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목사牧使 신석유申錫遊<문과,무과>
사재를 털어 복룡 마을을 재건에 힘쓴 목민관 “목사牧使 신석유申錫遊”



  신석유(1842~1886)는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성언聖言. 본관은 평산.

신재수申在修의 아들로 한양 출신이다. 목사 시절에 복룡 마을과 인연이

있었다.

  음직으로 관직에 나아가 1860년(철종 11) 선공감繕工監 주부主簿를 시

작으로 1864년(고종 1) 용궁현감, 1865년 덕산군수, 1867년 장흥부사,

1871년(고종 8) 광주목사를 거쳐 신미양요가 발발하자 장단진長湍鎭 병

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총융청후영장토포사摠戎廳後營將討捕使를

지내고, 1875년(고종 12) 강화도 판관, 1876년 공주목 판관, 1878년(고종

15) 진주목사, 1883년(고종 20)에 문과 병과 11위로 급제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때 좌부승지, 1885년(고종 22) 사헌부 대사헌,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하고, 죽은 뒤 1910년 규장각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광주광역시 북구 신룡동 632-1에 1881년(고종 18)에 세워진 높이

128cm, 폭 44cm, 두께 21cm의 목사 신석유 영세불망비가 있다. 비문의

내용에 따르면 고종 8년(1871) 신미년 봄에 나무가 울창한 광주 복룡 마

을에 마을 주민들이 영산강 솔 무대기 숲 주변에서 잡은 물고기를 마을로

가져와 옹기솥에 끓이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 마을 주택 30호가 전소되

어 마을이 폐허가 되어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자 광주 목사 신석유

가 마을 재건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내놓는 등 마을 재건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에 마을 독지가인 김용희金溶喜가 앞장서고 주민들이 협조하여

1881년 목사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서 영세불망비를 세우게 되었다.

  원래 이 비는 마을 입구 복룡동 산31-2번지 미구등(2009년

도로편입)에 세웠으나 1970년대 광주시가 각종 비석을 광주공원

으로 옮길 때 이 비도 그곳에 옮겼다. 2011년 10월 마을 만들기

사업의 목적으로 추진된 <복룡마을 노거수 공원> 조성 때 광

주공원에서 이곳으로 다시 옮겨 복원하였는데 비문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 앞면 -

牧使申候錫游永世不忘碑

一府陽春 한 고을 따뜻한 봄날에

翳我伏龍 복룡 마을이 자신을 가리니,

惠愛惟均 은혜와 사랑이 한결같아

民蒙偏仁 백성들을 자애롭게 했네,

里災于燬 마을이 불에 타버리자

公去擇存 공이 사람들을 구해내고,

百堵維新 집집마다 담장 새로 쌓았으니

永世侯句 목사의 업적 영원하리.

- 후면 -

上之八年 辛未光之伏龍厄於鬱攸里 墟民散時 侯申公錫游 捐俸撫循

使之 奠堵墟者新 散者集 侯之德 忽可忘 諸民不堪六矣 歲辛巳本里士人

金溶喜 出專力圖 不朽足以驗侯惠之入人深 而非溶喜之出義伊誰爲哉

里人咸曰可記也,

辛巳 二月日



출전 문과방목, 광주읍지, 광주의 문화유적, 북구 문화유적조사, 평산신씨 광주·전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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