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취은醉隱 정덕필鄭德弼<문과,무과>
영조께서 ‘참된 선비’라고 칭찬하신 “취은醉隱 정덕필鄭德弼”

 


  정덕필(1725~1800)은 조선 말기의 문신 학자. 자는 사량士良. 호는 취

은醉隱. 초명은 몽필夢弼. 본관은 하동河東. 정대중鄭岱重의 아들로 광

주 북구 오치동 출신이다.

송시열의 제자로 경학과 성리학을 공부해 학문의 경지에 이르렀다.

1756년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한 뒤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759(영조 35)년 3월에 성균관에 있을 때 왕이 성균관에 명하여 경의를

강론하는데 적합한 5~6인을 뽑아 대학서문을 강講하라고 하여 이 중에

뽑혔는데, 영조가 뽑혀 온 유생儒生들에게 “세상의 도가 어지럽혀지고 선

비의 풍토가 권세를 다투는 일에만 있는 폐단弊端을 없애는 방법을 묻자,

그는 도道가 어지럽고 사습士習이 바르지 못함은 윗사람들이 어떻게 하

느냐에 달려있으므로 위에서 성심으로 바르게 인도하면 모든 폐단을 없앨

수 있다.”고 진언進言하였으며 이후에도 종종 경연에서 임금과 묻고 대답

할 기회가 있어 풍부한 학식과 바른 성품을 바탕으로 명쾌한 답을 올려 영

조英祖가 여러 차례 칭찬하며 그대의 인품이 자상하고 머리가 명석한데다

문학에 재능이 있으니, 내가 참으로 참된 선비를 얻었노라고 기뻐하였다.

   1762년(영조 38)에 문과 병과丙科 제1인으로 급제한 뒤,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에 제수되어 사현각思賢閣에 입시入待하였을 때 붓과 벼루鍮硯

를 하사下賜 받았다.

  1764년(영조 40)오수도찰방鰲樹道察訪에 임명되어 “서민들을 잘 어루

만져 은혜가 깊고 관대한 아량으로 선정을 베푸니 흉년을 겪으면서 곤궁

한 처지의 백성들이 모두가 추대하고 편안하게 여기네!”라는 역인들이 목

비를 세움으로 봉렬대부奉列大夫 품계에 승진하고, 창락찰방昌樂察訪에

임명되었다.

   1767년(영조43)품계가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오르고, 1768년 정월, 역

인驛人들이 애민선저비를 세웠다. 1769년(영조 45) 성균관전적, 다음 해에

성균관직강, 사헌부감찰에 임명되었다.

  1771년(영조 47) 예조정랑이 되어, 이름을 몽필夢弼에서 덕필德弼로 개

명하여 이조에 올리고, 허세를 부리기 좋아하는 권위주의적인 상관上官

(副使)이 동지사를 맞이하는 일이 지체되었다 하여 이방吏方과 병방兵方

에게 곤장을 침으로, 이에 반발하여 파직罷職의 장계狀啓를 올리고 항명

抗命하다 삼척부三陟府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1772년(영조 48) 4월 방면放免되어 돌아왔다. 1773년(영조 49) 큰 아들

과 작은 아들이 연이어 감시監試에 합격하였다. 그는 1774년(영조 50) 사

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고, 아버지가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

부사僉知中樞府事에 가자加資되어, 어머니도 함께 숙부인淑夫人에 가자

되었다.

  1775년(영조 51)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거쳐 이조좌랑吏曹佐郎이 되었

다. 1776년(영조 52) 영조英祖의 승하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1781년(정조 5)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재임명이 되고, 1782년(정조 6) 아

버지는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 그는 사헌부장령司憲府掌

令에 부임하여 사은謝恩한 후에 상소문을 올리고 회답을 기다리는데, 봉

납승지捧納承旨가 삭직削職되고 모든 승지도 파직罷職하라는 하명下命

이 내려졌다. 그 상소문의 내용은 임금의 덕행德行에 대하여 경계警戒해

야 할 점을 권하고 격려한 내용인데, 너무 직설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권문

세가權門勢家들의 사치와 비리를 고발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

다. 그러나 이후에 그 상소는 경향 각지의 선비들로부터 뜻이 분명하고 사

리에 밝은 상소라 하여 칭찬이 자자하였다. 이 일로 6월 명천부明川府로

귀양 보내라는 명이 내려지고, 12월 사면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 집에서

농사를 지었다.

  1793년(정조 17)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어 상경을 명하는 왕

명을 받들어 좋은 말을 보내와 한양으로 출발 사은하였는데 바로 경기도

사京幾道事에 임명되었다. 1794년(정조 18) 나이 70세로 품계가 통정대부

通政大夫에 가자되고, 1795년(정조 19)1월 합오경진하合五慶陳賀(나라

에 경사가 있을 때 관원들이 조정에 모여 임금에게 축하를 올리던 일)에

나아가 참석하였다.

  1795년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에 임명되어 경모궁景慕宮 행행소幸行

所에서 사은하고 사임辭任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저서로는 『취은일고醉隱逸稿』가 있다. 2007년 6월 30일 국역 발행,

현재 어필각御筆閣은 북구 오치동 930-5(오문로58번길 16)에 자리 잡고

있으며 하동정씨 정승공후 약포공파종회에서 2003년에 건립하였는데 약

포기념공원 내에 있다.

  어필각은 영조 대왕이 정덕필에서 내린 친필 등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

한 곳으로 화강암 주춧돌과 기단 위에 원주 기둥을 세워 정면 3칸, 측면 2

칸으로 정통한시가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어필각 내에는 유품遺品으로 어필과 교지敎旨 32장, 하유下諭 6장, 어

사화御史花와 과거시험의 답안지, 하사받은 놋쇠로 만든 벼루인 유연과

연적硯滴, 붓, 인장과 호적대장 등이 전시되어 있다.

경내에는 하동정씨 양지 문중 삼효녀정려세적비와 약포하동정오도선생

지헌영초생정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북구 문화유적, 취은일고,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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