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생진,음사>
식영정을 세운 성산의 사선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



  김성원(1525~1597)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자는 강숙剛叔. 호는 서하

당棲霞堂 또는 인재忍齋. 광주의 충효리(옛. 석저촌)에서 병절교위秉節校

尉를 지낸 아버지 김홍익金弘翼과 어머니 해주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531년 7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환벽당의 사촌 김윤제에게서 송강 정

철과 함께 학문을 배우고, 1545년 임억령林億齡의 딸과 결혼하였다. 장인

인 임억령과 하서 김인후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1551년(명종 6)에 향시에 장원을 하였고, 1558년(명종 14) 진사시에 합

격하였으나 대과에는 응시하지 않고 오직 학문과 덕행에만 힘썼다. 1560

년(명종 15) 창계滄溪 건너편의 성산星山에 서하당과 식영정息影亭을 지

어 식영정은 장인이면서 스승인 석천石川에게 휴식처로 삼도록 기증하고,

이를 배경으로 더욱 자연과 서사書史에 몰입하였으며, 여러 문인과도 활

발히 교유하였다. 한편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등과 도의의

사귐을 두터이 하였는데, 특히 임억령, 고경명, 정철과는 성산星山의 사

선四仙으로 만났다고 한다. 따라서 이때부터 서하당과 식영정을 배경으

로 한 여러 문인이 출입하여 시단을 형성하며 시문학 활동이 이어지게 되

어 가사 문학 작품인 성산별곡의 무대가 되고,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

詠」이 지어지게 되었다.

  1580년(선조 14) 효행으로 침랑寢郞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제원도 찰방

察訪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복가관同福假官

으로 동복현감을 역임하면서 군량을 조달하며 의병을 모으는데 큰 공을

세우고 현민들을 보호하였다. 1596년 조카 김덕령이 무고로 20여 일 동안

6번의 모진 고문으로 옥사하자 동복현감에서 물러나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 72세인 그는 아흔의 노모를 모시고 동복의 모후산

母后山, 919m 성모산성에서 피신하던 중 왜병을 만나 부인과 함께 온몸

으로 막아 싸우다가 노모와 같이 순절한 모후산을 모호산母護山으로 고

쳐 부르며 그의 죽음을 기려 이곳에 서하당김선생모호산순효비棲霞堂

金先生母護山殉孝碑를 세웠다. 뒤에 후손들이 화순군 남면 복교리 광산

김씨 선산 겸 영롱대 부근으로 옮겼는데 주암댐이 만들어지면서 수몰되

게 되자, 1979년 호남 유림의 주도로 광주 북구 금곡동900(배재길 68)에

다시 비를 세웠다. 비문은 담양의 전원식이 짓고 글씨는 그의 11세

손 김희진이 썼다.모후산은 순천과 화순의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나복

산이라고 불렀다. 정유재란때 김성원의 순효를 기려 모

후산을 모호산으로 바꿔 불렀다고도 한다.

  성리학과 주역 등의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시로서는 「식영정

잡영息影亭雜詠」, 「척서도滌署圖」 등이 있고 『서하당유고棲霞堂遺

稿』의 저서를 남겼다.



출전 서하당유고, 광주읍지, 광산김씨 충장공파보, 북구 역사인물, 북구 문화유적,

호남 정자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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