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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상의(全尙毅) : 1575 ~ 1627
    전상의(全尙毅)장군은 광주출신으로 정묘호란 때 귀성부사로 평안도의 군사 중심지 안주를 지켰다. 안주는 평안부사 남이홍 · 안주목사 김준이 중앙을 막고 장군은 남영인 백상루를 지키는데, 남공과 김공이 세가 불리하자 탄약고를 폭파시키고 죽자 장군은 백상루에서 최후까지 접전하였으나 죽음이 임박하자 자살하였다. 그 후 경렬사에 배향되었으나 지금 화암동에 충민사를 짓고 성역화 했다 .광주고등학교에서 사구동에 이르는 거리를 구성로로 이름을 지어 전상의장군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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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충신(鄭忠信) : 1576 ~ 1646
    정충신은 비록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출중한 재주와 행동이 민첩하여 왜란 때는 광주목사 권율을 도와 공을 세웠다. 또한 중앙으로 올라간 후 이항복을 도와 외교문제 해결에도 큰 공을 세웠으며, 후일 권율의 사위가 되었다. 인주반정 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켜 서울이 함락되자 정충신은 이괄의 난을 평정하고 서울을 탈환하였다. 정묘호란이 발생하여 왕이 강화도로 피난하자 장군은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출전하여 사직을 지켰다. 국가로부터 장군은 금남군으로 봉해져 광주의 중심가를 그 칭호를 따서 금남로로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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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상(朴祥) : 1474 ~ 1530
    박상은 전라도도사(전라도부지사) · 홍문관의 요직을 거쳤으나 노부모 봉양을 위해 향리인 담양의 부사를 자청하여 봉직했다. 그러나 연산군의 척족을 탄핵하여 해직되자 선비가 나아갈 때가 아니라하여 고향에 은거하였다. 박상은 중종반정 후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 이 중종비 신씨(愼氏)를 몰아내고 국정을 좌지우지하자 순창군수 김정과 함께 중종왕후의 복위를 건위하다가 혁명세력의 보복으로 남평에 유배당했다. 그 후 복직되어 충주목사가 되었고 기묘사화를 맞아 많은 선비들이 살해되고 유배 또는 은거하게 되었는데, 박상은 직접 연루되지 않았으나 그들과 뜻이 맞아 김안국이나 김세필 등의 기묘명현 등을 보살피는데 최선을 다했다. 선생은 나주목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저술을 남기고 제자들을 길렀는데, 그의 동국사략(東國史略)은 강직한 선비정신과 정의감을 모아서 저술한 역사서이고, 그가 가르치거나 교류한 후학들로는 하서 김인후, 면앙정 송순, 소쇄원 양산보, 제봉 고경명, 석천 임억령 등이 대표적이다. 후손들은 서창면 절골과 송정리의 솔모리(素村) 송호영당 주변에 살고 있으며, 월봉서원에 배향하여 매년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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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신,의병> 경렬공景烈公 정지鄭地
    고려말 왕에게 ‘왜구 토벌책’을 올리고 고려 4대첩의 하나인 관음포 전투를 승리로 이끌다
       정지(1347~1391)는 고려 말의 무신. 초명은 준제准提. 호는 퇴암退庵.시호는 경렬景烈. 본관은 하동. 이履의 아들로 전라도 나주목 거평면,현 나주시 문평면 안곡리 죽곡 마을에서 태어나 1391년에 윤이尹彛 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청주옥에 갇혔으나 홍수로 풀려났다. 그 뒤 광주에 물러나 있던 중 판 개성 부사로 부름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1365년(공민왕 14) 무과에 급제한 뒤 관직에 진출하여 1374년(공민왕23) 중랑장中郞將이 되어 국왕을 가까이 모시고 있을 때 왜구를 격퇴할수 있는 좋은 계책을 올린 사람이 없다는 탄식을 듣고 왕에게 왜구토벌책을 올렸다. 이것을 계기로 전라도 안무사에 발탁되어 왜인추포만호倭人追捕萬戶를 겸하면서 양광도 안무사 이희李禧와 여러 차례 방왜책防倭策을 건의, 백성들의 부담 완화와 전략의 효율화에 노력하였다. 특히 수군양성을 강조한 그는 수군의 강화와 함께 전선戰船도 건조하였다.1377년(우왕 3) 여름, 예의판서, 순천도병마사가 되어 순천, 낙안의 왜구18명을 사살하고 3명 생포했다. 그해 겨울에 왜구 40여 명을 사살하고 2명을 사로잡았다.  1378년(우왕 4) 왜구가 영광군, 광주광역시, 동복同福 지금의 전라남도화순군 동복 등지를 침략해 오자, 그가 도순문사 지용기 및 조전원수 이림, 한방언 등과 함께 옥과현玉果縣 지금의 전라남도 곡성군까지 추격했는데, 적이 미라사彌羅寺로 들어가자 아군이 포위한 후 불을 지르고 마구공격하니 적은 대부분 불에 타 죽었으며 말 100여 필을 노획했다. 이 전투에서 정지의 공이 가장 컸기 때문에, 승첩을 보고하자 정지 및 지용기에게각각 은 50냥을 하사하였다. 왜구가 다시 담양현潭陽縣 지금의 담양군을침략했으나 정지와 지용기가 격파해 17명의 목을 베었다. 