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물헌勿軒 이초李椒<문과,무과>
조선의 기초를 다지는데 큰 공헌을 한 “물헌勿軒 이초李椒”



  이초(1372~1442)는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숙명叔明. 호는 물헌勿軒.

본관은 광산. 한림 숙백淑白의 손자이며 순順의 큰아들로 광주 북구 운암

동 대내 마을 출신이다.

1390년(공양왕 2년) 생원시 生員試에 급제하고, 이숙번李叔蕃과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이태조가 조선을 개국하자 기초를 다지는 일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1393년(태조 2) 식년시 문과에 6위로 급제하여 1414년 형

조정랑刑曹正郞, 1417년 나주교수관羅州敎授官에 재직 중 형조에 있을

때 이숙번李叔蕃의 노비소奴婢所 판정 시비 사건으로 파직되었다가 다음

해에 직이 복귀되었다. 그 뒤 성균관 대사성大司成과 이조참판, 경연춘추

관사經筵春秋館事에 이르렀다.

1408년 태조의 상喪에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데 태종이 제왕의 정복을

입고 영접을 하려하다 천자의 칙서勅書를 받을 때의 복장服裝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예조좌랑인 그를 보내 사신에게 예禮를 물으니, 사신이 말하

기를 “잠깐 길복을 입는 것이 위를 공경하는 의리이니, 예복禮服으로 맞

이하고 효복喪服으로 제사祭祀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1427년(세종 9) 2월 11일 지고부군사知古阜郡事에 임명되어 그가 외직

으로 부임하기 전에 임금에게 하직을 고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말하기를

“전라도는 굶주린 백성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천재가 여러번 닥쳐 백성의

먹을 것이 조금 힘들고 어려우니, 그대는 나의 지극한 심정心情을 헤아려

마음을 다하여 고을을 다스려서 민생을 구휼救恤하라.”하였다.

 1435년(세종 17) 11월 28일 지안악군사知安岳郡事에 임

명되어 그가 임금께 작별을 아뢰니, 임금이 불러 보고 말

하기를 “황해도는 토지가 척박하고 농사가 되어 가는 형

편도 또한 풍년이 들지 않았으니, 그대는 가서 근신하여

백성의 생계를 후하게 돌보아 주라.”하였다.





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조선왕조실록, 광산이씨한림공파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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