 풍부한 학식과 바른 성품을 바탕으로 명쾌한 답을 올려 영조英祖가 여러 차례 칭찬하며 그대의 인품이 자상하고 머리가 명석한데다문학에 재능이 있으니, 내가 참으로 참된 선비를 얻었노라고 기뻐하였다.   1762년(영조 38)에 문과 병과丙科 제1인으로 급제한 뒤,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에 제수되어 사현각思賢閣에 입시入待하였을 때 붓과 벼루鍮硯를 하사下賜 받았다.  1764년(영조 40)오수도찰방鰲樹道察訪에 임명되어 “서민들을 잘 어루만져 은혜가 깊고 관대한 아량으로 선정을 베푸니 흉년을 겪으면서 곤궁한 처지의 백성들이 모두가 추대하고 편안하게 여기네!”라는 역인들이 목비를 세움으로 봉렬대부奉列大夫 품계에 승진하고, 창락찰방昌樂察訪에임명되었다.   1767년(영조43)품계가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오르고, 1768년 정월, 역인驛人들이 애민선저비를 세웠다. 1769년(영조 45) 성균관전적, 다음 해에성균관직강, 사헌부감찰에 임명되었다.  1771년(영조 47) 예조정랑이 되어, 이름을 몽필夢弼에서 덕필德弼로 개명하여 이조에 올리고, 허세를 부리기 좋아하는 권위주의적인 상관上官(副使)이 동지사를 맞이하는 일이 지체되었다 하여 이방吏方과 병방兵方에게 곤장을 침으로, 이에 반발하여 파직罷職의 장계狀啓를 올리고 항명抗命하다 삼척부三陟府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1772년(영조 48) 4월 방면放免되어 돌아왔다. 1773년(영조 49)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 연이어 감시監試에 합격하였다. 그는 1774년(영조 50)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고, 아버지가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가자加資되어, 어머니도 함께 숙부인淑夫人에 가자되었다.  1775년(영조 51)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거쳐 이조좌랑吏曹佐郎이 되었다. 1776년(영조 52) 영조英祖의 승하로 고향으로 돌아왔다.1781년(정조 5)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재임명이 되고, 1782년(정조 6) 아버지는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 그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부임하여 사은謝恩한 후에 상소문을 올리고 회답을 기다리는데, 봉납승지捧納承旨가 삭직削職되고 모든 승지도 파직罷職하라는 하명下命이 내려졌다. 그 상소문의 내용은 임금의 덕행德行에 대하여 경계警戒해야 할 점을 권하고 격려한 내용인데, 너무 직설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권문세가權門勢家들의 사치와 비리를 고발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에 그 상소는 경향 각지의 선비들로부터 뜻이 분명하고 사리에 밝은 상소라 하여 칭찬이 자자하였다. 이 일로 6월 명천부明川府로귀양 보내라는 명이 내려지고, 12월 사면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 집에서농사를 지었다.  1793년(정조 17)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어 상경을 명하는 왕명을 받들어 좋은 말을 보내와 한양으로 출발 사은하였는데 바로 경기도사京幾道事에 임명되었다. 1794년(정조 18) 나이 70세로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되고, 1795년(정조 19)1월 합오경진하合五慶陳賀(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관원들이 조정에 모여 임금에게 축하를 올리던 일)에나아가 참석하였다.  1795년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에 임명되어 경모궁景慕宮 행행소幸行所에서 사은하고 사임辭任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저서로는 『취은일고醉隱逸稿』가 있다. 2007년 6월 30일 국역 발행,현재 어필각御筆閣은 북구 오치동 930-5(오문로58번길 16)에 자리 잡고있으며 하동정씨 정승공후 약포공파종회에서 2003년에 건립하였는데 약포기념공원 내에 있다.  어필각은 영조 대왕이 정덕필에서 내린 친필 등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한 곳으로 화강암 주춧돌과 기단 위에 원주 기둥을 세워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정통한시가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어필각 내에는 유품遺品으로 어필과 교지敎旨 32장, 하유下諭 6장, 어사화御史花와 과거시험의 답안지, 하사받은 놋쇠로 만든 벼루인 유연과연적硯滴, 붓, 인장과 호적대장 등이 전시되어 있다.경내에는 하동정씨 양지 문중 삼효녀정려세적비와 약포하동정오도선생지헌영초생정기적비가 세워져 있다.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북구 문화유적, 취은일고, 조선왕조실록.-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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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강錦岡 정귀세鄭貴世<문과,무과>
    고경명 의병 막하에서 전사 ‘칠백의총’에 묻힌 열사 “금강錦岡 정귀세鄭貴世”
