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죽천竹川 범기생范起生<충신,의병>
진주성 싸움에서 마지막까지 고군분투한 의병장 “죽천竹川 범기생范起生”


  범기생(1553~1593)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자는 원보元甫. 호는 죽천竹

川. 본관은 금성. 고려 말의 충신이자 학자인 문충공文忠公 복애伏崖 범

세동范世東의 9세손으로, 광주광역시 북구 생룡동에서 부친 범홍로范弘

老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타고난 지혜와 용기가 매우 뛰어났으며, 절의를 지킨

충신 집안에서 자란 덕분에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의로운 일에 앞장서는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자라서는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

며 성리학을 배웠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탄 변사정의 편지를 받고 의

병 참여를 결심한 그는 광주에서 수백 명의 의병을 규합해 나주에 의병청

을 설치한 김천일을 찾아갔다. 여기서 의병의 기율을 세우고 훈련을 맡았

다. 김천일 의병이 수원까지 진출하자 그는 단신으로 한양에 들어가 왜적

의 진지를 염탐하고 5일 만에 돌아와 한양 공략이 어려울 것이라고 보고

했다. 강화도로 진을 옮기자 그는 어선을 개조하고 왜적의 선박을 나포해

단시간에 400여 척의 병선을 구축했다. 1592년 9월 9일 이를 이끌고 나가

한강 양회진에서 대승을 거뒀다. 그 후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

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최경회崔慶會, 고종후高從厚 등의

의병장들과 경상도‧전라도 등지에서 왜군을 물리치는 데 많은 공훈을

웠다.

  1593년 4월 18일 한양에서 철수하는 왜적을 쫓으며 배 위에서 “한산 달

에 칼을 씻고 한수 바람에 배를 매니 장부로서 적을 쫓는 일이 마음에 가

득하다.”는 시를 남겼다. 6월 14일 함안에 도달한 범기생은 진주성 입성을

결심하며 “천리를 행군하여 진양(진주)으로 들어가니 성에 가득한 달빛에

갑옷마저 차도다. 함께 온 장병들의 충의가 가득 차니 동남의 아무리 강한

적인들 두려울 것 있으랴.”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1593년 6월에는 왜군이 대군을 거느리고 진주성을 공격하자, 조정에서

는 도원사都元師 김명원金明元과 전라도순찰사 권율 등을 의령으로 파

견하였다. 그러나 왜군의 숫자와 기세에 눌려 더 이상 도움을 줄 수가 없

었다.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그리고 충청도병마절도사 황진黃進과 6만명

진주 백성들은 힘을 합쳐 왜군을 물리치다 결국 역부족으로 패하고 말았다.

이때 그는동생 범기봉과 함께 임진왜란최대 격전지인 진주성 싸움에

참가하여 치열하게 싸우다가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등의

의병장들과 함께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5년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

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녹훈되었다.

광주 북구 생룡동에 있는 복룡사伏龍祠에 동생 기봉과 함께 배향되었

다. 복룡사는 그의 선조 범세동을 주벽으로 하고 범세동의 6세손 범가용

范可容과 학생으로 이름난 범천배范天培가 배향되어 있던 곳이다.

1868년(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됨에 따라 그 후손들

이 복룡사伏龍祠 터에 용호재龍湖齋를 창건하고 복애 범세동의 사적을

기록한 유허비를 세우게 되었다.

그의 출생지인 광주광역시 생룡동에 사림들이 순의숭모비殉義崇慕碑

를 세웠다.


출전 호남절의록, 광주읍지, 광주시사, 조선명신록, 북구 역사인물, 광주의 문화유적,

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


-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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