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문절공文節公 정수충鄭守忠<문과,무과>
세조의 즉위를 도와 좌익공신 3등에 책록된 “문절공文節公 정수충鄭守忠”




  정수충(1401~1469)은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경부敬夫. 시호는 문절文

節. 본관은 하동河東. 아버지 감찰 정제鄭提와 어머니 광주김씨光州金氏

의 아들로 개성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고 재행才行이 있었다. 1445년(세종

27)45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환관을 가르치는 선생에 선발되어 공직

에 들어섰다. 후에는 세종의 명으로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선발되어 영응

대군永膺大君 염(琰 : 세종의 아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승의부위사정

丞義副尉司正, 경창부승慶昌府丞 등을 거쳐 1449년 수부사직으로 경창

부승을 겸하였다. 1450년(세종 32)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승문원 부교리가 되어 수양대군을 따라 집현전에 나아가서 『역

대병요歷代兵要』를 찬하였고, 그 뒤 훈련원주부, 서학교수西學敎授, 성

균관사예 등을 거쳤다.

  1453년(단종 1)에 행사용行司勇으로서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가담하여

6품직에서 4품직으로 승진되었고, 1455년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좌

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성균관사성이 되고, 1457년(세조 2) 집현전 직제학으로 승진, 하

원군河原君에 봉하여졌다. 이해 의경세자懿敬世子가 죽자 세조의 명으로

주상자主喪者가 되었다. 이어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거쳐 1463년

대사성大司成이 되고, 이후 1469년(예종 1) 7월 중추부사中樞府事 좌찬

성左贊成에 이르러 벼슬을 사양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같은 해 9

월에 지병으로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청렴 검소하였으며, 효성이 지

극하였다. 시호를 문절文節이라 했다. 대구의 청백서원淸白書院, 광주 화

담사花潭祠, 청주 청절사淸節祠에 제향祭享 되었다.

문절공 정수충의 후손으로 석포石圃 정병현鄭丙鉉이 광주 북구 양산

동 75-7번지에 건립한 삼호정이 있으며, 이 정자는 그 아들 만석晩石

정해붕鄭海鵬이 1917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이 정자의 형태를 보면 도리 석초, 도리 기둥에 정면 6칸, 측면 4칸의 골

기와 팔작지붕으로 다른 정자와 달리 좌변 1간의 대청에 한 칸의 마루가

전면에 증축되어 모양이 흡사 ㄱ자형으로 되어있다.

두 칸의 마루에는 <삼호정>이라는 대서 현판이 전후 양면에 걸려 있고

일곱 개의 주련 판각이 각 기둥에 부착되어 있다. 이 정자의 구조 및 이름

으로 보아 유락을 위한 정자와 학문을 위한 서재의 기능을 함께 겸비한

건물로 보인다.



출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국조인물고, 광주의 문화유적, 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

화담사지.


-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top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