       정귀세(?~1592)는 조선 중기의 무관. 자는 여화汝華. 호는 금강錦岡. 본관은 진주. 필례必禮의 아들로 광주 북구 출신이다.그는 효성이 지극하고 용감하여 1590년(선조 23)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를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담양에서 거의한 고경명高敬命 의병 막하에 광주의 전 봉사 정귀세와 함평의 전 주부 박응주主簿朴應柱, 영광의 선비 이인우李仁佑, 옥주의 선비 전용관田用灌, 정읍의 선비 김봉학金奉鶴, 조식趙軾이 가동家僮을 거느리거나 혹은 향병鄕兵을 거느리고 휘하로 들어갔다. 그해 6월 고경명이 충청도 의병장 조헌趙憲과 승장 영규靈奎 등과 합세하여 8월 금산성에 주둔한 왜군을 공격할 때 참전하였다. 적군에게 포위된 가운데 온 힘을 다해 싸웠으나 병력 수의 열세로 의병 700여 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때 전사한 700의사의 무덤을 칠백의총七百義塚이라 하여 금산에 있다. 1605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고, 금산 종용사從容祠에배향되었다.  권율장군이 공신에 책록된 5주갑(300년)이 되는 1902년에 고을의 인사들이 창의비를 세울 것을 모의하고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 선생에게 비문을 받아 권율의 11대손인 권교현權敎鉉의 글씨인 이 비는 1902년에 세운 기념비로 광주향교 옆 비석공원(구동 21-1)에 있다. 도원충장수권공창의비都元帥忠壯權公倡義碑에는 임진왜란에 권율이 광주목사에 제수되어 약법約法 10조를 발포하고 적의 침입에 대비하니 적이 침입하지 못하였다. 이어 이치전투梨峙戰鬪에서 적을 크게 물리친 공으로 전라도관찰사로 승진하여 행주대첩을 이루어 사직을 보전했다고 하였다.당시 이 지역 출신의 의병장들(名單 26人)이 기록되어 있어, 이들이 권율 장군을 도와 여러 차례 대첩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북구 문화유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호남절의록.-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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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절공文節公 정수충鄭守忠<문과,무과>
    세조의 즉위를 도와 좌익공신 3등에 책록된 “문절공文節公 정수충鄭守忠”
      정수충(1401~1469)은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경부敬夫. 시호는 문절文節. 본관은 하동河東. 아버지 감찰 정제鄭提와 어머니 광주김씨光州金氏의 아들로 개성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고 재행才行이 있었다. 1445년(세종27)45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환관을 가르치는 선생에 선발되어 공직에 들어섰다. 후에는 세종의 명으로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선발되어 영응대군永膺大君 염(琰 : 세종의 아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승의부위사정丞義副尉司正, 경창부승慶昌府丞 등을 거쳐 1449년 수부사직으로 경창부승을 겸하였다. 1450년(세종 32)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이듬해 승문원 부교리가 되어 수양대군을 따라 집현전에 나아가서 『역대병요歷代兵要』를 찬하였고, 그 뒤 훈련원주부, 서학교수西學敎授, 성균관사예 등을 거쳤다.  1453년(단종 1)에 행사용行司勇으로서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가담하여6품직에서 4품직으로 승진되었고, 1455년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성균관사성이 되고, 1457년(세조 2) 집현전 직제학으로 승진, 하원군河原君에 봉하여졌다. 이해 의경세자懿敬世子가 죽자 세조의 명으로주상자主喪者가 되었다. 이어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거쳐 1463년대사성大司成이 되고, 이후 1469년(예종 1) 7월 중추부사中樞府事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러 벼슬을 사양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같은 해 9월에 지병으로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청렴 검소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시호를 문절文節이라 했다. 대구의 청백서원淸白書院, 광주 화담사花潭祠, 청주 청절사淸節祠에 제향祭享 되었다.문절공 정수충의 후손으로 석포石圃 정병현鄭丙鉉이 광주 북구 양산동 75-7번지에 건립한 삼호정이 있으며, 이 정자는 그 아들 만석晩石 정해붕鄭海鵬이 1917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이 정자의 형태를 보면 도리 석초, 도리 기둥에 정면 6칸, 측면 4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다른 정자와 달리 좌변 1간의 대청에 한 칸의 마루가전면에 증축되어 모양이 흡사 ㄱ자형으로 되어있다.두 칸의 마루에는 <삼호정>이라는 대서 현판이 전후 양면에 걸려 있고일곱 개의 주련 판각이 각 기둥에 부착되어 있다. 이 정자의 구조 및 이름으로 보아 유락을 위한 정자와 학문을 위한 서재의 기능을 함께 겸비한건물로 보인다.출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국조인물고, 광주의 문화유적, 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화담사지.-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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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사一査 이함일李涵一<문과,무과>
