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송계松溪 노극창盧克昌<문과,무과>
성리학에 투철한 조선 중기의 문신 “송계松溪 노극창盧克昌”



  노극창(1482~1551)은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영경榮卿. 호는 송계松溪.

본관은 광주. 노준공의 8대 후손이며 부친은 의흥위호군義興衛護軍 노상

지盧尙枝 모친은 숙부인 보성김씨의 아들로 광주 북구 우치동에서 태어

났다.

 어려서부터 품행이 뛰어나고 기개와 절도가 있어 부모상에 3년의 시묘

살이를 하였고, 20세 때 경전과 사기를 널리 통달하고 성리학에 투철하여,

1514년(중종 9) 문과 별시別試 병과丙科 14위로 급제하였다. 1516년(중종

11)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 1518(중종 13) 서장관書狀官, 1530년(중종

25) 김제군수金堤郡守, 1533년(중종 28) 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이르고 외직으로 남원부사南原府使, 담양부사潭陽府

使를 거쳐 광주목사光州牧使, 1550년(명종 5) 평산부사平山府使에 이르

렀다.

 학행이 뛰어나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 하서河西 김인후

(金麟 厚 1510~1560),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 1459~1547), 송재松齋 나

세찬(羅世纘 1498~1551),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 제현諸賢

과 도의道義로 교제交際를 하였다.

광주에 살다가 말년에 함평군 나산면 송암리에 이거 정착하였다고 한

다. 그가 남원부사로 재임중에 함평 송암리에 가는 길에 광주 극락강에

서 백면서생白面書生 안충달安忠達을 만나 글재주를 시험해보니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으로 여겨져 사위를 삼았다. 그로 인해 안씨는 본래 광주

에 살았는데 처가에 정착하여 지금까지 이 마을은 죽산안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1551년(명종 6) 평산부에서 병으로 인하여 별세하니 향년 69세였다.

1884년에 창건한 송계사松溪祠(나산면 송암리 소재)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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