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복애伏崖 범세동范世東<문과,무과>
‘북부여기’의 저자로 민족 고유사상의 계승 발전에 기여한 “복애伏崖 범세동范世東”



  범세동(1342~1397)은 고려말의 문신·학자. 자는 여명汝明. 호는 복애伏

崖. 시호는 문충공文忠公. 본관은 금성이다. 통찬通贊 후춘後春의 아들

로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였다가 고향인 나주 시랑곡(현. 광주광

역시 광산구 복만동)에 은거하였다.

포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문인으로 1369년(공민왕 18)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부윤德寧府尹1)을 거쳐 문하부 낭사의 간쟁책임자인 간의

대부諫議大夫2)를 역임하였다.

이성계(李成桂 1335~1408) 일파의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고려가 쇠망의

길을 걷게 되면서 고려의 충신들은 하나씩 제거되었다. 고려 귀족의 대표

로 고려 왕실을 지키기 위해 일생을 바친 목은 이색이 제거 되었고, 선생

의 스승인 포은 정몽주가 타살되었으며, 야은 길재가 초야에 묻혀버렸다.

이에 신규, 조의생, 임선미, 이경, 맹호성, 고천상, 서중보 등 72인과 같이

두문동에 몸을 숨어 은둔하였다.

1392년 정도전, 남은, 조준 등 신진 사림들이 태조를 받들어 새 왕조를

세우고, 공양왕을 몰아내자 고려는 멸망하였다.


1) 덕녕부윤 : 조선전기 강원도 소속 부(府) 단위 행정구역, 태조의 외향(外鄕)으로 부(府)

로 승격됨. 1413년 양양도호부로 개칭, 윤은 지방관청인 부의 우두머리.

2) 간의대부 : 고려 시대, 문하부(門下府)에 딸린 정사품(正四品)의 벼슬.


 이에 범세동은 세상을 등지고 조선 왕조의 개창을 반대하며 고향인

나주 시랑골侍郞谷(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복만동)에 은거하였다.

조선 태종이 여러 차례 벼슬을 권했으나 끝내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범세동은 그는 설총, 최충, 김양감,

안향, 이색으로 전해지는 고려 인물들의 학문 계통과 그 행적을 기술한

『화동인물총기』를 저술했고, 『북부여기』를 통해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민족사 국통을 밝히고 천부경을 쉽게 풀이해 고유 사상의 계승

발전에 기여했다.

 아울러 『화해사전華海師全』, 『동방연원록東方淵源錄』 등의 책을

펴내며 동방 성리학의 근원을 밝히는데 힘을 쏟았다. 범세동의 불굴의 정

신과 바른 저술은 사육신과 백성들의 숭앙의 대상이었으며 선비정신의 본

보기가 되었다.

 사후에는 후덕군厚德君에 봉해지고 문충의 시호를 받았으며, 개성의 표

절사表節祠,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 광주의 복룡사伏龍祠에 제향되었

다. 고려 공민왕조에서 벼슬이 덕령부윤 간의대부 후덕군에 이르렀고 고

려의 국운이 다할 때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전조에 충절을 다했다.

조선 순조 때에 포양되어 복룡사를 세우고 향화를 올리다가 1868년(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됨에 따라 그 후손들이 복룡사伏龍

祠 터에 용호재龍湖齋를 창건하고 복애 범세동의 사적을 기록한 유허비

를 세우게 되었다.

 용호재는 금성범씨 재실로써 고려 말엽 정충탁절貞忠卓節로 이름이 높

던 복애 범세동을 주벽으로 하여 덕행이 높은 범가용, 학행이 높은 범천

배와 임진왜란 중 진주대첩에서 순국한 죽천 범기생, 성와省窩 범기봉 등

다섯 사람을 배향하던 복룡사가 훼철된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범세동의 묘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 산94-1에 조성되어 있으며 광

주광역시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었다.

 묘역 안에는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묘비와 문인석이 있다. 1.65m 높이

의 묘비는 대리석으로 만들어 화강암의 사각형 대좌에 맞추어 세웠다. 상

당한 거리를 두고 마주 보고 서있는 문인석은 높이 210㎝로 각이 진 관모

를 쓰고 눈·코·입이 뚜렷한 얼굴에 두 손을 가슴에 모아 홀을 들고 있는데

조선시대 사대부 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출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려사 절요, 광주읍지, 북구 역사인물, 북구 문화유적조

사보고서, 복룡사유허비, 화해사전(華海師全), 동방연원록(東方淵源錄).


-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top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