    임진왜란 일본 포로 귀환에 공을 세운 “일사一査 이함일李涵一”
        이함일(1563~1621)은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양오養吾. 일오一吾. 호는일사一査. 본관은 함평. 세종 때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지낸 긍兢의 후예로 아버지 방필邦弼과 어머니 광산김씨의 아들로 광주 북구 오치동 출신이다.  그는 재주와 역량이 뛰어났고 가정에서 학문을 익혀 문장을 잘하였으며, 양친에게 효도하고 세 동생과 우애하니 향리인들이 모두 기뻐하고 따랐다.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생館生으로서 성균관을 지키고 떠나지 않았다.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집에돌아갔으나 부모들이 이미 피해를 보아 돌아가신 것을 알자 통곡하고 슬퍼하면서 삼년상을 극진히 치렀다.  1603년(선조 36) 식년시 병과 1위로 문과에 급제하여 1606년 성균관 학정學正 겸 중학훈도中學訓導를 지냈으며, 이듬해 종부시 주부主簿를 거쳐 사헌부 감찰監察 지평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 외직으로 나가 보령 현감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1614년 영해부사를 거쳐 이듬해 춘추관 편수관編修官으로서 사명을띠고 일본에 건너가 포로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오는 데 공을세웠다.   1616년 성균관사성이 되었는데, 1618년 인목대비가 유폐되고 이원익,이항복 등 대신들이 귀양 가는 화를 당하자 아침 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가 강진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그곳에서 임기를 마치고 1620년 관직에서물러나 학문을 강론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1621년 7월 7일에 병이들어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일사집一査集』을 남겼다. 내용은 시 24편, 부賦 2편, 소疎 2편, 책策 1편, 논論 1편, 서序 2편 등 모두 32편이다.  이 문집은 3권 1책의 목활자본으로 1912년에 광주에서 9세손 이계종李啓琮 등에 의해 간행되었으나, 중간에 많이 산실되어 작품 수가 빈약한 편이다. 그러나 그의 문집을 통해 선조 후반기와 광해군 때의 호남사림의 중앙정계나 향촌에서의 활동 및 학문적인 경향을 개략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그의 작품 중에는 인목대비 폐비에 반대한 후 강진현감으로 쫒겨날 때 친구들과 작별한 시나, 고향에 있을 때 지은 시 등이 남아 있어서 당시 호남사림들의 광해군 정권에 대한 정서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이함일의 시문에는 사마시나 문과에 응시하였을 때의 시나 책문 등이 수록되어있어서 그의 작품세계 및 당시의 과시科試의 수준이나 내용을 짐작할 수있다. 또한 문집에 그가 광주목사로 부임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거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를 비롯한 당시 광주사림들의 조정에서의 영향력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일사집, 북구 문화유적, 문과방목.-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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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경重卿 이방주李邦柱<문과,무과>
    임진왜란때 고부군수로 공을 세운 “중경重卿 이방주李邦柱”
      이방주(1542~1597)의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임중任重. 호는 중경重卿. 본관은 함평. 아버지 준俊과 어머니 송씨의 아들로 광주 북구 용봉동중봉 마을(봉곡리, 저불 마을) 출신이다.어려서부터 천성이 지효하여 부모를 정성껏 섬기었다. 부친의 상을 당하자 소찬으로 겨우 연명하며 예를 다하여 치상하니 타인의 귀감이 되었다.1558년(명종 13)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 14위로 합격하고, 1570년(선조 3) 식년시 갑과 3위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校理, 1576년 대동찰방大同察訪, 1583년 무장현감에 재직할 때에 거친 벼 1만여섬의 부실이 호조낭청戶曹郎廳에게 적발되어 그를 잡아다가 추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전라도사를 역임하면서 서인西人의 영수인 송강 정철의 무함誣陷을 변호하였다.1594년 임진왜란 중에 고부군수로 임명된 것으로 보아 의병청의 병사와병기, 군량모집에 기여한 공로가 큰 것으로 여겨진다.1597년 정유재란 때 그는 중풍을 앓았는데 아들인 주부 수경壽慶이 대나무 가마를 태워 영암의 한 산골에 피하여 숨었다. 