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일사一査 이함일李涵一<문과,무과>
임진왜란 일본 포로 귀환에 공을 세운 “일사一査 이함일李涵一”

 


  이함일(1563~1621)은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양오養吾. 일오一吾. 호는

일사一査. 본관은 함평. 세종 때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지낸 긍兢의 후예

로 아버지 방필邦弼과 어머니 광산김씨의 아들로 광주 북구 오치동 출신

이다.

  그는 재주와 역량이 뛰어났고 가정에서 학문을 익혀 문장을 잘하였으

며, 양친에게 효도하고 세 동생과 우애하니 향리인들이 모두 기뻐하고 따

랐다.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생館生

으로서 성균관을 지키고 떠나지 않았다.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집에

돌아갔으나 부모들이 이미 피해를 보아 돌아가신 것을 알자 통곡하고 슬

퍼하면서 삼년상을 극진히 치렀다.

  1603년(선조 36) 식년시 병과 1위로 문과에 급제하여 1606년 성균관 학

정學正 겸 중학훈도中學訓導를 지냈으며, 이듬해 종부시 주부主簿를 거

쳐 사헌부 감찰監察 지평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 외직으로 나가 보

령 현감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1614년 영해부사를 거쳐 이듬해 춘추관 편수관編修官으로서 사명을

띠고 일본에 건너가 포로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오는 데 공을

세웠다.

   1616년 성균관사성이 되었는데, 1618년 인목대비가 유폐되고 이원익,

이항복 등 대신들이 귀양 가는 화를 당하자 아침 조회에 참석하지 않았

다가 강진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그곳에서 임기를 마치고 1620년 관직에서

물러나 학문을 강론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1621년 7월 7일에 병이

들어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일사집一査集』을 남겼다. 내용은 시 24편, 부賦 2편, 소疎 2

편, 책策 1편, 논論 1편, 서序 2편 등 모두 32편이다.

  이 문집은 3권 1책의 목활자본으로 1912년에 광주에서 9세손 이계종李

啓琮 등에 의해 간행되었으나, 중간에 많이 산실되어 작품 수가 빈약한 편

이다. 그러나 그의 문집을 통해 선조 후반기와 광해군 때의 호남사림의 중

앙정계나 향촌에서의 활동 및 학문적인 경향을 개략적으로 알 수 있는 자

료이다.

 특히 그의 작품 중에는 인목대비 폐비에 반대한 후 강진현감으로 쫒겨

날 때 친구들과 작별한 시나, 고향에 있을 때 지은 시 등이 남아 있어서 당

시 호남사림들의 광해군 정권에 대한 정서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이함일

의 시문에는 사마시나 문과에 응시하였을 때의 시나 책문 등이 수록되어

있어서 그의 작품세계 및 당시의 과시科試의 수준이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문집에 그가 광주목사로 부임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거론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를 비롯한 당시 광주사림들의 조정에서의 영향

력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일사집, 북구 문화유적, 문과방목.


-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top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