곧이어 정지는전라도 순문사가 되었다.1382년(우왕 8) 해도원수가 되었는데, 왜선 50척이 진포鎭浦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으로 들어오자 그가 공격하여 그들을 쫓아내었고, 군산도群山島 지금의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까지 추격하여 배 4척을 포획하였다.  1383년(우왕 9) 그가 전함 47척을 거느리고 나주, 목포에 주둔하던 중에 왜구가 큰 배 120척을 거느리고 경상도를 침략해 왔는데, 이때 출전하여 선봉에 있던 20척과 전투를 벌였고, 격파하여 적선 17척을 불태우니,이것이 바로 최영의 홍산대첩, 이성계의 황산대첩, 최무선의 진포대첩과더불어 유명한 전투 중 하나로 알려지게 되는 관음포 전투이다. 이후 정지는 이때의 전공 때문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해도 도원수 겸 양광전라경상강릉도 도지휘처치사로 임명된다.  1384년(우왕 10)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임명되어 보다 근원적인 방왜책으로서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對馬島와 이키시마壹岐島의 정벌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387년(우왕 13) 스스로 대마도 정벌을 자청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주장은 이러했다. “근래 중국이 왜를 정벌한다고 공언하고 있는데, 만약 그들이 우리 영토에까지 전함을 분산해 정박시킨다면, 각종 물자를 뒷받침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이 우리의 허실을 엿보게 될 것이 우려됩니다. 왜는 온 나라가 도적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반도들이 대마도와 이끼도壹岐島 지금의 나가사키현長岐縣 이끼도壹岐島에 웅거해 가까운 우리 동쪽 변방으로 수시로 들어와 노략질하는 것입니다. 그 죄를 세상에 공표한 다음 대군을 동원해서 먼저 여러 섬을 공격해 그 소굴을 전복시킨 다음, 일본에 공문을 보내 빠져 달아난 적을 쇄환해 귀순시킨다면 왜구의 우환이 영원히 제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중국의 군대가 우리영토로 올 이유도 없어질 것입니다. 현재 우리 수군은 모두 해전에 익숙해1281년(충렬왕 7년) 일본 정벌 당시 몽골병과 한병漢兵이 배에 익숙하지못했던 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니 만약 적절한 때에 순풍을 기다렸다가 기동한다면 쉽게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가 오래되면 썩고 군사가 오래되면 피로해질 것이며, 또한 지금 수군이 군역에 지쳐 날마다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으니, 이 기회를 타서 전략을 세워 소탕해야지 절대 늦추어서는안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고려사 정지 열전>  1388년(우왕 14) 안주도 도원수로서 우군도통사였던 이성계 휘하에 소속되어 제2차 요동 정벌에 참여했는데, 그즈음 이성계가 출전하기 전에사 불가론을 주장하며 예측했던 대로 왜구가 3도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상황이 그리되자 위의 전공들로 인해 왜구들에게 있어 공포의대상이었던 그가 위화도 회군 직후 영광 전라 경상도 도지휘사로 임명되어 도순 문사 최운해, 부원수 김종연, 조전원수 김백흥과 진원서, 전주 목사 김용균, 양광도 상원수 도흥, 부원수 이승원 등을 이끌고 출전하게 되는데, 이때 적을 대파하여 58명의 목을 베고 말 60여 필을 노획하는 승리를 거둔다. 당시 사람들이 “이번 전투에 이기지 못했다면 3도의 백성은거의 다 죽었을 것이다.”라며 안도했다고 할 정도였다. 이렇듯 동시대의선배 명장인 최영, 이성계 못지않은 전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이듬해 우왕의 복위를 모의한 김저金佇 변안열邊安烈의 사건에 연좌되어 경주慶州 횡천橫川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위화도 회군의 공으로 2등 공신에 봉해졌다.  1391년(공양왕 3) 윤이尹彛 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청주 옥에 갇혔으나 홍수로 풀려났다. 나주로 낙향하지 않고 광주목 편방면 현 동구동명동으로 낙향하였다. 그가 광주에 살다가 생애를 마치고, 묘소 또한북구 망월동 산 176번지에 소재해 있어 광주 인물로 분류하였다.1644년(인조 22)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현 동명동에 경열사를 세워 모셨으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68년(고종 5) 훼철되고, 일제강점기인 1921년 나주 노안 금안동에 사당을 건립하고 위패를 모셨으나, 1981년 북구망월동에 경열사를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 광주광역시는 서구농성동 서구보건소 앞 사거리에서 북구 중흥동 광주역 앞 교차로를 잇는도로를 경열로라 하였다.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시사, 정지장군, 고려사 정지열전, 경열사지.-자미(紫薇)골 역사인물 책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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