왜적이 갑자기 닥치니, 그가 말하기를 “나는 이미 중병으로 살기 어려우니 너는 마땅히 피하라. 네가 살아 있어야 내 시신을 거둘 것이다.” 하였다. 수경이 가마를 붙잡고 나가지 아니하여 부자가 함께 순절하였다. 금상 때 정문을 내렸다. 저불(적불, 笛吹, 赤茀)이란 마을 지명의 유래가 그의 과거급제와 관련이 있다 한다. 1570년 그가 과거 급제해 종형인 백춘百春 종택 사당에 모셔있는 선조先祖에게 급제를 알리기 위해 피리를 불고 취적吹笛 행차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출전 북구 역사인물, 문과방목, 선조실록, 광주읍지, 함평이씨 종친회지.-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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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당梧堂 이긍李兢<문과,무과>
    세종때 ‘기성군’으로 봉해진 ‘기성군신도비’의 주인 “오당梧堂 이긍李兢”
      이긍(1389, 공양왕 1~1433, 세종 15). 조선전기의 문신. 호는 오당梧堂.본관은 함평. 이춘수李春秀의 아들로 함평이씨 기성군파 파조이다.광주 각화동에 예장토록 하여 광주와 인연을 맺었다. 그의 증손 계인繼仁이 기묘사화를 피하여 경기도 용인에서 긍의 묘소와 가까운 북구 오치동으로 옮겨와 살았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충성스럽고 온화하여 너그럽고어진 도량과 재능이 있었다.1405년(태종 5)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3위로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역임하고, 1427년(세종 9)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가 되어 중시重試 을과乙科 1위로 급제하였다. 1430년(세종 12) 예조참의禮曹參議, 1431년(세종 13) 참찬관參贊官, 동부대언同副代言, 우부대언右副代言, 첨총제僉摠制, 1432년(세종 14) 이조우참의吏曹右參議, 이조좌참의吏曹左參議, 공조우참판工曹右參判, 한어漢語(중국어)를 잘하여 승문원제조承文院提調가 되어 한어를 가르쳤다.1433년(세종 15) 공조참판工曹參判이 되어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북경에 가던 도중 병을 얻어 첨수참甛水站에 이르러 사망하였다.1433년(세종 15) 그의 졸기에 요동 도사遼東都司가 치제致祭를 하고,임금이 부음을 듣고 심히 슬퍼하여 기성군箕城君에 봉하였으며 관곽棺槨과 쌀과 콩을 합해 70석을 하사하고 승지承旨 임은林銀에게 명하여예장으로 치제케 하였다. 그 후 함평 사산사射山祠에 배향되었으며, 또한 광주광역시 북구 각화동 372번지에는 함평이씨 기성군파 후손들이 1938년에 주격재奏格齋를 건립하고 매년 10월 15일에제향하고 있다. 그리고 1998년에 기성군신도비, 1999년에 기성군임종유시비, 2006년에 기성군유사비가 세워졌다.출전 북구 역사인물, 조선왕조실록, 광주읍지, 북구 문화유적, 함평이씨 광주종친회지.-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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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헌勿軒 이초李椒<문과,무과>
    조선의 기초를 다지는데 큰 공헌을 한 “물헌勿軒 이초李椒”
      이초(1372~1442)는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숙명叔明. 호는 물헌勿軒.본관은 광산. 한림 숙백淑白의 손자이며 순順의 큰아들로 광주 북구 운암동 대내 마을 출신이다.1390년(공양왕 2년) 생원시 生員試에 급제하고, 이숙번李叔蕃과 조선건국에 참여하여 이태조가 조선을 개국하자 기초를 다지는 일에 지대한공헌을 하였다. 1393년(태조 2) 식년시 문과에 6위로 급제하여 1414년 형조정랑刑曹正郞, 1417년 나주교수관羅州敎授官에 재직 중 형조에 있을때 이숙번李叔蕃의 노비소奴婢所 판정 시비 사건으로 파직되었다가 다음해에 직이 복귀되었다. 그 뒤 성균관 대사성大司成과 이조참판, 경연춘추관사經筵春秋館事에 이르렀다.1408년 태조의 상喪에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데 태종이 제왕의 정복을입고 영접을 하려하다 천자의 칙서勅書를 받을 때의 복장服裝을 어떻게할 것인지를 예조좌랑인 그를 보내 사신에게 예禮를 물으니, 사신이 말하기를 “잠깐 길복을 입는 것이 위를 공경하는 의리이니, 예복禮服으로 맞이하고 효복喪服으로 제사祭祀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1427년(세종 9) 2월 11일 지고부군사知古阜郡事에 임명되어 그가 외직으로 부임하기 전에 임금에게 하직을 고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말하기를“전라도는 굶주린 백성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천재가 여러번 닥쳐 백성의먹을 것이 조금 힘들고 어려우니, 그대는 나의 지극한 심정心情을 헤아려마음을 다하여 고을을 다스려서 민생을 구휼救恤하라.”하였다. 1435년(세종 17) 11월 28일 지안악군사知安岳郡事에 임명되어 그가 임금께 작별을 아뢰니, 임금이 불러 보고 말하기를 “황해도는 토지가 척박하고 농사가 되어 가는 형편도 또한 풍년이 들지 않았으니, 그대는 가서 근신하여백성의 생계를 후하게 돌보아 주라.”하였다.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조선왕조실록, 광산이씨한림공파족보.-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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